104. 서진혁 : 엑스포지션 전속력으로 달려 돌아온 다크엘프의 마을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뱀용에게서 지켜낸 것이 무색할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높이 솟아 있던 탑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해를 벗어난 상황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다급히 마력을 퍼트려 엘레노어를 찾았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푹. 뱀용이 다루던 가지를 그림자로 다시 엮어낸 듯한 검은 쐐기. 엘레노어의 등을 꿰뚫고 솟아나 있는 그것에선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했다. 쐐기는 저 멀리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로부터 뻗어나와 있었다.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형태를 갖추었다. 인간이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구성요소가 부족한, 너저분한 진흙 덩어리로 빚은 듯한 인영. “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멸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입인지 뭔지 모를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그것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놈이다. -투둑. 검은 형체가 쐐기를 뽑아냈다. 엘레노어는 휘청거리며 땅에 엎어졌다. 피가 흥건하다. “엘레노어.” 나는 좀처럼 불러본 적이 없었던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허겁지겁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을 꺼내고, 엘레노어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명백하게 상태가 나쁘다. 출혈량이 너무 많다. 이건 상처가 아물어도- 아냐, 생각하지 말자. “정신 차려, 야, 네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으면 어쩌라고……!” 나는 다시 포션을 들이붓고, 그리고, 엘레노어의 상처를, 이걸, 어떡해야 하지? “그, 대……” 엘레노어가 흐릿하게 눈뜨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모든 엘프의 왕, 별을 건너 새 엘프의 지도자가 될 자, 죽음과 멸망을 거부하는 자!” 전음과 뒤섞인 육성, 형태가 저런 꼴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으득.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니, 세게 악문 이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욕망의 총체다, 누구나 꿈꾸는 불사의 소망을 대변하는 자다!” “아가리 닥쳐, 씨발 새끼야!” “욕망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네놈 따위의 검은 내게 닿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추한 진흙덩이를 보며 검을 뽑았다. 놈은 촉수처럼 휘어지는 팔을 휘둘렀다. 그 속도며 기세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바로 [혼신]을 발동해 그것을 받아냈다. -콰광! 단순히 부딪히기만 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쳐 뒤로 나동그라졌다. 잠시 내려두었던 엘레노어의 몸 역시 그것에 휘말려 굴러갔다. 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말도 안 돼, 이젠 월드 보스도 뭣도 아닌데. “왜, 왜 항상…왜 맨날, 왜 자꾸, 왜 너 같은 새끼가! 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히든 보스고, 월드 보스고, 솔플로는 못 깨는 기믹 던전이고, 왜 죄다 내 앞에만 나타나고 지랄이냔 말야. 이렇게 강해졌는데도 항상 더 강한 놈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는다. 언제나, 항상, 나만! “좀 적당히 하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감정에 반응해 마력이 요동친다. 파도치는 마력은 줄줄 새나갈 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마력강화만 할 수 있었으면, 펜던트가 아직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내가 솔플러가 아니었다면. 그러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서진혁 이 병신같은 새끼는 왜. -쾅!!! “큭!” 어느새 또 한 번 쏘아진 촉수가 방패 위를 때리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쳤다. 조금 전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엘레노어의 몸은 또다시 휘말려 밀려났다. 좆같다. 마력강화도 못 하는 상태로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이 새끼도 뒤지게 세다, 씨발. “씨바알!” 검을 집어넣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엘레노어의 몸을 둘러업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엘레노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분명 휘말려서 죽고 말 거다. 나는 그대로 곧장 바깥을 향해 달렸다. 다행이게도 저놈의 공격은 그렇게 멀리까지 닿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몇 번 공격이 스쳐서 위험했지만, 이동속도 역시 느린 모양인지 금방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쾅! 쾅! 나를 뒤쫓던 진흙 괴물은 다크엘프 마을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에 더 멀리 달렸다. [별빛이 자라는 호수] 그렇게 도달한 곳은, 언젠가 요정과 함께 춤추었던-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들었던 장소. 어쩌면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나는 죽어가는 엘레노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 꿰뚫렸던 자리가 조금은 아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내가 몇 번이나 빈사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포션의 성능이 아니라 재생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9층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은 결손 수준의 상처는 수복하지 못한다. 이렇게 큰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여, 왜 돌아왔나.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던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픽 퀘스트는 분명 완료되었다. 실제로 나는 층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왜 돌아와서……또 다쳐서는.” 자신의 몸에 뻥 뚫린 구멍은 보이지도 않는지, 대수롭지도 않은 내 상처를 걱정하는 엘레노어.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니까. 다크엘프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건 이젠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차피 퀘스트는 끝났으니까.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NPC니까, 자아 없는 깡통대가리에 불과하니까. 돌아올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래, 그렇구나…우리를 걱정해 준 거지? 가슴이 그대를 움직인 거야.” 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미 옛저녁에 내버리기로 해 놓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탑을 올라야 한다는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마음이 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심하다, 한심해, 서진혁. 그렇게 욕을 봤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대체 몇 번을 더 겪어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거냐. 