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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리스트 컷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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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부위가 하필 목이긴 하지만, 결코 깊은 상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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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맥같은 큰 혈관이 베인 것도 아니라, 지혈 없이 방치하더라도 과다출혈로 이어지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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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는 [전투 치유] 스킬이 있어서, 이 정도 상처는 가만두기만 해도 금방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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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은,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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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표정으로 포션을 내미는 리즈멜의 손을 쳐냈다. 포션이라면 나도 많다, 애초에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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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도 자기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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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크리스탈 거미때 자가치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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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별로 걱정한 거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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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뻔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휙 돌리는 리즈멜. 나는 상처가 나은 것을 보여주며, 계속 이어서 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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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분만에 다시 시작된 어둠 속에서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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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청각과 촉각을 활용해가며 인형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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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어 번 합을 나누고 나면 꼭 한 번씩 헛손질을 했다. 직감 스킬의 보조가 있는데도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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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제는 계속되는 리즈멜의 참견이었다. 내가 유효타를 허용했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내 상태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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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진짜 크게 다쳤잖아. 잠시 쉬었다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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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다치긴 무슨, 멀쩡하니까 계속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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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그렇게 나는데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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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 쓰는 일에는 도무지 재능이 없다. 직접 구르고 깨지며 배우지 않으면 뭐 하나 제대로 익힐 수 없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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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즈멜은 내가 구르거나 깨진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시험을 멈추고 내 상태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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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 이래서 대체 언제쯤 성장할 수 있을지, 까마득해 짐작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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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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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시야가 제한되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 몰랐다. 상상도 못 해본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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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리자드맨 주술사를 시작으로, 조금씩 마법을 사용하는 적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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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알기로, 흑마법이나 저주 계열 쪽의 마법에는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수단도 수두룩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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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그림자 마법을 다루는 이곳의 다크엘프들만 해도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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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투술과 다른 무기술을 봉인한 상태였다고 해도, 고작 인형 하나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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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는 리즈멜이 말하는 감각의 확장을 꼭 터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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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 그 정도면 처음치고는 엄청나게 잘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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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리즈멜이 대뜸 그렇게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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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건 하루이틀만에 터득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거든. 배움이 빠른 인간족이라도 다를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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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이틀로 안 되면, 보통은 얼마나 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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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수련한다는 기준에서, 첫 단계를 넘기기까지- 길면 10년, 짧으면 반 년. 나도 반 년은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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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단위다. 1층에서 내가 날려 먹은 시간이 반년 정도였고, 3층에서 폐관수련에 들인 시간도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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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짧아도 반년일 경우는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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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집의 유골 안치기간은 보통 처음에는 15년, 그리고 때마다 연장할 수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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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연고자의 경우에는 10년이라고 들었다. 임시 보관 기간이 2년씩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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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졸업자들을 통해 탑 바깥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길드 쪽에 말을 전해두면, 어떻게든 늘릴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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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꼭 몇 년 안에 나가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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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몇 년이 걸려도 나가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생각이다. 내 목표에 시간제한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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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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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쌓아온 노력과 힘을 믿을지언정, 내 의지와 성실함은 결코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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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근본은 결국 엄마의 등골을 빼먹던 앰생 백수 새끼다. 어쩌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했지만, 한 번 관성을 잃으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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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마냥 귀여워하는 다크엘프에게 둘러싸여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분명 나는 다시 멈춰 서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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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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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빠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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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인지 황급히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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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제법 재능도 있고, 인간족은 원래 배움이 빠르지 않으냐며, 넉넉히 일 년이면 꼭 익힐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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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도 일 년쯤 되면 익힐 수 있겠지. 그럴 생각이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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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이 걸린다면, 과격한 방식을 쓰면 한 달 정도면 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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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과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오늘도 엘레노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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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은 조금 빨리 돌아왔구나. 