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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련의 탑 19층
시련의 탑은 NPC의 영혼을 재활용하고 있다.
리소스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엘레노어의 경우처럼, 에인의 혼과 의식도 퀘스트 완료와 함께 상층의 자신-회색 마왕에게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지금 에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결심을 하든 결국 48층의 회색 마왕이 되는 미래만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엘레노어는 영혼이 없는 채 흘러갔던 7층에서 8층까지의 20년을, 돌아보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8층에서 9층까지의 긴 시간도 마찬가지. 영혼도 의식도 희미한 채, 예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내가 저층에서 행한 행동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상층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9층의 NPC들이 7층과 8층에서의 내 행적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 보면, 분명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8층과 9층 모두, 삼대 세력의 전쟁이라는 큰 배경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재앙에 의해 마법이 쇠퇴하고 몰락한 19층의 배경, 회색 마왕의 영혼이 등장하는 48층의 보스전.
엘프 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큰 배경과 설정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가능성은 넘쳐난다. 에인의 연구가 실패하기만 하면 결국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
에인은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다가올 작별에 대해 이 꼬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분명 나름대로 생각은 있을 것이다.
에인도 이제 내가 진짜 악마가 아니라는 걸 안다.
한 번 간략하게 설명한 결과, 차원을 떠도는 용병이나 모험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태.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기에, 내가 떠난 이후를 생각하며 저렇게 혼자 공부하고 있는 걸 테다. 이 회색 꼬맹이는……
“진혁악마님, 졸려?”
“아니, 왜.”
“졸려 보였어.”
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뺨을 콕콕 찔렀다. 정신의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나도 별생각 없이 에인의 말랑한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다가,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너… 앞으로는 청색 마탑에서 지내게 될 거야. 그때 그 선생님들 기억하지?”
“응. 큰 선생님이랑 작은 선생님. 마법 많이 가르쳐줬었어.”
“그래, 그 선생님들이 널 맡아주기로 했어. 아마 입양 형식이 될 것 같아.”
이미 모든 이야기는 끝난 상태였다. 청색 마탑주는 놀라울 정도로 흔쾌히 에인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결혼도 안 했는데 자식부터 생기네.’ 같은 소릴 했다가, 에올피아에게 바로 결혼당할 예정이라나 뭐라나.
에인은 여전히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싶던 순간,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내가 멋진 현자님 되면, 진혁악마님도 나 보러 와야 해?”
다시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에인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나는 마지막 채비를 마치고 18층의 미궁 지역으로 향했다.
재버워크의 죽음이 영향을 미친 걸까. 미궁에 있던 호문쿨루스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알아서 소멸한 상태였다.
덕분에 보스전은 물론,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활성화된 전이문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다시 인사를 하진 않았다. 전날 밤, 이미 충분히 마음을 나눴으니까.
“후우……”
긴 숨을 내쉰다. 걱정도, 아쉬움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멋진 현자가 되면 보러 와야 해?’라는 말에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약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 꼬맹이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는데, 나만 계속 미련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잡한 감정을 가슴 깊숙이 눌러 담고, 전이문에 손을 얹는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예.”
순간,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빛에 휩싸이고- 다음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
19층의 배경은 몇 번이고 말했던 대로, 18층의 먼 미래다. 재앙이 닥친 후, 마법과 문명이 모두 몰락한 세계.
커뮤니티의 정보에 따르면, 19층 초입 맵은 그 설정에 맞춰 잿가루가 날리는 황야라고 했었다.
“응?”
하지만 전이 특유의 울렁이는 감각이 사라진 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딜 봐도 황야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야외조차 아니었다. 바닥은 눈부신 흰 대리석, 고요하고 넓은 실내 공간. 마치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물론, 커뮤니티 정보와 계층 초입 환경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뚜벅, 뚜벅, 뚜벅.
고요한 공간을 울리는 느긋한 구두 소리. 저 멀리, 한 남자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력 감지를 전개해 살펴본다. 강한 마력, 잘 다듬어진 기세- 그러나 근육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걸음걸이.
종합적으로 보아,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내가 펼친 광역 감지에 그가 살짝 움찔했다.
“이런, 일찍 도착하셨으면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당황한 듯 외치더니, 이내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협회에서 오신 감찰관분 맞으시죠? 이곳의 총책임자인 그레임입니다. 곧바로 안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의 가슴팍에는 말한 그대로 ‘그레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19층에 이런 NPC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협회는 또 뭐며, 감찰관은 무슨 소리인가.
혹시 신규 퀘스트가 생기는 건가 싶어 인터페이스를 열어봤지만, 퀘스트창에는 여전히 단 하나의 항목만 떠 있었다.
등급 산정이 완료된 에픽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라는, 18층에서 보던 것과 같은 메시지뿐이다.
