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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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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묻자, 윤지는 보고 싶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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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통보했음에도 윤지는 그런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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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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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윤지와의 관계가 종착점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그녀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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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는 그냥 알겠다고만 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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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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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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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돈 때문에 접근한 애들이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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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거절했음에도 거절을 거절하는 행동들을 보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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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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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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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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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가 끝나기 전에는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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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함에 한숨과 함께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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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화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연락처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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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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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내 옆으로 다가온 김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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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과대가 왜 밖에 나와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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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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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지 않아도 알아서 대답하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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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저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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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매너 꽝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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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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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가려고 나온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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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가겠거니 싶었으나 규아는 계속 내 옆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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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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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문제냐고 넌지시 묻자, 규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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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배들한테 다 말하셨죠? 그만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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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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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고기 먹을 때 이서 선배랑 아린 선배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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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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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슨 대답이 돌아왔는지도 다 알고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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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입안에 맴돌긴 했으나 규아한테 털어놓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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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갈 길 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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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아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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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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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규아는 따지듯 내게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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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배는 세 다리를 걸친 거잖아요. 저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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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걸러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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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나는 걸리면 바로 차이거나, 나쁜 년 소리 듣거나, 심하면 맞은 적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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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여러 애들이랑 사귀는 걸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걸 보면 참 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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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뭔가 엄청 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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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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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선배들을 보고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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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뭇거린 규아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돌멩이를 발로 툭 걷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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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전부 바보같이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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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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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좀 싫네요. 선배들이랑 가까워지기 싫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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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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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도 없이 휙 몸을 틀어 가버리는 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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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아까까지는 우리가 같은 사람이라면서 꿍얼거리던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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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내가 헤어짐을 고백했음에도 거절당한 걸 보니 뭔가 차이를 느꼈고, 거북해 했으며, 질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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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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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통의 관계는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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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머리가 개운해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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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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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장기자랑을 보기 위해서 다시 강당 안으로 들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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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는 시간인지 아니면 다른 게임이라도 하는 건지 몇몇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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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는 주희 선배도 있었는데 나를 보시더니 잘 됐다면서 냉큼 끌고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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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도와주라, 우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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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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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황인가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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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는 시간을 맞이해서 앞에서 게임을 하게 되었고, 주희 선배도 반쯤 강제로 참여하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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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서 퀴즈 같은 거 맞추면 되는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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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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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어렵진 않아 보여서 주희 선배랑 같이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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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까 다들 남녀 페어로 맞춰서 나왔는데, 주희 선배는 같이 나갈 남자가 없어서 곤란하셨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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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선배가 좀 무섭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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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같은 경우도 주희 선배를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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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그럼 이번에 할 게임은 신문지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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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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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호가 마이크를 쥔 채로 흥을 돋우며 신문지를 각 팀별로 하나씩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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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위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팀이 이기는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문지를 접어서 면적이 더 좁아지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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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에 오면 예능에서나 보던 게임들을 따라 한다고 듣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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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예능에서 보던 게임이라서 오히려 받아들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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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둘 다 양발로 서 있을 수 있는 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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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간단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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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으면서 그리 말하자 주희 선배는 입술을 말면서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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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임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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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무슨 의미인가 싶었는데 점점 좁아지는 신문지를 보고 있자니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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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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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생각보다 많이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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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선배랑 찰싹 달라붙게 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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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선배의 양쪽 어깨를 잡고 딱 달라붙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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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세가 포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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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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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안아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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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주희 선배가 내게 했던 부탁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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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대로 내가 착각한 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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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는 주희 