아니, 빌어먹을,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란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많은 것을 버렸다. 하찮은 욕구. 쌓인 습관. 인간성. 선택지. 안주하는 행복.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끝에. “후후, 저 망령에게 감사해야겠는걸.” 어떻게 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만이 남았다. “이렇게, 준비했던 말을 그대에게 남길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엘레노어는 죽음에 둘러싸이고 있음에도, 분명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슬퍼하지 마라, 그대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지 않나.” 나는 그 웃음 앞에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오히려 지금에 만족한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깡통이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그대 품에 안겨서 떠나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엘레노어의 손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갑기까지 했다, 이미 시체처럼. “뭐, 신세 한탄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했지. 그냥, 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음이 기쁘다며, 엘레노어는 한 번 더 눈웃음을 지었다. 뺨을 쓰다듬는 손도, 힘겹게 지어 보이는 웃음도. 마치 나를 달래기 위한 몸짓처럼 보였다. “그대는 여기로 오면 안 됐어. 의지를 관철할 셈이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어야지.” 엘레노어는 뒤이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왜 여기로 달려왔느냐고. 의지와 상반되는 마음이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그 대답을 이미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나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음 때문이라고, 내 나약함이 끝내 버리지 못한 그것 때문이라고. 한심한 인간쓰레기, 앰창인생 서진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라고. 엘레노어는 내가 토해내는 말을 듣고는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 뺨을 살짝 두드렸다. “이런……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구나. 힘껏 때려 줄 셈이었는데.” 그리고 손은 다시금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틀렸어.” 책망하고자 하는 이의 손길과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대의 기억과 심상을 모두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지금 그대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 줄도 알고 있지.”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를 뚝뚝 흘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내 어깨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대는 나약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아.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야.” 꾸욱, 하고. 약하지만 확실하게, 엘레노어가 나를 안고 속삭였다. “그대는 한 번도 죽음 따위를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에 전해져 오는걸.” 뭔가,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냥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토할 것 같다.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렇게 삼켜 내니,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 뺨이 뜨겁다. “항상, 용서받고 싶었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눈물이, 왜 지금 와서 모습을 보이는지. 왜 알아먹지도 못할 말에 눈물 따위가 흐르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나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뭐가, 뭐가…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그대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대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야.” 엘레노어의 손이 이번에는 아물어 가는 내 상처를 쓰다듬었다. 따가웠다. “그대의 기억을 모두 보았다고 했지 않나. 그대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는지,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엘레노어는 내 몸 이곳저곳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평소에 하던 추행이 아니었다. 이번에 손을 댄 자리는 모두, 내가 내성을 키우기 위해 반복해서 자해했던 자리였다. “벌을 받고 싶었겠지, 벌을 받고 나면 용서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힘겹게 눈을 돌렸던 진심이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그건,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지? 나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죽은 엄마뿐이니까. 내가 엄마를 죽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나는 핑계만 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자신을 살필 수 없다. 돌아본다고 한들 보이는 건 ‘과거의 자신’이라는 타인뿐이지.” “반성하며 사는 이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흠결을 찾아 고쳐내려 하니 말이야.” “하지만 감히 말하겠다. 그대의 그것은 결코 흠결이 아니야. 헷갈리지 마라, 그대의 행동은 정말 옳은가?” 엘레노어가 말하는 내 행동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봐도 좀처럼 답은 나오질 않는다. “그대의 어머니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대가 자신을 괴롭히며, 죽음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있었나?” 엘레노어는 내 과거를 보았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 그 긴 필름에 얼룩처럼 남아 있는 우리 엄마의 모습도. 엄마는 내가 어딜 가서든 기죽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내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깎아, 모든 좋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탑에 갇혀 썩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나를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나를 위해 뛰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대를 원망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그랬을 리가 없다. 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 백수 새끼여도, 엄마는 나를 미련할 정도로 사랑해줬으니까. 