“예, 뭐……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왜 제가 감찰관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나는 재빨리 말을 골라 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당장은 이 오해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력 사용 허가도 되어 있으시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달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레임은 웃으며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내 견장에 새겨져 있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장을.
그 순간,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레임의 반응을 무시한 채, 무작정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웅장한 존재감으로 서 있는 어떤 인물의 거대한 동상을.
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그레임이 숨을 고르는 사이, 나는 동상 아래 새겨진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회색의 현자, 에인 그레이 헤세드’
위풍당당하게 로브를 걸치고 서 있는 동상의 인물은, 익숙한 형태의 완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곳은 회색 마탑의 초대 마탑주…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기억되는 한 사람을 위한 기념관.
내가 도달한 19층은- 그 꼬마의 이름이, 찬란한 역사의 일부로 새겨져 있는 미래였다.
**
기념관에는 회색 현자, 에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생전에 자주 입었던 로브, 직접 작성했던 노트의 사본, 연구 자료를 정리한 문서들, 그리고-
“세상에, 이 포크를 그렇게 오랫동안 썼단 말이야?”
-내가 예전에 사줬던 어린이용 식기 세트같은, 온갖 잡다한 물건들조차 빠짐없이 전부.
“예, 헤세드 경의 특이한 습관으로 유명했죠. 어릴 적부터 쓰던 식기를 늘 지니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레임이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해설해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익숙한 기억이, 조금은 낯선 역사가 되어 다시 다가오는 기묘한 감각.
전시된 건 그런 사소한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기념관의 가장 깊숙한 곳, 그 끝자락에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못 알아볼 리가 없는 마법진이었다. 세세한 부분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기본 구조는 그대로다.
재버워크의 노욕이 만들어 내었고, 적색 마탑주가 훔쳐냈으며- 에인이 마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그것.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 타인의 마력과 회로를 억지로 빼앗아 이식하는 ‘강탈’의 마법진.
“헤세드 경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업적입니다.”
설명을 요구하자, 그레임은 한층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회색’의 칭호를 받은 마탑주께서, 작위와 가명인 ‘헤세드’를 부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 저장하고, 이를 통해 타인에게 마력 회로를 새겨줄 수 있는- ‘나눔’의 고유 마도.”
“헤세드 경은 이 마법으로 마법사와 비마법사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발상이었죠.”
“전 인류가 마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가슴 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 마법을……이렇게까지, 이토록 대단한 것으로 바꾸어 내다니.
헛웃음은 어느새 환한 미소로 번졌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어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전에 편지로 말씀드린 지하 던전 몬스터 토벌 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만…”
나는 쩔쩔매며 말을 잇는 그레임의 이야기를 손짓으로 멈추게 하고, 저 구석진 곳의 마법진에 대해 물었다.
유일하게 설명을 듣지 못한 마법진이면서, 조금 전부터 계속 내 마력과 공명하고 있던 마법진이다.
“아, 그건… 헤세드 경께서 말년에 남기신 것입니다만, 아직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그때, 퀘스트 창이 반응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동시에,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
막대한 마력이 흘러넘치는 빛 속에서, 회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마법사의 환영이 나타났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회색의 환영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늦게 왔잖아, 진혁악마님. 어때, 나 완전 멋있지?’
전음을 통해 전해진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 나는 살짝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몰라볼 만큼.
환영은 곧 사라졌다. 그레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에인이 나를 위해 남겨준 무언가를 찬찬히 느껴 보았다.
[고유 특성 : ‘천의 마술’을 획득하셨습니다.]
두 번째 고유 특성, 우리 꼬맹이는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큰 선물을 준 것 같다.
한편, 멀리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실내에 울리는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곧이어 단정한 정복을 입은 한 무리가, 익숙한 문장이 새겨진 메달을 들고 들이닥쳤다. 그중 가장 앞선 이가 소리쳤다.
“어이! 감찰관이 나왔는데 여기 총책임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레임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당혹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뒤로는 아직도 미약한 잔광이 남아 있는 마법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이제 됐으니까, 저기 진짜 감찰관 양반 상대하러 가보시죠.”
“예? 가, 감찰관이 아니셨다고요? 그리고, 방금 그건 분명히… 당신, 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시선을 돌려 동상 쪽을 바라보았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인의 조각상이, 어쩐지 이 모든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습니다. 아, 그리고 그 지하 던전 몬스터는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그 지하 던전이 아마 이번 층의 미궁 지역이겠지, 말을 마친 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들려오는 소란과 당황한 외침들, 그리고 여전히 벙찐 얼굴의 그레임.
“내가 그 녀석 진짜, 크게 될 줄 알았다니까……”
전부 어쩐지 유쾌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