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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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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서준의 얼굴을 쭈욱 밀어냈다. 서준은 그런 백설향을 보며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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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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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좀 찐따 같아서 놀리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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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이라는 게 다들 그렇지 않은가? 오히려 백설향 같은 타격감 발군의 인재가 있는데도 놀리지 않는다면 그게 역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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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역천의 왕, 천마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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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지막 일은 뭘 시킬 것이냐 묻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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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기다려라! 사내가 이리 인내심이 없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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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씩씩대며 서준을 삿대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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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인이라는 여인도 팔자가 참 기구하구나! 필시 밤일을 할 때도 인내심이라고는 티끌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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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감당할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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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뭘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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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화제로 몰고 가서 그쪽이 좋을 게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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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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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스스로의 실책을 깨달은 백설향이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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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참 동안 서준을 노려보며 분을 삭히더니,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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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니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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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일인가? 서준은 별말 없이 백설향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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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아예 빙궁을 나서더니, 경공까지 펼치며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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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자 궁금해서라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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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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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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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무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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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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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따로 있느냐? 빙궁이 다스리는 유일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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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궁의 마을에는 특별한 이름조차 없다. 그냥 마을 하면 그 마을이겠거니 하고 다들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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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가 사람 살기에 그닥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보니, 애초에 빙궁 근처의 마을이라고는 한 군데밖에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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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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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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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사흑문치고는 가난해 보인다 싶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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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 가난한 문파의 소궁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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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이거 안타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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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빠른 속도로 이동한 것이 아님에도 마을까지는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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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들어선 서준은 묘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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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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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마을이다. 그럼에도 생활감이 넘쳐 나름 정이 가는 마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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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주민들은 대체로 표정이 밝았다. 활기 넘치는 거리에서는 몇몇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대체로 물고기 따위의 해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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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파 세력권의 마을 하면 떠올리는 인상과는 상당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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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인에 대한 반응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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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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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과 함께 걷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꾸벅꾸벅 허리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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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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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공포에서 나오는 예가 아니다.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간혹 선물 따위를 건네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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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도중 백설향을 발견하고 냉큼 달려와 어포를 건네는 이 사내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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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말린 건데 염장이 잘 됐습니다. 조금 드셔보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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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맙군. 요새 별일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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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마물이 튀어나오긴 했는데 금세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아무런 일도 없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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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그 뒤로도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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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나갔는데 바다 한가운데가 꽁꽁 얼어있어 깜짝 놀랐다는 둥, 요즘 들어 어획량이 늘어 삶이 풍족해졌다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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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던 사내가 떠나가고, 서준은 백설향을 따라 걸으며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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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 좋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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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본 건 아니다. 빙궁의 무인에게 호의적인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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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과 빙궁의 무인은 척 보기만 해도 구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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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색은 둘째치고, 빙궁의 무공은 그 성취를 이루면 머리칼이 희게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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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치가 많은 수준이 아니라 눈밭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가지게 되니 눈에 띄지 않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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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어찌 되었든 주민들이 빙궁의 무인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그만큼 빙궁이 마을을 잘 다스린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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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빙궁의 대표 아니오. 인기가 좋은 건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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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니 백설향이 팩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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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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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괜히 쯧쯧 혀를 차며 한 건물에 들어섰다. 서준 역시 그녀를 뒤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스한 온기와 함께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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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일을 맡기려던 것 아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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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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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몇 번(십수 번쯤 됐다) 목을 가다듬은 뒤 주인장을 불렀다. 좁은 가게인지라 주인장이 주방에서 고개만 내밀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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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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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죽 두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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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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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과 동시에 둘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설향은 사회성이 부족했고, 서준은 백설향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최근 들어 좋아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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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부착형 양심 겸, 사회성 겸, 예절 겸, 제어 장치 겸…, 아무튼 금춘봉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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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조금 더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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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 사명감을 가진 서준이 애써 대화 주제를 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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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냐, 농사가 되긴 되나 보오? 어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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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선대 분들의 노고가 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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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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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화가 끊겼다. 어색해진 분위기. 서준의 눈이 데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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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러면 저쪽에서 이어줘야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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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주변 없는 년놈 둘이서 대화하는 게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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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숨을 내쉰 서준이 의자에 늘어지듯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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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오?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다 외출을 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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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를 싫어하는 것 같길래 배려해준 것뿐이다. 일을 마쳤으면 보상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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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같이 마을에 나오는 것이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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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감사한 줄 알아라. 