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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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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진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안현호의 지인 중에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었다.

사실 진호라는 이름은 꽤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타이밍이 공교롭다.

정찬우에게 표진호가 왔다는 걸 들었고, 유아린도 그에게 전화를 받았었다. 자연스럽게 그쪽 방향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음식 이제 나왔는데?”

주꾸미를 꽤나 좋아하시는지 열심히 드시고 계신 주희 선배를 두고 그대로 화장실로 향했다.

유아린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으나 딱히 건덕지가 없었기에 잡지 못한 채로 그냥 자리에 있을 뿐이다.

화장실로 가는 척하면서 슬쩍 방향을 틀어서 안현호 쪽으로 갔다.

가게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통화를 받고 있는 안현호는 뭔가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 일방적으로 말을 듣고 있었다.

“네, 네 형.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꽤나 집중했는지 내가 가까이 온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안현호. 멀뚱히 뒤에 선 채로 안현호를 빤히 쳐다보며 당당하게 도청한다.

“하아, 형. 제가 부과대긴 해도 저희 과 애들을 다 알지는 못해요.”

그렇진 않을 텐데.

“유……네? 누구요? 유아린이요? 형, 저 들어본 적도 없는 애라니까요.”

으음?

방금까지 맞은편에 앉아서 태권도 얘기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묵묵히 기다린다.

“네에, 형. 나중에 술 한 잔 해요. 네네. 알겠어요. 한번 확인해 볼게요.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유린기? 아…… 유아린.”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는데 그것 때문에 내 존재를 알아차린 안현호가 깜짝 놀라 몸을 튼다.

“아, 아뇨. 형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에! 유아린! 꼭 찾아볼게요!”

통화를 끊은 안현호는 손에 낀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나를 향해 버럭 외친다.

“야, 뭔데. 왜 남의 통화 맘대로 듣고 있냐.”

“유린기는 센스 좋았어.”

나중에 가서 놀려야지.

“아니, 뭐냐고. 왜 남의 통화 함부로 듣냐고.”

정색하며 따지고 드는 안현호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답했다.

“표진호 맞지?”

“……뭐야, 너도 진호 형 알아?”

“아니, 오늘 처음 듣는 이름이야.”

“음? 설명이 뭐 그래.”

안현호 입장에서는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고, 당장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였다.

“왜 유아린 숨겨 주냐?”

“…….”

“바로 앞자리에서 같이 밥 먹고 있잖아.”

안현호가 유아린을 숨겨준 이유가 궁금했다. 따로 유아린한테 어떤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나를 쳐다보던 안현호는 머리가 복잡한지 담배를 입에 문다. 거의 다 타들어가서 한 모금 빨고 버릴 수밖에 없었기에 시간벌이도 안 됐지만 말이다.

“표진호 선배, 질이 엄청 안 좋은 사람이야.”

그래 보이더라.

얼굴 본 적도 없는데 사람한테 비호감 된 적은 처음이야.

“나도 건너건너 몇 번 본 적이 전부이긴 한데…… 워낙 안 좋은 소문이 많아서 그냥 엮이지 않는 게 좋아.”

“……너는 그런 거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일진 놀이를 못 벗어난 대학생이지 않은가 싶었다고 꿍얼거리자 안현호가 미간을 팍 찌푸린다.

“대학생이잖아. 고3 때 공부 진짜 뒤지게 해서 여기도 겨우 붙었는데 옛날처럼 살 수는 없지.”

“오.”

하긴.

생각해 보니까 안현호는 최이서 관련해서 나한테 질투를 했을 때 말고는 크게 모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없던 것 같기도 했다.

질투하는 모습이 워낙 강렬 했어서 그랬지.

민지를 도와서 나를 저격하던 익명287도 사실 안현호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려던 최이서였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최이서가 얘 이미지를 망친 거 아닌가?

뭐, 그만큼 최이서는 안현호가 달라붙는 게 싫었다는 소리이기도 했겠지.

