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305 lines
13 KiB
Markdown
305 lines
13 KiB
Markdown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일 각? 어쩌면 반 시진 정도.
|
||
|
||
황보혜지는 허옇게 질린 낯으로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
||
|
||
‘가지고 놀고 있어….’
|
||
|
||
실력차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옷이 조금 베였을 뿐.
|
||
|
||
그 압도적인 실력차를 방증하듯 흑의인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
||
|
||
“슬슬 끝낼 때가 됐군.”
|
||
|
||
흑의인은 황보혜지를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태평한 걸음걸이로 그녀에게 다가온다.
|
||
|
||
황보혜지는 이를 악물었다.
|
||
|
||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
||
|
||
무력감에 힘이 빠진다. 맥이 탁 풀려 흑의인이 다가오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
흑의인이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
||
|
||
“포기한 거냐? 뭐, 그것도 좋지. 한심한 정파 놈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로군.”
|
||
|
||
황보혜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한심하다. 맞는 말이다. 딱히 부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
|
||
하지만 한심한 정파 놈들이라니? 간악한 사흑련 놈들이 지껄일 말이 아니다.
|
||
|
||
십육명문에는 대단한 사람이 많다. 황보준 외종조부나, 남궁명 소협이라거나, 진기재천 선배님이라거나….
|
||
|
||
황보혜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는 항상 당당하던 남궁 소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 했을 터였다.
|
||
|
||
그러면서도 동시에 입에 담는 것은 금 소저의 입버릇이었다.
|
||
|
||
항상 용감하고 활기찬 소녀. 힘차게 주먹을 내지르며 애써 쾌활하게 외쳤다.
|
||
|
||
“뒤져라…!”
|
||
|
||
흠칫, 흑의인의 몸이 떨렸다.
|
||
|
||
기회다. 황보혜지의 주먹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곧게 뻗어졌다.
|
||
|
||
그 안에 담긴 것은 태산의 굳건함이요, 또 황보혜지가 바라던 정숙함이니.
|
||
|
||
묘하게 어우러진 두 이치가 하나 되어 태산신권(太山神拳)이라는 이름 아래 터져나왔다.
|
||
|
||
쿠우웅──────
|
||
|
||
허공을 후려친 주먹. 황보혜지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
||
|
||
“아….”
|
||
|
||
가볍게 반 발짝 움직여 주먹을 피해낸 흑의인이 웃었다.
|
||
|
||
“훌륭하다.”
|
||
|
||
동시에 그의 손이 쏘아진다. 그의 손에 담긴 번쩍이는 강기가 다가온다. 저 별빛이 닿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두부를 으깨듯 머리가 으스러지겠지.
|
||
|
||
황보혜지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들이 스쳤다.
|
||
|
||
─어머니, 어머니. 그녀의 기억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인은 항상 그녀를 꾸짖었다.
|
||
|
||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더욱 과거로 향했다. 황보혜지, 그녀가 어릴 적. 따스하게 안아주던 어머니의 품.
|
||
|
||
그 시절의 어머니는 말에 가시를 담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보며 웃었다. 웃는 눈이 마주치면 팔을 벌리셨고, 그 품에 안기면 훌쩍 들어올려 작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
||
|
||
“어디서부터….”
|
||
|
||
잘못됐을까. 무엇이 어머니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
||
|
||
휘몰아치는 기억을 되짚던 황보혜지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어머니가 변한 것은 빌어먹을 세가의 구조 자체가 문제다.
|
||
|
||
어머니가 꿈을 접고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외부의 압력이 문제다.
|
||
|
||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
||
|
||
그것을 바꾸어놓겠다. 황보세가의 가장 높은 곳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게 하겠다.
|
||
|
||
그리하여 어머니가 다시 예전처럼 따스한 모습을 되찾도록 하겠다.
|
||
|
||
번쩍-!
|
||
|
||
황보혜지의 눈이 뜨였다.
|
||
|
||
흑의인의 손이 황보혜지의 눈앞에서 멈춰있었다. 데굴-, 눈을 굴린 흑의인이 손을 거두었다 다시 한 번 내질렀다.
|
||
|
||
쉬익-!
|
||
|
||
황보혜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
||
|
||
“감사합니다, 진기재천 선배님.”
|
||
|
||
“…앗.”
|
||
|
||
황보혜지가 깨달음을 정리할 때까지 몇 번이고 눈앞에 슉슉 손을 내지르던 서준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
||
|
||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
||
|
||
여기서 부정하는 편이 나은가? 아니, 그건 너무 추하다. 어차피 들켜도 문제는 없다.
|
||
|
||
결론을 내린 서준이 복면을 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꿔뒀던 얼굴은 재빨리 이서준의 것으로 되돌린 채였다.
|
||
|
||
“이야, 어떻게 알았어?”
|
||
|
||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주실 분은 진기재천 선배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
||
|
||
“뭣.”
