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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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시련의 탑 19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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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은 NPC의 영혼을 재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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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소스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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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경우처럼, 에인의 혼과 의식도 퀘스트 완료와 함께 상층의 자신-회색 마왕에게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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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에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결심을 하든 결국 48층의 회색 마왕이 되는 미래만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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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영혼이 없는 채 흘러갔던 7층에서 8층까지의 20년을, 돌아보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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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에서 9층까지의 긴 시간도 마찬가지. 영혼도 의식도 희미한 채, 예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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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층에서 행한 행동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상층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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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의 NPC들이 7층과 8층에서의 내 행적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 보면, 분명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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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8층과 9층 모두, 삼대 세력의 전쟁이라는 큰 배경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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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에 의해 마법이 쇠퇴하고 몰락한 19층의 배경, 회색 마왕의 영혼이 등장하는 48층의 보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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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큰 배경과 설정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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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넘쳐난다. 에인의 연구가 실패하기만 하면 결국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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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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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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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다가올 작별에 대해 이 꼬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분명 나름대로 생각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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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도 이제 내가 진짜 악마가 아니라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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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간략하게 설명한 결과, 차원을 떠도는 용병이나 모험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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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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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내가 떠난 이후를 생각하며 저렇게 혼자 공부하고 있는 걸 테다. 이 회색 꼬맹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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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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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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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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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뺨을 콕콕 찔렀다. 정신의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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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별생각 없이 에인의 말랑한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다가,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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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앞으로는 청색 마탑에서 지내게 될 거야. 그때 그 선생님들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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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큰 선생님이랑 작은 선생님. 마법 많이 가르쳐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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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선생님들이 널 맡아주기로 했어. 아마 입양 형식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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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든 이야기는 끝난 상태였다. 청색 마탑주는 놀라울 정도로 흔쾌히 에인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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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안 했는데 자식부터 생기네.’ 같은 소릴 했다가, 에올피아에게 바로 결혼당할 예정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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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여전히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싶던 순간,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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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멋진 현자님 되면, 진혁악마님도 나 보러 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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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에인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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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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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마지막 채비를 마치고 18층의 미궁 지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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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죽음이 영향을 미친 걸까. 미궁에 있던 호문쿨루스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알아서 소멸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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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보스전은 물론,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활성화된 전이문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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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다시 인사를 하진 않았다. 전날 밤, 이미 충분히 마음을 나눴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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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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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숨을 내쉰다. 걱정도, 아쉬움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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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현자가 되면 보러 와야 해?’라는 말에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약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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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꼬맹이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는데, 나만 계속 미련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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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감정을 가슴 깊숙이 눌러 담고, 전이문에 손을 얹는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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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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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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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빛에 휩싸이고- 다음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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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층의 배경은 몇 번이고 말했던 대로, 18층의 먼 미래다. 재앙이 닥친 후, 마법과 문명이 모두 몰락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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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정보에 따르면, 19층 초입 맵은 그 설정에 맞춰 잿가루가 날리는 황야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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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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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이 특유의 울렁이는 감각이 사라진 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딜 봐도 황야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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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야외조차 아니었다. 바닥은 눈부신 흰 대리석, 고요하고 넓은 실내 공간. 마치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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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커뮤니티 정보와 계층 초입 환경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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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 뚜벅, 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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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공간을 울리는 느긋한 구두 소리. 저 멀리, 한 남자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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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감지를 전개해 살펴본다. 강한 마력, 잘 다듬어진 기세- 그러나 근육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걸음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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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으로 보아,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내가 펼친 광역 감지에 그가 살짝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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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찍 도착하셨으면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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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황한 듯 외치더니, 이내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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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에서 오신 감찰관분 맞으시죠? 이곳의 총책임자인 그레임입니다. 