“솔직히 좀 다르게 보이네. 나는 아직도 네가 고딩 때처럼 놀고 있는 줄 알았거든.”

“…….”

최근까지는 그랬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지 입을 꾹 다문다.

“한강 선배도 그렇고, 주희 선배도 그렇고. 우리 주변에는 보고 배울 선배들이 많잖아?”

“주희 선배는 그렇긴 해도 한강 선배가?”

“나름대로 배울 점이 많은 선배야.”

여자 꼬시는 거 말하는 건가?

한강이 후배들한테 이미지 메이킹을 얼마나 잘해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러니까 뭐 억지를 부려도 다들 오냐오냐하면서 따라줬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표진호 선배랑 유아린이 따로 얽힐 일은 없겠지. 아무리 선배라도 찾을 수 있겠어?”

그리 말하면서 돌아가자고 말하는 안현호. 확실히 지금 안 가면 유아린이랑 주희 선배가 음식을 거의 다 먹었을 수도 있겠다.

나름대로 안현호에 대한 이미지가 좀 바뀌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데 너 이서랑 사귀는 건 아니지?”

슬쩍 걸음을 멈추고 물어오는 안현호. 왜 안 묻나 했으며 대답하기 민망한 질문이기도 했다.

“사…… 귀는 건 아닐걸?”

“그게 무슨 대답이냐.”

“서로 알아가는? 알음알음 그냥 얘기하는?”

“이서가 내년부터 사귄다고 했잖아. 그리고 넌 한 번 차였다며.”

아, 맞네.

안현호 떼어내겠다고 그런 거짓말도 했었지.

“원래 한 번 차이는 것도 전략임. 그런 식으로 상대방이 나 의식하게 만드는 거야.”

“오…… 한강 선배한테는 배울 수 없었던 전략이네.”

“시발놈아. 그 새끼는 차인 적이 없는 거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 처먹으라고 할 놈이네.”

서예린한테 차이긴 했지만 사실상 TKO라서 뭐 비빌 게 있었겠는가.

“후우, 미안한데 나는 이서 포기 안 한다. 같이 과대 부과대 하면서 딱 느껴져. 얘는 처음에는 차가운데 친해지거나 사귀기 시작하면 엄청 잘 해줄 거라는 거.”

……잘해 줄 것 같긴 해.

“그리고 자기 관리가 잘 되잖아.”

“…….”

“은근 운동복을 자주 입어서 모를 수 있는데 이서가 꽤나 볼륨감 있거든?”

“…….”

“게다가 운동하는 애들이 또 떡감이 기가 막힌……!”

“시발! 너 같은 놈한테는 최이서 안 준다 이 새끼야!”

“……네가 뭔데 주고 말고야. 남자들끼리 이런 얘기 좀 주고받을 수 있지 뭐.”

무슨 무용담이라도 펼치는 줄 알고 있는 안현호의 엉덩이를 발로 찬 후,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정분났냐?”

같이 온 우리 둘을 보면서 삐줍거리는 유아린.

“유린기가 말이 많다.”

“이 새끼야, 그거 내 중학교 별명이다.”

어쩐지 입에 착 달라붙더라.

“유린기 맛있겠다.”

갑자기 튀김이 땡긴다 생각해서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자 유아린이 팍 인상을 찌푸리며 따지고 들었다.

“성희롱이냐?”

“그런 거 아냐.”


촬영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중간에 서예린이 합류했고, 마지막으로는 최이서까지 오면서 전부 모였다.

촬영은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미친년 연기하는 유아린은 꽤나 신선해서 내 개인적으로 소장할 생각이었다.

“큭큭.”

잠시 쉬는 시간.

칼을 들고 지랄발광 하는 화면 속 유아린을 보면서 웃고 있자니 옆자리에 슬며시 다가온 서예린.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게 거의 일상이었다.

몇 번인가 떼어낸 적이 있으나 그럴 때마다 "튕겨? 귀엽네?"하고 짓궂게 웃는 모습이 좀 빡쳐서 그냥 두고 있다.

“촬영 잘된 것 같아?”