|
||
|
||
서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황보혜지는 그런 그를 보며 포권했다.
|
||
|
||
“제 뜻을 알 것 같아요.”
|
||
|
||
“그래?”
|
||
|
||
“예. 제가 황보세가에 혁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
||
|
||
“네?”
|
||
|
||
황보혜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
“어머니가 변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뜻을 꺾을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어요. 그 현실을, 세가를 바꾸어놓는다면 어머니께서도 다시금 예전의 꿈을 이어갈 수 있으시겠죠. 설령 어머니께서 그걸 원치 않으신다 할지라도─ 아니, 그럴 리 없죠. 말로는 그러실지 몰라도 진심이 아닐 거예요. 어머니는 다시 무도(武道)를 걷길 원하실 겁니다. 제가 그 꿈을 이룰 수 있게끔 만들 거예요.”
|
||
|
||
“오…. 뭐, 그래…. 화이팅.”
|
||
|
||
“이럴 때가 아니에요. 혹시 수련을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철환의 개수를 늘려야겠어요.”
|
||
|
||
“어, 응….”
|
||
|
||
예상과는 다르지만, 아무튼 황보혜지가 제 뜻을 세우게 만드는 것은 성공한 것 같았다.
|
||
|
||
황보서린에게도 날벼락이 떨어졌다.
|
||
|
||
‘그 여자는 다 자기 업보지.’
|
||
|
||
황보혜지의 말은 얼핏 황보서린을 위해 가문까지 뒤집어엎겠다는 말 같지만, 잘 들어보면 황보서린이 원하건 말건 다시 무의 길을 걷게 만들겠다는 소리다.
|
||
|
||
황보혜지가 황보서린보다 무력적으로 앞설 테니 어쩌면 약간의 강제력 역시 가해지지 않을까?
|
||
|
||
왠지 황보혜지 밑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황보서린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
||
|
||
황보세가야 뭐…, 알아서 하겠지.
|
||
|
||
서준은 빠르게 책임을 회피했다.
|
||
|
||
*
|
||
|
||
서준은 황보혜지에게 해주려 했던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름 멋진 조언들을 폐기했다.
|
||
|
||
‘너를 믿는 명이를 믿어.’ 라거나, ‘네 뜻이 향하는 곳이 곧 도(道)다.’ 라거나….
|
||
|
||
황보혜지는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전보다 심한 지옥훈련에 돌입했고, 시간이 흘러 용봉지회의 준결승, 그 첫 번째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
- 용호문의 양소홍!
|
||
|
||
중소문파 출신임에도 준결승까지 진출한 양소홍. 그 상대는…
|
||
|
||
- 신검금가의 금희!
|
||
|
||
귀염뽀짝 금춘봉이었다.
|
||
|
||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후기지수가 인사를 나눴다.
|
||
|
||
“잘 부탁드려요.”
|
||
|
||
“한 수 배우겠소.”
|
||
|
||
양소홍은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자마자 돌연 말을 꺼냈다.
|
||
|
||
“금 소저, 나는 그대를 존경했소.”
|
||
|
||
“예?”
|
||
|
||
춘봉이 어리둥절한 눈을 떴다. 양소홍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
||
|
||
양소홍의 출신 문파인 용호문은 호남에 있는 자그마한 문파다.
|
||
|
||
총 인원이 열 명 남짓한 만큼 중소문파라 칭하기도 애매한 문파, 그것이 용호문이다.
|
||
|
||
“금가가 멸문당했음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문파를 재건하려는 그대의 노력에 그 누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소.”
|
||
|
||
“어…. 감사합니다…?”
|
||
|
||
양소홍의 스승인 일평은 절정 초기의 그저 그런 무인이었다.
|
||
|
||
그는 어린 양소홍의 자질을 알아보고 용호문의 제자로 들였으며, 문파의 부흥을 위해 양소홍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
||
|
||
기본적인 창술과 용호문의 무공인 용호지창(龍虎之槍), 강호에 나가 갖춰야 할 예의들과 사람으로서의 인의예지까지.
|
||
|
||
양소홍은 그런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사력을 다해 노력하여 어느샌가 스승의 경지를 뛰어넘었으며, 스스로의 실력으로 말미암아 문하생들을 들여 용호문을 부흥시켰다.
|
||
|
||
“십육명문의 후기지수들은 그 선조들이 깔아놓은, 잘 정돈된 길을 걸으며 성장하오.”
|
||
|
||
“흠….”
|
||
|
||
“허나 그대는 달랐지. 금가가 멸문한 지 몇 년, 그 세월의 공백을 이겨내고 용봉지회의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소.”
|
||
|
||
용호문의 창법인 용호지창은 용과 호랑이의 기상을 담은 창법이다.
|
||
|
||
하지만 이름만 그럴 뿐, 실상은 삼재검법보다 조금 뛰어날 뿐인 그저 그런 무공에 불과했다.
