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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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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전 9시 강의.

언제나 그렇듯 서예린, 최이서 그리고 나는 멍하니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최이서만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고 나랑 서예린은 좀 달랐다.

“그러니까 이번 보스 깨려면 이거 키우는 게 맞다니까?”

“나 자원이 없어.”

내 핸드폰 속 게임 캐릭터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서예린.

“이번에 이벤트로 많이 뿌렸잖아. 누구 따로 키웠어?”

“얘.”

가슴이 풍만하다 못해 얼굴보다 큰 여자 캐릭터. 학생이라는데 이게 어떻게 학생일 수 있겠냐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야릇함이 넘치는 아이였다.

“……똥캐를 키웠네.”

“얘가 제일 취향이었어.”

미안한데 나는 서예린 같은 성능충이 아니라서 게임 캐릭터는 그냥 예쁜 애로 키운다.

내 말에 뭔가 불만이었는지 서예린은 괜히 심통 부리듯 핸드폰을 툭툭 두들겼고.

  • 흐응! 선생님! 어딜 만지세요!

핸드폰에서 기묘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순간 깜짝 놀라서 다급하게 소리를 줄였는데 주변에서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너희 뭐해.”

한심하다는 눈으로 흘겨보는 최이서.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변명해 봤으나 서예린은 어느새 노트에 뭔가를 필기 중.

손절 속도가 아주 뛰어나시다.

주변 시선이 다시 칠판으로 집중되자 다시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훈수를 두기 시작한 서예린.

“얘는 키우지 말고, 다른 애들 키워.”

“……할 말 없냐?”

“웅?”

웅? 이 지랄하고 있네.

“덕분에 나는 강의시간에 선생님 나오는 야동 보는 미친 새끼가 됐는데?”

와, 말로 옮기니까 진짜 미친놈 아닌가.

심지어 강의 시간에 선생님 관련 야동을 봤다는 게 역겨움 수치가 몇 배는 뻥튀기 된다.

“야동 아니잖아.”

“그렇게 오해할 거 아니야.”

“너 우리 애들이 부끄러워?”

“넌 안 부끄러워서 모른 척했냐?”

“……공부하자.”

서예린 진짜 꿀밤 개 마렵네.

모른 척하면서 다시 필기하는 서예린을 보면서 나도 핸드폰을 집어넣고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중간고사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기말고사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말이다.

대학 들어오면 놀고먹고 한다고 들었는데 왜인지 시험이 지나면 시험인 기분이 들었다.

스윽.

팔을 툭 치며 들어오는 노트.

자신이 필기한 걸 내게 내민 서예린. 보니까 공부한 게 아니라 그냥 쪽지 돌리듯 잡담을 적은 거였다.

  • 그 캐릭터가 제일 좋아?

“어.”

귀찮아서 그냥 대꾸하자 최이서가 이쪽을 힐끔 쳐다본다. 갑자기 혼자 뭔 소리 하나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건 모른 척하며 서예린은 냉큼 노트를 가져가서 또 뭔가 끄적거리더니.

  • 코스프레 해줄까?

얘는 진짜 성행위에 대한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지? 장르의 다양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시는 장르평등의 달인 섹x좌에게 나는 답변을 달아준다.

  • 왜에

  • 넌 못함

왜 못하는지 굳이 말하면 상처 받지 않을까 싶었는데 주먹으로 내 허벅지를 한 대 때리는 걸 보면 말 안 해도 이유를 아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얼굴보다 가슴이 큰 캐릭터인데 저걸 뽕 없이 어떻게 따라하겠는가.

수술하거나 외국인 정도는 돼야하는 게 아닐까 싶다.

“너희 공부 안 해?”

결국 우리가 놀고 있는 걸 보고 못 참은 최이서가 한마디 했다.

어차피 출석 잘 해둬서 시험은 평타만 치면 F는 받지 않을 테니 문제없는데.

“정말 급하면 네가 도와주지 않을까?”

“과대 이서는 같은 과 동료들을 버리지 않잖아.”

“미안한데 상대평가라 안 도와줄 거야.”

툴툴거리면서 저렇게 말해도 도와줄 거 알아서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는데, 서예린도 나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강의에 집중하는 최이서.

그런 최이서를 위해서 나와 서예린은 점심 메뉴를 고민해주기로 했다.

“순대국밥.”

“이서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오늘은 샤브샤브 같은 야채 많은 곳 가는 거 어때?”