“어, 솔직히 우리 애들이 다 얼굴이 좀 되니까 내가 편집만 잘 해주면 우리 에쁠 받을 것 같은데.”

“잘할 거야. 혹시 도움 필요하면 불러.”

이런 말하는 거 보면 애는 참 착한데 말이다. 배려도 잘하고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게 왜 서예린이 인기가 많은지 그냥 딱 느껴진다.

“미안한데 하나만 봐줄 수 있을까?”

지금도 부탁하는 모습을 보라.

어차피 쉬는 시간이라서 한가한 내게 부탁할 때도 저렇게 정중하면서도 방해해서 미안해 하고 있지 않은가.

“뭔데?”

“둘 중 하나만 골라줘.”

아, 옷 같은 거 봐달라는 건가?

내가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은 좀 있다.

전여친한테 끌려 다니면서 이것저것 옷을 많이 봤으니까.

전여친이 옷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사치를 부리거나 명품만 사는 건 아니었고.

‘아, 씨.

오윤지에 대한 생각을 접으며 서예린이 내민 핸드폰을 본다.

거기엔.

고양이 귀를 끼고, 브라랑 팬티만 입고 있는 여자가 귀여운 척하면서 서 있었다.

“이거랑.”

“…….”

얘 지금 나한테 뭘 보여주는 거지.

아무렇지 않게 다음 화면으로 넘기자 이번에는 젖소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서 있다.

“이거.”

이거하면 뭐 어쩌라고.

이 거지 같은 년아.

“뭘 어쩌라고.”

아까까지 서예린에 대해 칭찬했던 내 스스로가 싫어진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보여주는 건가 되묻자 서예린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다음에 할 때 입으려고.”

순간 혹해서 나도 모르게 고를 뻔했으나 입술을 으득 물면서 답했다.

“둘 다 안 어울려.”

“진짜로?”

“일단 젖소부터. 이런 건 서양에서나 하는 거야. 그쪽은 풍만하잖아.”

꽈악.

허벅지를 살짝 꼬집는 서예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첫 번째 꺼.”

이를 으득 물면서 사진을 첫 번째로 돌린다. 검은 고양이 비키니를 입고 있는 여자의 등 뒤를 가리킨다.

검은 꼬리가 달려 있는데 저게 어디에 달려 있는 건지 잘은 모르겠다.

단순히 팬티에 달려 있는 걸 수도 있으나 그게 아니라면.

“너 이게 어디에 달린 건지 알아?”

꼬리를 가리키며 묻자 서예린의 얼굴이 발그랗게 붉어진다.

‘알면서 제안했다고?

당장 가자.

“이거 진짜 큰일 날 애네? 야동 작작 봐라.”

“……아, 안 아파 보이던데.”

“안 아파 보이는 건 숙련된 조교 분들이라 그런 거고요. 아오, 야동을 몇 개를 보시는 거예요?”

“……네가 예전에 품번 추천도 해줬잖아.”

아.

“하암! 졸려.”

그대로 쓰러지듯 눈을 감는다.

품번 추천은 왜 해줘가지고.

“이거 복장도 거기서 나오던 거였는데?”

‘시발.

어차피 들킬 일 없다고 낄낄거리며 익명69에게 추천해줬던 내 자신이 미워진다.

옆에서 계속 달라붙으며 찡얼거리는 서예린을 가까스로 떼어내고 도망쳤다.

다른 애들은 뭐하나 싶어서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나무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있잖아.”

안현호?

게다가 최이서까지?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내려온다.

'원래 한 번 차이는 것도 전략임. 그런 식으로 상대방이 나 의식하게 만드는 거야.'

오늘 내가 해줬던 조언이 떠오르며 이마를 탁 쳤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두 사람의 모습이 딱 보이는 순간.

“너 좋아해. 사귀자.”

풋풋하면서도 다소 정석적인 고백 멘트가 안현호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

농담이 아니라.

최이서 표정이 저렇게 썩어 문드러지는 건 살면서 처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