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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전 9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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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서예린, 최이서 그리고 나는 멍하니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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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최이서만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고 나랑 서예린은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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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번 보스 깨려면 이거 키우는 게 맞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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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원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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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핸드폰 속 게임 캐릭터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서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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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벤트로 많이 뿌렸잖아. 누구 따로 키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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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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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풍만하다 못해 얼굴보다 큰 여자 캐릭터. 학생이라는데 이게 어떻게 학생일 수 있겠냐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야릇함이 넘치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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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캐를 키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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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제일 취향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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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나는 서예린 같은 성능충이 아니라서 게임 캐릭터는 그냥 예쁜 애로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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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뭔가 불만이었는지 서예린은 괜히 심통 부리듯 핸드폰을 툭툭 두들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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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응! 선생님! 어딜 만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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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서 기묘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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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깜짝 놀라서 다급하게 소리를 줄였는데 주변에서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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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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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다는 눈으로 흘겨보는 최이서.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변명해 봤으나 서예린은 어느새 노트에 뭔가를 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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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 속도가 아주 뛰어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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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시선이 다시 칠판으로 집중되자 다시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훈수를 두기 시작한 서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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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키우지 말고, 다른 애들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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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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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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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이 지랄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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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나는 강의시간에 선생님 나오는 야동 보는 미친 새끼가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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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말로 옮기니까 진짜 미친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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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강의 시간에 선생님 관련 야동을 봤다는 게 역겨움 수치가 몇 배는 뻥튀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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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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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해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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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우리 애들이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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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안 부끄러워서 모른 척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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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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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 진짜 꿀밤 개 마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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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 척하면서 다시 필기하는 서예린을 보면서 나도 핸드폰을 집어넣고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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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기말고사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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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들어오면 놀고먹고 한다고 들었는데 왜인지 시험이 지나면 시험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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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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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툭 치며 들어오는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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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필기한 걸 내게 내민 서예린. 보니까 공부한 게 아니라 그냥 쪽지 돌리듯 잡담을 적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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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캐릭터가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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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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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아서 그냥 대꾸하자 최이서가 이쪽을 힐끔 쳐다본다. 갑자기 혼자 뭔 소리 하나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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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모른 척하며 서예린은 냉큼 노트를 가져가서 또 뭔가 끄적거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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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프레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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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진짜 성행위에 대한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지? 장르의 다양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시는 장르평등의 달인 섹x좌에게 나는 답변을 달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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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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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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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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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하는지 굳이 말하면 상처 받지 않을까 싶었는데 주먹으로 내 허벅지를 한 대 때리는 걸 보면 말 안 해도 이유를 아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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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얼굴보다 가슴이 큰 캐릭터인데 저걸 뽕 없이 어떻게 따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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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하거나 외국인 정도는 돼야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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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공부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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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놀고 있는 걸 보고 못 참은 최이서가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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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출석 잘 해둬서 시험은 평타만 치면 F는 받지 않을 테니 문제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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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급하면 네가 도와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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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 이서는 같은 과 동료들을 버리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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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상대평가라 안 도와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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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거리면서 저렇게 말해도 도와줄 거 알아서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는데, 서예린도 나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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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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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저으며 다시 강의에 집중하는 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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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최이서를 위해서 나와 서예린은 점심 메뉴를 고민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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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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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오늘은 샤브샤브 같은 야채 많은 곳 가는 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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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머리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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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가슴살 스테이크 파는 곳도 있었잖아. 거기 맛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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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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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아예 김밥은? 키토 김밥이라고 다이어트용으로 파는 곳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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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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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국밥 뚝배기로 머리 깨버리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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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메뉴만 4개를 말했는데 이런 취급은 너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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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최이서 이제 다이어트 안 해. 쟤 아무거나 먹는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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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가 필요 없는 몸이긴 했지만 이제 진짜 다이어트 안 하는 중인 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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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름대로 반박하실 말이 있으신지 나를 노려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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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가 먹고 싶은 거 같이 먹어주다가 그런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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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또 먹다보면 잘 먹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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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에는 진짜 운동해서 바프 찍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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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프로필에 왜 그렇게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본인이 하고 싶다면 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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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점심에는 김밥 먹고! 저녁에는 국밥 먹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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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국으로서 차선책을 내놓은 서예린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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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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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곧장 쏟아지는 두 사람의 시선. 어제 여자 기숙사에 갔던 것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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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누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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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5시에 강의도 있으면서 저녁 약속을 잡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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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때문에 오늘 자체휴강할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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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 공강은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오늘 같은 날은 준비가 필요했기에 그냥 안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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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누구랑? 나도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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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길 정도로 나에게 달라붙어 오는 서예린.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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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선배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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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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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서예린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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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선배랑 술 마시기로 했었는데 그 약속이 진짜로 잡히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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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을 물리치자 옆에 있던 최이서가 슬그머니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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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뭐 먹는데? 괜찮으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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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호도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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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편집은 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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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말 돌리면서 안 오겠다는 걸 알려오는 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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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최이서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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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많이 해둬서 괜찮아. 