“소머리국밥.”

“닭가슴살 스테이크 파는 곳도 있었잖아. 거기 맛있던데.”

“돼지국밥.”

“아니면 아예 김밥은? 키토 김밥이라고 다이어트용으로 파는 곳 있던데.”

“콩나물국밥.”

“……진짜 국밥 뚝배기로 머리 깨버리고 싶네.”

나름대로 메뉴만 4개를 말했는데 이런 취급은 너무하지 않은가.

“애초에 최이서 이제 다이어트 안 해. 쟤 아무거나 먹는 중임.”

다이어트가 필요 없는 몸이긴 했지만 이제 진짜 다이어트 안 하는 중인 최이서.

하지만 나름대로 반박하실 말이 있으신지 나를 노려보고 계신다.

“그건 네가 먹고 싶은 거 같이 먹어주다가 그런 거잖아.”

“그러면서 또 먹다보면 잘 먹잖아.”

“……겨울방학에는 진짜 운동해서 바프 찍을 거야.”

바디프로필에 왜 그렇게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본인이 하고 싶다면 하는 거겠지.

“그럼 점심에는 김밥 먹고! 저녁에는 국밥 먹자! 어때?”

중립국으로서 차선책을 내놓은 서예린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내 말에 곧장 쏟아지는 두 사람의 시선. 어제 여자 기숙사에 갔던 것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다.

“어디서? 누구랑?”

“너 5시에 강의도 있으면서 저녁 약속을 잡았어?”

“그것 때문에 오늘 자체휴강할 거임.”

5시간 공강은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오늘 같은 날은 준비가 필요했기에 그냥 안 가기로 했다.

“어디서? 누구랑? 나도 갈래.”

끈질길 정도로 나에게 달라붙어 오는 서예린.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

“한강 선배 오는데?”

“잘 다녀와.”

바로 서예린을 물리쳤다.

한강 선배랑 술 마시기로 했었는데 그 약속이 진짜로 잡히게 될 줄은 몰랐다.

서예린을 물리치자 옆에 있던 최이서가 슬그머니 끼어든다.

“어디서 뭐 먹는데? 괜찮으면 나도…….”

“안현호도 오는데?”

“……너 편집은 안 해도 돼?”

바로 말 돌리면서 안 오겠다는 걸 알려오는 최이서.

이렇게 최이서도 물리쳤다.

“어제 많이 해둬서 괜찮아. 생각보다 진도가 금방금방 나가고 있거든.”

내가 찍으면서 이미 구도를 짜뒀기 때문에 편집 자체도 훨씬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막 넣는 게 제일 귀찮다.

“남자들의 모임이라는 거지.”

덧붙이자면.

패배자들 모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놀랍게도 이 모임을 주최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찬우였다.

오늘은 알바가 없다면서 술 좀 마실 수 있겠냐고 나를 불렀는데 어제 유아린이랑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구나 싶었다.

그런데 찬우가 뜬금없게도 표진호를 부른다는 게 아닌가.

나는 얘가 뭔가 작정했구나 싶으면서도 혹시라도 싸움나면 말릴 수 있도록 한강과 안현호까지 소환했다.

둘은 지난번부터 나한테 따로 술 좀 마시자고 했으니까 그냥 한 번에 처리하자는 이기적인 마음도 있었는데.

졸지에.

남정네들의 미친 라인업이 완성된 것.

우웅!

찬우가 부른 삼겹살집으로 가는 와중 핸드폰이 울려왔다.

방금 전에 대나무숲 관리를 한 번 했기 때문에 또 대나무숲 관련이면 좀 짜증날 것 같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 유아린 -

살짝 고민했지만 일단 전화를 받는다.

“그래, 노예야.”

  • ……주인님 어디세요?

이걸 받아줘?

“받아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 어디야. 심심한데 PC방 가서 편집이나 같이 하자.

“흠.”

  • 아니면 내가 너희 집으로 가고.

“나 약속 있어서 밖이야.”

  • ……이서랑 예린이?

왜 두 사람 이름이 먼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부정했다.

“아니, 찬우랑 마시는데.”

서예린과 최이서를 물리친 것처럼 이번에는 찬우 이름을 언급했는데 유아린의 반응이 신통찮다.

  • 어딘데? 같이 가.

‘뭐지.

분명 찬우가 유아린 관련해서 얘기 할 줄 알았는데. 어제 혹시 사귀기로 했나?