깨달았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엄마는 나를 탓하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으로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과 함께 눈물도 나왔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자신을 용서해 주라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걸,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 봐라, 그대의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그대는 아닐 게 당연하지 않나.” “모르겠어.” “아니,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것이 원망스럽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시야에서 배제했던 것이. “그리고 그대의 가슴 속에서 끓는 그 감정이,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리고 엘레노어는 나에게 그 감정의 이름을 속삭였다. ** 그 뒤로, 엘레노어는 보다 직설적으로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도 한 번 깨닫고 나니, 엘레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아, 슬슬……정말로 끝인 모양이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구나, 평소에 단련해 두길 잘했어.” 엘레노어의 생명이 한계에 달했음을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호수 덕분이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연결되었던 고리가, 감정을 공유하며 다시금 짙어진 것이다. “자, 눈물 자국은 이제 지우고- 옳지, 전보다 눈빛이 더 멋있어졌구나. 내 취향이야.”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옅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쪽. 관능적인 농담을 툭툭 던져대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입맞춤이 내 입술에 닿았다. 창백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래, 뭐, 경험 많은 척해도 결국 그렇겠지. 오래 전부터 약혼자가 정해져서, 누굴 만날 자유도 없던 녀석이 연애를 따로 해 봤겠나. “응, 마지막이니까…꼭 해보고 싶었다. 미안하구나, 그동안 나이도 한참 많은 게 집적거려서 귀찮았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동안 벽을 세웠던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아니.”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생생히 느껴졌기에, 나는 곧바로 응했다. 엘레노어의 목을 받치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내 쪽에서 입을 맞추었다. “후후, 역시 내가 고른 남자라니까. 마음에 쏙 들어.”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얼마나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잘 전해진다. 뭐, 굳이 거창한 정신 연결 따위가 없어도- 저 새빨갛게 물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때, 엘레노어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죽을 때 나타나는 빛이다. “아아, 딱 맞췄구나.” 서서히 말단부터 사라져 가는 엘레노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살짝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이왕이면……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빼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레노어의 육체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 혼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한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분명 마음을 통해 전했으니까. [업적 달성 : 약속] 그런 거, 다음에 만났을 때 하면 된다고. [업적 보상 ‘강철의 혼’ 을 획득하셨습니다.] **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하이엘프의 왕, 죽음에서 돌아온 망령은 아직도 마을을 헤집고 있었다. 나는 검과 방패를 다시 착용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놈이 날뛰고 있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니 새삼 실성했나, 어리석은 인간족 검사여.” 잠깐 사이에 다른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것인지, 전음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진다.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역시 9층의 스펙은 아득히 뛰어넘은 괴물이다. 이놈은 과연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고, 어떤 배경설정이 있길래, 이런 스펙을 가진 걸까. 별 관심은 없다. 버려두고 떠나도 상관없는 적이지만, 나는 맞서기를 택했다. “작고 약한 인간족이여, 그 가냘픈 검으로 나를- 불사의 욕망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어.” “오호라, 무언가 각오를 다진 모양이지. 각오 따위 무한한 욕망 앞에서 하찮은 것을.” 망령은 주절주절 계속해서 떠들었다. 어디 그 각오를 한번 말해보라며. 느낀 것은 많았지만, 새삼스레 거창한 각오 같은 걸 다지지는 않았다. 다만, 깨달았다. 나는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고, 그 이유도 조금씩 달랐으며, 개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분노가 진정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스릉. 천천히 검을 뽑았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강한 적이다. 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력강화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맞설 수 있을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마력강화를 발동시켜주는 펜던트는 완전히 망가져 힘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그런 건 필요 없다. -쿠르릉! 내 안의 마력이 폭발하며 막혀 있던 길을 질주한다. 마력은 주인의 감정과 의지에 크게 영향받기에, 내 모순된 마음으로는 마력강화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헷갈리지 않는다. 엘레노어가 가르쳐 준 것이 있으니까.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 엘레노어를 속박하는 것, 우리 엄마를 죽인 것. 다시는 환경과 타인을 탓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탓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나의 진정한 적. 이 시련의 탑 그 자체야말로, 나의 적이다.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방법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탑을 깨부수고,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의지는 화살이고, 마음은 불꽃이랬지.” 이 탑을 쳐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 이게 나의 화살, 스스로 맹세한 의지. 그리고, 내 화살에 힘을 실어줄 불꽃은- 저놈이 묻고 있는 각오 따위가 아니라 가벼운 약속. “나는, 거유 미녀 다크엘프랑 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뺄 거다.” 스스로 거세했던 욕망이 불꽃이 되었고, 이제 내 마음과 의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려면 너 같은 좆밥한테 막히면 안 되거든.” 자력으로 이룬 마력강화의 힘으로, 날아드는 망령의 공격을 모조리 쳐낸다. 나는 이미 어지간한 저층 랭커 이상까지 성장했지만, 이 탑 자체가 목표인 이상 그걸로는 부족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걸 위한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자신을 학대하며 뒤따라오는 성장의 쾌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쾌감을 쫓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가장 앞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콰과광!! 내가 휘두른 검에서 방출된 마력이 망령의 좌반신을 통째로 으깨버리는 것을 보며, 다짐했다. 이 탑의 천장을 꿰뚫고, 그 너머까지 솟아오르는 불화살이 되겠다고. [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랭크 : SSS] [에픽 아이템 : ‘엘레노어의 영혼’을 획득하셨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당신에게 영구히 귀속됩니다.] [시련의 탑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