이곳이야말로 북해 제일의 맛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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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죽 그릇 두 개를 들고 다가오던 주인장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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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별 말씀을. 그래도 빙궁 분들이 자주 들러주시는 곳이긴 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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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놓인 어죽은 과연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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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듬뿍 넣어 커다란 건더기가 가득하고, 뽀얀 국물에서는 고소한 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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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신기한 듯 어죽을 뒤적이자 백설향이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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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없게 뒤적거리지 말고 식기 전에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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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이라 할 말이 없었다. 서준이 어죽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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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맛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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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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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어죽을 호호 불어 식힌 뒤 입에 넣었다. 입을 오물대다 어죽을 꿀꺽 삼킨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아련한 빛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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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맛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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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왔던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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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오진 못했다. 선대 궁주가 몇 번 데려와준 것이 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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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백설향은 조용히 어죽을 먹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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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사연이 있어 보이는 표정에 서준도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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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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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의 인사를 받으며 건물을 나선 백설향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준은 그녀를 뒤따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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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궁주와 제법 관계가 괜찮았던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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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와 같은 사람이었지. 이제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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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괜한 말을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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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의 사과에 백설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서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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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라도 한 모양인데, 딱히 돌아가신 건 아니다. 말하지 않았느냐. 빙궁의 궁주는 후대에게 진기를 물려준 뒤 자유의 몸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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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지. 그러면 가끔 연락을 취하거나 하지는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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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빙궁을 나선 순간부터는 더 이상 빙궁의 사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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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길게 숨을 내뱉은 백설향이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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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잘 살고 있겠지. 그럴 만한 능력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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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백설향은 전대 궁주와의 추억이 담긴 장소들에 서준을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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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백설향이 그 장소들 외에 아는 곳이 없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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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서준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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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밖에도 좀 돌아다니고 하시오. 빙궁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정신 건강에 하등 좋을 게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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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나는 화경의 무인이다. 정신 건강 따위에 연연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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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참, 주화입마에 들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설득력이 넘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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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내게 경의를 보이라 하지 않았느냐! 나는 빙궁의 궁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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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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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실실 웃으며 걸음을 옮기자 백설향이 씩씩대며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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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이 되어 빙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빙궁 심처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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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백설향이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는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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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서준이 본 바에 의하면 하루 24시간 중 23시간 30분 정도를 방에 틀어박혀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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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무(武)뿐만이 아닌 은둔형 외톨이의 경지에 있어서도 경지에 다다른, 그야말로 일류의 집순이라 할 수 있었다(절정의 경지까지는 아닌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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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짜증난다는 듯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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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맡길 세 번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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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생각보다 빠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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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루 종일 들들 볶지 않았느냐! 하여간 인내심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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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툴툴대며 바닥을 발로 크게 내리쳤다. 쿠웅-! 묘한 진동과 함께 옥좌 뒤편의 벽면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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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의 눈썹이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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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진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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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열리는 문인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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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대부분이 물리적으로 이루어진 기계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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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 백설향이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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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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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따라 들어선 벽 너머의 공간은 기다란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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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하나 없어 어두컴컴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두 사람은 화경. 어둠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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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아가는 백설향은 익숙한 듯 능수능란하게 온갖 장치들을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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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떻게 봐도 대단한 기밀이 숨겨져있을 것 같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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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데려와도 되는 곳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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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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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오늘 하루에만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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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궁에서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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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진 통로는 본궁 바깥까지 이어진 듯했다. 화경의 예민한 감각이 파악하길 얕은 내리막길이 이어져 어느덧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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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너머로 흘끗 묘한 시선을 보낸 백설향이 거대한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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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기운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재질이 평범하지 않은 듯한데, 백설향이 그것을 가볍게 밀자 기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문이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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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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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자마자 예상을 한참 벗어난 수준의 냉기가 피부를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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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문 너머의 공간, 그 중심에 놓여있는 주먹만 한 구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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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빙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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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기운이다. 어지간한 초절정쯤 되는 무인이라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얼어붙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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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 것 없다. 지금의 빙정은 그 냉기가 많이 약해진 상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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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약해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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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빙정은 주기적으로 그 냉기를 보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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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혀를 차며 빙정을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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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 년에서 오 년을 주기로 냉기를 보충하는데, 그 기한이 조금 지나버린 탓에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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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이 지났다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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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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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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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녀 사태 때 빙정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서준이 묻자 백설향이 당당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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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이 나질 않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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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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