|
||
|
||
양소홍과 그의 스승인 일평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양소홍이 이미 용호지창을 대성한 까닭이다.
|
||
|
||
용호지창에 담긴 뜻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절정 초기 즈음이 끝이다. 양소홍은 스승을 뛰어넘은 그 순간, 용호지창의 한계를 절감했다.
|
||
|
||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공이 필요하다.
|
||
|
||
하지만 용호문은 그런 상승무공을 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 탓에 양소홍과 일평은 용호지창을 뜯어고쳐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
||
|
||
“그대와 같은 천재가 내가 걸을 길을 밝혀주었으면 하고 바랐소.”
|
||
|
||
“으음…?”
|
||
|
||
“내가 이룬 경지는 범인들의 것. 사력을 다해 노력한다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경지에 지나지 않소. 내가 가진 재능의 한계를 그 언제고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소.”
|
||
|
||
양소홍은 새롭게 창안한 용호지창으로 절정 초기를 넘어섰다.
|
||
|
||
최소한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수련으로 가득 채웠다.
|
||
|
||
그런 나날을 보내며 양소홍은 생각했다.
|
||
|
||
그 누구라도 자신처럼 수련한다면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
||
|
||
중소문파 출신의 무인들이 오만하고 게으른 대문파의 무인들에 비해 뒤처지는 것은 그들 역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
||
|
||
“허나 그대는 다르지 않소. 그래서 존경했소. 그대가 중소문파 무인들의 귀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
||
|
||
꽤나 길게 이어진 양소홍의 말에 춘봉은 생각했다.
|
||
|
||
‘이 새끼 뭐라는 거지?’
|
||
|
||
평범한 개소리를 꽤나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
||
|
||
재능 없는 범인? 잔인한 말이지만 그런 사람은 저 나이에 저런 경지에 다다를 수가 없다. 중소문파 출신이라면 더더욱.
|
||
|
||
‘아, 이서준이랑 비교하면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
|
||
|
||
그렇게 따지면 재능이 없는 게 맞다. 이서준이었으면 지금쯤 용호문에 신공이 열 개쯤 있긴 했겠지.
|
||
|
||
하지만 그건 좀 너무 많이 특이한 경우다. 이서준과 비교하면 무인 전부가 범부로 전락하고 만다.
|
||
|
||
한마디로 이서준이 이상한 거지 양소홍이 재능이 없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
||
|
||
그리고 또 하나.
|
||
|
||
춘봉 자신이 왜 중소문파 무인들의 귀감이 된단 말인가? 신검금가는 십육명문보다도 위에 서있는 신가(神家)인데.
|
||
|
||
“어….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
||
|
||
“실망했소.”
|
||
|
||
“아하…?”
|
||
|
||
“나는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라왔소. 죽을 만큼 노력해서. 허나 그대들은? 그게 아니지 않소.”
|
||
|
||
양소홍이 말을 이었다.
|
||
|
||
“그대도 결국 십육명문의 위상에 기대는 한낱 무인에 불과하더군. 스스로 금가를 빛나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진기재천과 남궁세가의 위명에 의존해 가문을 일으키려 하고 있소.”
|
||
|
||
양소홍이 춘봉을 또렷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
||
|
||
“그대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소?”
|
||
|
||
우리 오빠 영약 선물해주려고?
|
||
|
||
춘봉이 머리를 긁적였다.
|
||
|
||
허나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던지 양소홍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
||
|
||
“나는 누구나 나처럼 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싸우고 있소. 중소문파라 한들 대문파에 뒤지지 않는다고, 노력한다면 언제나 십육명문의 이름이 뒤바뀔 수 있다고.”
|
||
|
||
“아, 예….”
|
||
|
||
“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었음에도 그리 하지 않고 사도를 걸었음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오.”
|
||
|
||
양소홍의 말에 대련장이 술렁였다.
|
||
|
||
누군가는 양소홍의 말에 감화되어 뜨거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누군가는 그를 그냥 병신 보듯 바라보았다.
|
||
|
||
서준의 얘기다.
|
||
|
||
‘그냥 트래시 토크겠지?’
|
||
|
||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데.
|
||
|
||
서준이 신기한 눈으로 양소홍을 바라보던 그때, 문득 춘봉이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
||
|
||
“내가 왜 부끄러워 해?”
|
||
|
||
“…아무래도 헛된 대화였나 보군.”
|
||
|
||
“그게 아니지.”
|
||
|
||
춘봉이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
||
|
||
“나는 귀엽잖아.”
|
||
|
||
“……?”
|
||
|
||
양소홍이 멍청한 눈을 떴다. 춘봉이 삐죽 웃었다.
|
||
|
||
“그러니까 나는 그래도 돼. 꼬우면 너도 나만큼 귀엽든가. 그러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의문의 고수가 열심히 도와줄걸?”
|
||
|
||
놀랍게도 실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