하지만 유아린에게는 나생문이 하나 더 있다.

“표진호도 오는데?”

  • ……농담이지?

“나도 농담이면 좋겠다. 찬우가 불렀대. 혹시 찬우가 소주병으로 뚝배기 깰 수도 있으니까 사람도 모았음.”

  • 하아.

뭔가 여러 복잡한 심정이 느껴지는 한숨. 유아린이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뚝.

그냥 끊어버렸다.

“이년이?”

그리고 몇 분 있다가 장문의 톡이 왔는데 표진호에게 전달해 달라며 욕이 한 바가지로 적혀 있었기에 그냥 못 본 척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조금 늦었나?

유아린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빨리 걷거나 달리지 않는다.

귀찮기도 했고 그렇게 급한 모임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삼겹살집에 도착한 순간, 내 생각이 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말고는 전부 다 도착한 테이블.

둥근 테이블이 빙 둘러 앉아서 서로 말없이 고기를 굽거나, 팔짱을 끼고 있거나,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남정네들을 보며.

“어우, 숨 막혀.”

이건 무슨 어벤져스도 아니고.

‘그냥 집에 갈까.

진심으로 몸을 돌려서 삼겹살집을 나가려던 나를 본 찬우가 바로 손을 흔들며 불렀다.

“우진아! 여기!”

“……걸렸네.”

결국 찬우에게 붙잡혀서 앉은 자리.

자신들을 왜 불렀냐며 나를 노려보는 한강과 안현호.

그리고 지난번 유아린에게 그냥 개처럼 두들겨 맞은 표진호까지.

서로 불편해하는 와중 나는 어색하게 한강에게 물었다.

“군대 언제 가세요?”

“내년으로 미뤘어.”

“엥? 바로 가라고 했다면서요.”

그래서 휴학까지 벌써 때리지 않았는가. 이럴 거면 조별과제 왜 빤스런 했나 싶었는데.

“부모님 몰래 미뤘어.”

“…….”

“그래서 그런데 혹시 나 며칠만 너희 집에 좀 재워줄 수 있을까?”

“니 인생 레전드세요 진짜.”

이건 거의 욜로족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너는 편집 안 해도 괜찮아?”

한강 옆에서 핸드폰만 쳐다보던 안현호가 슬쩍 물어왔다.

“어제 많이 했어. 이것만 오늘 세 번째 말하네.”

내가 무슨 편집 머신도 아니고 슬슬 지겹다.

안현호와 한강은 서로 친하니까 나름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해서 나는 가장 동 떨어진 사람에게 말을 걸어줬다.

“안녕하세요 형님, 지난번에 인사 드렸던 김우진입니다.”

표진호에게 인사를 건네자 어색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는 산만한데 아직 그날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여리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막상 말을 걸어놓고 할 말이 없어서.

“……유아린이 전해달라고 톡 보냈는데 보여드릴까요? 제 입으로 하긴 좀 힘들어서.”

“아니…….”

일단 되는대로 말했는데 바로 거절하셨다. 뭔가 더 상처를 준 기분이라 꿉꿉하다.

마지막으로 찬우.

어느새 술을 시킨 찬우는 잔을 돌리면서 내게 말했다.

“우진아 자리 좀 바꿔줄 수 있어?”

“……왜?”

내 물음에 찬우는 웃으며 답해왔다.

“빈병 있으면 진호 선배 대가리 깰 것 같아서.”

그럼 왜 옆자리에 앉은 거야.

오기 전에 이미 술 몇 잔 걸쳤는지 얼굴이 붉은 찬우.

나는 바로 자리를 바꿔주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술잔을 내밀었다.

“건배나 합시다…… 여자한테 차여도 인생 끝나는 거 아니더라.”

“시발놈아.”

누군지 모르겠지만 바로 욕이 들어와서 그냥 술잔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기에. 다시 잔을 내밀며 구호를 말해본다.

“우린 패배자가 아니다.”

“개새끼가.”

또 어디선가 들려온 욕설.

마피아 찾듯 한 번 쭉 훑어봤으나 다들 입을 다물고 본인은 아닌 척하고 있다.

“시발, 그럼 똑바로 하든가 미친 여미새 새끼들아. 짠 해.”

욕 먹는 게 고까운 나의 급발진을 시작으로.

남정네들끼리 숨 막히도록 어색한 술자리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