곧바로 안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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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슴팍에는 말한 그대로 ‘그레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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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했다. 19층에 이런 NPC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협회는 또 뭐며, 감찰관은 무슨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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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규 퀘스트가 생기는 건가 싶어 인터페이스를 열어봤지만, 퀘스트창에는 여전히 단 하나의 항목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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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산정이 완료된 에픽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라는, 18층에서 보던 것과 같은 메시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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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왜 제가 감찰관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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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말을 골라 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당장은 이 오해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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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력 사용 허가도 되어 있으시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달고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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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임은 웃으며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내 견장에 새겨져 있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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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레임의 반응을 무시한 채, 무작정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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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웅장한 존재감으로 서 있는 어떤 인물의 거대한 동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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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그레임이 숨을 고르는 사이, 나는 동상 아래 새겨진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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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현자, 에인 그레이 헤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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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로브를 걸치고 서 있는 동상의 인물은, 익숙한 형태의 완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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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회색 마탑의 초대 마탑주…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기억되는 한 사람을 위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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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달한 19층은- 그 꼬마의 이름이, 찬란한 역사의 일부로 새겨져 있는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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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는 회색 현자, 에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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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자주 입었던 로브, 직접 작성했던 노트의 사본, 연구 자료를 정리한 문서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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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 포크를 그렇게 오랫동안 썼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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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전에 사줬던 어린이용 식기 세트같은, 온갖 잡다한 물건들조차 빠짐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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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헤세드 경의 특이한 습관으로 유명했죠. 어릴 적부터 쓰던 식기를 늘 지니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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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임이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해설해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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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기억이, 조금은 낯선 역사가 되어 다시 다가오는 기묘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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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건 그런 사소한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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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가장 깊숙한 곳, 그 끝자락에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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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알아볼 리가 없는 마법진이었다. 세세한 부분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기본 구조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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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노욕이 만들어 내었고, 적색 마탑주가 훔쳐냈으며- 에인이 마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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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 타인의 마력과 회로를 억지로 빼앗아 이식하는 ‘강탈’의 마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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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 경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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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요구하자, 그레임은 한층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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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칭호를 받은 마탑주께서, 작위와 가명인 ‘헤세드’를 부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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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 저장하고, 이를 통해 타인에게 마력 회로를 새겨줄 수 있는- ‘나눔’의 고유 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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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 경은 이 마법으로 마법사와 비마법사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발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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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가 마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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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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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법을……이렇게까지, 이토록 대단한 것으로 바꾸어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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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은 어느새 환한 미소로 번졌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어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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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전에 편지로 말씀드린 지하 던전 몬스터 토벌 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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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쩔쩔매며 말을 잇는 그레임의 이야기를 손짓으로 멈추게 하고, 저 구석진 곳의 마법진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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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설명을 듣지 못한 마법진이면서, 조금 전부터 계속 내 마력과 공명하고 있던 마법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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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헤세드 경께서 말년에 남기신 것입니다만, 아직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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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퀘스트 창이 반응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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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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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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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마력이 흘러넘치는 빛 속에서, 회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마법사의 환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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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회색의 환영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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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왔잖아, 진혁악마님. 어때, 나 완전 멋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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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을 통해 전해진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 나는 살짝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몰라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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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은 곧 사라졌다. 그레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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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눈을 감고, 에인이 나를 위해 남겨준 무언가를 찬찬히 느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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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특성 : ‘천의 마술’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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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유 특성, 우리 꼬맹이는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큰 선물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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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멀리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실내에 울리는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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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단정한 정복을 입은 한 무리가, 익숙한 문장이 새겨진 메달을 들고 들이닥쳤다. 그중 가장 앞선 이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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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감찰관이 나왔는데 여기 총책임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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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임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당혹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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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뒤로는 아직도 미약한 잔광이 남아 있는 마법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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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이제 됐으니까, 저기 진짜 감찰관 양반 상대하러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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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가, 감찰관이 아니셨다고요? 그리고, 방금 그건 분명히… 당신, 대체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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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시선을 돌려 동상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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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인의 조각상이, 어쩐지 이 모든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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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습니다. 아, 그리고 그 지하 던전 몬스터는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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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하 던전이 아마 이번 층의 미궁 지역이겠지, 말을 마친 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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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로 들려오는 소란과 당황한 외침들, 그리고 여전히 벙찐 얼굴의 그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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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녀석 진짜, 크게 될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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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어쩐지 유쾌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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