생각보다 진도가 금방금방 나가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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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으면서 이미 구도를 짜뒀기 때문에 편집 자체도 훨씬 빠르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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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자막 넣는 게 제일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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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모임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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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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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들 모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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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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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모임을 주최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찬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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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알바가 없다면서 술 좀 마실 수 있겠냐고 나를 불렀는데 어제 유아린이랑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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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찬우가 뜬금없게도 표진호를 부른다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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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얘가 뭔가 작정했구나 싶으면서도 혹시라도 싸움나면 말릴 수 있도록 한강과 안현호까지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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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지난번부터 나한테 따로 술 좀 마시자고 했으니까 그냥 한 번에 처리하자는 이기적인 마음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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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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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네들의 미친 라인업이 완성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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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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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우가 부른 삼겹살집으로 가는 와중 핸드폰이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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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대나무숲 관리를 한 번 했기 때문에 또 대나무숲 관련이면 좀 짜증날 것 같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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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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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고민했지만 일단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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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노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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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님 어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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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받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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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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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야. 심심한데 PC방 가서 편집이나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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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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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면 내가 너희 집으로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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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약속 있어서 밖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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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랑 예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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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두 사람 이름이 먼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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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찬우랑 마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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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과 최이서를 물리친 것처럼 이번에는 찬우 이름을 언급했는데 유아린의 반응이 신통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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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딘데?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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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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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찬우가 유아린 관련해서 얘기 할 줄 알았는데. 어제 혹시 사귀기로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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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아린에게는 나생문이 하나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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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진호도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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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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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농담이면 좋겠다. 찬우가 불렀대. 혹시 찬우가 소주병으로 뚝배기 깰 수도 있으니까 사람도 모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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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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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여러 복잡한 심정이 느껴지는 한숨. 유아린이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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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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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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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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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분 있다가 장문의 톡이 왔는데 표진호에게 전달해 달라며 욕이 한 바가지로 적혀 있었기에 그냥 못 본 척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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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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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빨리 걷거나 달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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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기도 했고 그렇게 급한 모임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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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삼겹살집에 도착한 순간, 내 생각이 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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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말고는 전부 다 도착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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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테이블이 빙 둘러 앉아서 서로 말없이 고기를 굽거나, 팔짱을 끼고 있거나,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남정네들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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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숨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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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어벤져스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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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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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몸을 돌려서 삼겹살집을 나가려던 나를 본 찬우가 바로 손을 흔들며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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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아!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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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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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찬우에게 붙잡혀서 앉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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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을 왜 불렀냐며 나를 노려보는 한강과 안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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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번 유아린에게 그냥 개처럼 두들겨 맞은 표진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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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불편해하는 와중 나는 어색하게 한강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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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언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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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으로 미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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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바로 가라고 했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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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휴학까지 벌써 때리지 않았는가. 이럴 거면 조별과제 왜 빤스런 했나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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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몰래 미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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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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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데 혹시 나 며칠만 너희 집에 좀 재워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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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인생 레전드세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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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거의 욜로족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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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편집 안 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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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옆에서 핸드폰만 쳐다보던 안현호가 슬쩍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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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많이 했어. 이것만 오늘 세 번째 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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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편집 머신도 아니고 슬슬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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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호와 한강은 서로 친하니까 나름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해서 나는 가장 동 떨어진 사람에게 말을 걸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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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형님, 지난번에 인사 드렸던 김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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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진호에게 인사를 건네자 어색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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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는 산만한데 아직 그날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여리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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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말을 걸어놓고 할 말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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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이 전해달라고 톡 보냈는데 보여드릴까요? 제 입으로 하긴 좀 힘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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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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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되는대로 말했는데 바로 거절하셨다. 뭔가 더 상처를 준 기분이라 꿉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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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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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술을 시킨 찬우는 잔을 돌리면서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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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아 자리 좀 바꿔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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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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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찬우는 웃으며 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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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병 있으면 진호 선배 대가리 깰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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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옆자리에 앉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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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전에 이미 술 몇 잔 걸쳤는지 얼굴이 붉은 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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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자리를 바꿔주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술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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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나 합시다…… 여자한테 차여도 인생 끝나는 거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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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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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르겠지만 바로 욕이 들어와서 그냥 술잔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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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기에. 다시 잔을 내밀며 구호를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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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패배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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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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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디선가 들려온 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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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찾듯 한 번 쭉 훑어봤으나 다들 입을 다물고 본인은 아닌 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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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그럼 똑바로 하든가 미친 여미새 새끼들아. 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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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는 게 고까운 나의 급발진을 시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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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네들끼리 숨 막히도록 어색한 술자리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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