연습이 일찍 끝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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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레노어의 물음에 오늘은 볼 일이 있다고 대충 대답하며, 곧바로 장비를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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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는구나, 제대로 대꾸도 안 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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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태도가 매몰차다며 서운하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딱히 행선지를 묻거나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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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분명히 말리려고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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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7층 전역의 지도를 켜고, 미리 점찍어둔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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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진영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거의 손대지 않았던 필드 보스의 출몰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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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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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다크엘프 진영에서 황혼 거미 토벌을 진행하는 것처럼, 왕국군 진영을 선택할 경우 와야 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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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몰하는 몬스터는 이 지역에 흘러넘치는 저주에 영향받아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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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를 지나다니다 저주에 당한 산적, 왕국 병사, 기사 등이 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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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다, 적이다, 적은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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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라, 우리의 왕국을 수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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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리 쓸어버리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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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없는 눈으로 무기를 빼 들고 접근하는 저주받은 인간들을 앞에 두고, 나는 단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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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층에서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무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위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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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화살을 몸에 찌르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리자드맨에게 무모하게 덤벼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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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신의 생존 본능을 자극해, 폭발적인 성장을 해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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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해야 할 일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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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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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의 단검으로 내 눈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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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그림자 마법이 없어도 이거라면 쉽게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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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으윽,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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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이상으로 고통이 크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게 피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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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더해, 사방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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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제대로 베었으니 포션을 마셔도 바로 회복되진 않겠지. 이걸로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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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느껴보는 압도적인 위기감. 그리고 묘한 흥분에 손끝이 덜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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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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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무딘 무기만 쓰는 그림자 인형이 아니다. 다쳤다고 멈춰줄 리즈멜도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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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아들고, 적의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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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을 낮추고 촉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이번에는 방어구도 모두 해제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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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게임처럼 빤쓰만 입고 나온 건 아니지만, 방어력 면에서는 그것과 큰 차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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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무기는 저주로 인해 더욱 강화된 상태이기에, 더더욱 공격을 허용하면 안 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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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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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바람 소리에 의존해,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냈다. 이미 내 몸에는 깊고 얕은 자상이 네다섯 개는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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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중 치명상은 하나도 없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도, 치명상에 한해서라면 어떻게든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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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으로 추측되는 냄새나는 놈의 도끼 공격을 피해내고, 앞으로 크게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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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는 것은 목, 휘둘러지는 무기의 높이를 추측해 어깨의 위치를 계산하고, 그보다 살짝 위로 검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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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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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찢고 뼈가 있는 부분까지 칼날이 닿는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대로 목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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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베어버린 산적을 걷어차고, 다른 방향에서 덤벼드는 누군가의 창을 회피하고 반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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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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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공격에는 크리티컬이 터졌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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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손맛이다. 치명상을 입힐 때의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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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알려준 오감의 활용법이 머릿속에서 쏙쏙 떠오른다. 뺨에 닿는 흙먼지의 감촉에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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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무거운 망치를 땅에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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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날아온 흙먼지는 그 망치가 휘둘러지며 닿은 것. 그리고 특유의 묵직한 바람 소리, 휘두를 때의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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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타이밍에 검을 들어, 망치를 휘두르고 있을 산적의 손목 위치를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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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무기 휘두르는 소리와 발소리만으로 상황을 어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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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감각이 주변의 상황을 읽어주고 있는데, 고작 그런 것에만 의지하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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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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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적을 베어버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가 한결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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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치유]와 아이템 효과로 눈이 회복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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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회복된 눈앞으로 푸른 인터페이스 메시지가 여럿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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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감각 강화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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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새로운 스킬이 습득되어 있었고, 직감 스킬의 레벨도 조금 올라 있었다. 해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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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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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실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에 더해,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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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 땅의 왕이시여, 사악한 마법사의 제단을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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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병사도 기사도 더 이상 보내지 않으시고, 그저 주변을 봉쇄하라는 명령만 내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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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지키는 망자가 그토록 두려우십니까. 이미 부패해 썩어버린 무사의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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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6층의 좀비를 연상케 하는 검을 든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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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 그 옛날 썩어버린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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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든 자세와 기백 모두 예사롭지 않으나,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눈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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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 과격한 방식으로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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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방식으로는 반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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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한테는 이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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