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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어설픈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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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기쁨은 몸이 불타는 고통보다 아득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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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내성 따위가 없음에도, 내가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계속해서 맞아줄 수 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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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터득한 두 종류의 내성 스킬은 각각 마법 공격 전반과 주문 속성의 피해를 감소시켜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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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자연 상태의 마력이 가지는 속성을 ‘주문 속성’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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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법을 이용한 여러 방해 효과 같은 것도 대부분 주문 속성으로 판정된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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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속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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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로서 퀘스트 목표인 비취의 영약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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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뻔했던 것치고는 다른 전리품이 없어서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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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는 딱히 보상을 원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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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여왕에게 세계수에 대해 묻기 위해, 영혼이란 존재에 대해 무언가 답을 얻기 위해, 그래서 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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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고 있는 엘레노어의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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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알아서 뭘 어쩔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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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뿐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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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가 NPC처럼 행동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었다지만 다시 고치면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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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 공유했던 사념과 기억도, 서로 간에 나누었던 정서적인 교류도, 모두 없던 것으로 치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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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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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이토록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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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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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들린 영약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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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이 없어도 괜찮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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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손에 들린 영약을 내던져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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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건 퀘스트니까. 게다가 에픽 퀘스트니까. 다 깬 퀘스트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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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마력을 진정시키며, 나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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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마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여왕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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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정혼자라는 신분 덕분에 여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금방 영약을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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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보상은 대단한 것 없이 그냥 경험치와 골드, 그리고 여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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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이 효과가 없다거나, 접견을 거부하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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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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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는 침대에 등을 기댄 여왕이 나를 노려본다. 여전히 마른 고목 같은 눈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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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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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목소리는 7층에서 들어본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보다 한껏 바짝 눌어붙은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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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다크엘프 중에서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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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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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질문을 추려서 온 건 아니라서 진짜로 ‘몇 가지’인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걸 전부 듣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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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노인보다는 화석에 가까운 나이 때문인가, 정물처럼 보이는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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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대뜸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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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엘프가 가진 왕홀과 나이트 엘프가 가진 왕관에는 세계수에게 간섭할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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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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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을 이용하면, 순환하는 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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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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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다. 이제 그대는 세계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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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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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빛을 띤 여왕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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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왕이 하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세계수에 대해 내가 모르던 건 그것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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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여왕의 대답은 같았다. 그게 전부라고, 세계수에는 어떤 숨겨진 비밀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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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그 후, 세계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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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중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여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에르웬이 말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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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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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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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기분이다. 나는 고작 경험치 조금과 골드 조금을 위해서 그 고생을 한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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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엘프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것이다. 그들도 나도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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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장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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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도,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이미 세계수는 시들어 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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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세계수니 영혼이니 하는 것에 대해 더 알아봤자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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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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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있는 거 아니었나, 하이엘프의 화친 제안에 엘레노어를 내주며 응한 이유가 그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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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고목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나는 내 딸을 위한 평화를 원했을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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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딸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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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인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지, 그 아이도 전쟁을 겪으면 생각이 바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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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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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랬지, 세계수를 독점하고 우리를 내쫓은 포레스트 엘프를 혐오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된 후에도,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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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은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놈들을 무찌르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자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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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구보다 오래 살아오며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전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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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다크엘프의 역사에 대해선 배경 설정 수준으로밖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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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쏜 화살이건, 얼마나 정당한 화살이건, 그것에 꿰뚫려 죽는 것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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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놓은 순간부터, 처음부터 해야 했던 일을 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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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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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 앉아서 대화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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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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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의 긴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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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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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엘프의 왕관과 왕홀을 이용하면 세계수와 영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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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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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애초에 세계수가 시들어 버린 이상, 그것들을 갖고 있다고 해도 뭔가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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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를 살아있게 하는 것, 내가 감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추측되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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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허무하다. 나는 정말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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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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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을 받고 레벨이 하나 올랐다. 에메랄드 와이번을 통해 얻은 새 스킬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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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끝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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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중인 층수는 물론이요, 레벨에도 어울리지 않는 스펙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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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솔로 플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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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대로라면 시련의 탑을 클리어하는 것은 무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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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작정하고 층수를 올리는 것에만 전념한다면 25층까지는 순식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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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역의 보물 상자도, 각 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요소도, 목숨 걸고 찾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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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층에 오랫동안 머물며 단련할 필요도 딱히 없다. 마력 운용 연습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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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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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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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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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람 같아도 결국 다들 NPC다. 퀘스트가 끝나면 그냥 깡통 키오스크로 변해버릴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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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련의 탑이 그렇게 설계된 걸 어쩌겠어. 나도 결국 탑의 시스템에 속한 존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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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탑이 부여한 시스템으로 성장하고, 탑이 정한 방식대로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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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만 가면 된다. 괜히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나는 충분히 목표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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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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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멈춰 서지 않기로 정했잖아, 더는 미련 갖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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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욕망에 그랬던 것처럼, 잘라내고 버리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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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욕도, 식욕도, 성욕도, 모든 것을 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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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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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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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정찰대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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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충돌하며 마찰을 벌이고 있다. 이미 전쟁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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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퀘스트 속에서 도전자의 역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세력을 도와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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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은 당연히 여러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일정 숫자 이상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그걸로 2장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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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한 이상 굼뜨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9층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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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해주다니 무척 기쁘구나. 어디, 상으로 입맞춤이라도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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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나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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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쌀쌀맞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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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NPC는 원래 이렇게 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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