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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악마는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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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색 꼬마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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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여행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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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반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이 연약해 보이는 꼬마가 사실은 무척 튼튼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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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 갔던 상태에서 기력을 깎아먹는 포션을 마시고 살아난 건, 단순한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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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강인한 신체능력을 타고나는 마족의 육신을 갖고 있었기에, 그 험한 경험을 하면서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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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하기 그지없는 온갖 고초를 겪었음에도,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거다. 마족의 몸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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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버워크에게 납치당한 에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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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의 에인 역시, 당장에라도 울 듯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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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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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인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물었다. 에인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흑색 마탑에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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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떴는데 모르는 곳이어서, 마법으로 빠져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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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는 게 흑색 마탑에 도착하는 것보다 빨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결계를 자력으로 빠져나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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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를 휩쓸고 마계를 제패할 ‘회색 마왕’으로서의 자질?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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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다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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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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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피 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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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인은 내가 다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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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재버워크의 마법이 폭발하면서 입은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 내 기준으론 경상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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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여전히 중상 수준이고, 어린아이의 눈엔 훨씬 더 심각하게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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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정도면 침 바르면 낫는다며, 별일이 아니라 말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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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다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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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실수했다. 곧바로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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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상한 할아버지가 데려가서, 그래서, 진혁악마님이 나 구하러 와서, 그래서 다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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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상식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재버워크의 말한 것처럼 자폐적인 기질을 간혹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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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이 꼬마의 머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력이나 학습속도는 오히려 천재적인 수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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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차원이 다른 마나 감응력을 지닌 아이이기에, 재버워크의 힘과 마력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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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곧장 알아챌 수밖에 없었던 거다. 정황상, 내가 다칠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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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괜찮아. 근데 지금 여기가 좀 위험하거든? 그러니까 잠깐만 떨어져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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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인을 천천히 달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도 재버워크가 나를 쫓아 이쪽으로 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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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레온을 꺼내 들고 ‘스승님 불러줄게.’ 라 말하며, 다리에 매달린 에인을 떼어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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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도, 나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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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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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도 내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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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두 마디가, 내 생각과 행동을 순식간에 멈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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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을 통해 수백 배까지 가속되고,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한 사고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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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빠르게 굴러가던 머리가, 어린아이의 몇 마디에 멈춰 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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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두 마디로 나를 붙잡은 에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무엇보다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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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다쳤잖아…진혁악마님도, 엄마처럼 내가 싫어졌어? 그래서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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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이런 식으로 ‘엄마’를 입에 올리는 건 처음이다.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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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아버지가 그랬어, 엄마는 내가 미워서 버린 거래. 그래서 아는 척도 하기 싫었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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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물기가 서려 있다. 회색 눈이 또르르 물방울을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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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 때문에 힘들었대. 내가 옆에 있어서, 그래서, 내가 엄마라고 불러서, 그래서…너무너무 힘들고 아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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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흐느낌 섞인 들숨과 날숨이 뒤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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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나쁜, 악마라서……엄마가 나를 버린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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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에인과 나눈 대화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뇌간을 푹푹 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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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악마로 알고 있는 에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청색 마탑주와 내가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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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나쁘다고, 세상에 ‘진혁악마님’ 같은 악마는 더 없을 거라고, 악마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한다고, 그렇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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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다들 아프고 힘든 거랬어, 나중에 내가, 나쁜 마왕이 돼서…나 때문에 다 죽을 거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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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버워크는 에인에게 정말 모든 것을 들려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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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은 사실 악마가 아니고, 너야말로 마족이고 악마이며, 너는 나중에 회색 마왕이 될 거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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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마왕을 무찌르는 현자의 이야기를 동경하던 아이의 마음에, 재버워크는 비수를 꽂고 난도질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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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도, 나 때문에 다쳤잖아…그럼 내가 싫어진 거잖아, 그러니까…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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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는 에인을 바라보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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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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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자기 탓이라 말하며 흐느끼는 에인의 모습 위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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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꼬마의 마음을 백분 이해한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래저래 닮은 부분이 많은 처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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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왜 나를 그렇게 안쓰러워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빛나는 눈동자에도 이런 모습이 비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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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꼭 중요한 순간마다 말주변이 부족한 나는, 어떤 말이 이 아이를 위로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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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억을 더듬었다. 엘레노어는 나에게 어떻게 해주었던가. 어릴 적의 나에게, 엄마는 어떤 말을 해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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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말도, 화려한 언변도 필요치 않았다.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의 에인에게도, 필요한 건 오직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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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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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스레 에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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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모든 감정을 다 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옹이라는 행위가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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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때우는 건 내 전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만을 반복하며, 에인을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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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며 웅얼거리는 에인의 말에 나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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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이 아이를 중심으로 얽혀 있더라도- 단지 태어났을 뿐인 생명에게 잘못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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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을 낳고 길렀던 적색 마탑주도 그랬다.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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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 자는 따로 있다. 죽고도 또다시 추하게 되살아난 역겨운 마법사, 모든 책임은 그 새끼가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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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재버워크는 이미 제법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항구의 NPC들조차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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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저거 뭐야! 야! 저거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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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알아! 도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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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온다,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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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에게서 흘러넘친 불길한 마력이 바다를 가르고, 항구의 NPC들을 일제히 혼돈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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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에 필적하는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에인이 진정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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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뒤, 에인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내 어깨에서 떼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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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니야? 나, 악마인데, 나쁜 마왕이 된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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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꼬맹아. 그거 말인데, 사실 악마랑 마족은 다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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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중히 골라낸 말을 꺼냈다. 참고로,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마족과 악마는 정말로 엄연히 다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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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마족의 피가 조금 섞였을 뿐이야. 그리고, 마왕이 된다는 건 또 누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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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사교에게 납치당한 에인은 온갖 가혹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울지 않았다. 마족의 몸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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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버워크에게 납치당해 심한 말을 들은 에인은, 이렇듯 내가 보는 앞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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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마족일지라도, 마음은 분명 인간이기에. 제대로 아파하고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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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꼬마가 마왕 같은 게 된다니, 그럴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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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악마는 안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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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인의 지저분해진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작은 몸을 번쩍 안아 어깨 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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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이제 완전히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은 완전히 아비규환. 이보다 더한 난장판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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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숙소에 떨어져 있었던 큼직한 완드를 꺼내, 에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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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왕이라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거야. 딱 봐도 나쁘게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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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봐도 존나게 사악해 보이는 모습을 한 새까만 괴물- 이 에픽 퀘스트의 마지막 보스 몬스터, 재버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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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가까운 계획이지만, 이 꼬맹이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올인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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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무찔러 보자, 우리 꼬마 현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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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보는 앞에서 함께 마왕을 무찌르고, 동경하던 이야기 속의 현자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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