선배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명확한 정답을 내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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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모든 일에 직선적인 주희 선배다운 요구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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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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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런 게임인 줄 알았으면 안 부르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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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숙인 주희 선배가 짜증 내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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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괜히 애들 보는데 너 불편하게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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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 평소의 주희 선배라고 할 수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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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소리가 거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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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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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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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내가 선배를 부르자, 도망치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배가 고개를 기울여 나를 쳐다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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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갛게 달아오른 선배의 표정에서, 나는 방금 윤지가 해줬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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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순간적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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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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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주희 선배의 포옹을 거절하면서, 선배가 감정에 대한 정답을 내놓는 걸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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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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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선배는 답을 깨닫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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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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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것을 같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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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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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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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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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끈거리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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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숙취에 눈을 뜨면서부터 벌써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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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에 가면 진탕 술을 마시는 게 국룰이라고 듣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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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렇게까지 마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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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름대로 고민이 있다 보니 차라리 취해서 마음이 좀 편해지자는 편협한 생각에 과음을 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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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나 맥주에는 잘 취하지 않는데도, 나는 어느새 거나하게 취해서는 2, 3학년 남자 방에 널브러졌던 게 기억으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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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여자애들이랑은 접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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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자연스럽게 같이 마시곤 했는데 어느새 남자와 여자로 찢어져서 마시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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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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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랑 좀 친해지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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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 탓에 2, 3학년 남자들은 아침부터 꾀죄죄한 몰골로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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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이자 해장으로 컵라면을 먹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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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둘러앉아서 칙칙한 게 꼭 군대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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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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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서 컵라면을 먹던 안현호가 넌지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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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삐쭉 솟은 게 아침부터 웃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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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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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어제 진탕 퍼마셨잖아. 애들 얘기 들어보니까 다 자러 가도 너 혼자 그냥 마셨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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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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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마시긴 했는데, 주변 애들이랑 얘기를 하거나 하진 않고 그냥 혼자 마셔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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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그냥 마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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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어제 규아랑 밖으로 나가보려고 했는데. 걔도 그냥 술만 주구장창 마시고 뻗어서 자러 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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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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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히 안현호를 쳐다보자 녀석은 라면을 먹다 말고 마주 보더니 혀를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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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규아랑 가까워지지 말라고? 이유라도 말해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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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서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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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규아라면 대답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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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넘어가며 라면이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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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전부 먹고, 속이 개운해지자. 다음은 씻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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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이 많기도 했고, 애들이 금방금방 씻고 나온 덕분에 깔끔하게 씻을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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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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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다들 정리하는 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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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짐을 옮기고 있는 유아린이 딱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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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비몽사몽한 눈으로 버스에 짐을 챙기고 있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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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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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가서 부르자, 유아린은 빤히 나를 쳐다보더니 혀를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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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서 술 마셨냐.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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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방에서. 다 같이 마시긴 했는데, 사실상 그냥 혼자 마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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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차라리 잘됐네. 딴년들이랑 술 마셨다고 했으면 죽였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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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나 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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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 이미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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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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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유아린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뒤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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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서예린에게는 톡을 보냈고, 가던 길에 최이서를 만나서 합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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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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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팬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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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선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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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팔짱을 끼는 등.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내가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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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이니까 좀 쪽팔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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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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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의 투덜거림에 최이서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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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은 졸린 듯 하품을 늘어져라 했으나, 시선 자체는 또렷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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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렀어? 이제 곧 버스 타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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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의 질문에 다시 한번 내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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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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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땀이 나면서 호흡이 살짝 가빠질 것만 같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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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꽉 잡고, 나는 세 사람을 마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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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한테 그러더라. 윤지랑 헤어지고,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니면서 스스로의 욕심만 채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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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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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의 호칭에 두 사람이 휙 그녀를 노려봤으나, 일단 무시하고 말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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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걸 부정하려고 나는 어떻게든 너희 중 누군가 하나를 정하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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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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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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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반대로, 모두를 놓으려고 마음먹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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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버지가 생각하는 나와 정 반대되는 행동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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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다들 힐끔 서로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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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이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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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결국 이런 것도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게 아닌가 하고. 아버지가 읽은 그대로의 김우진이 아니었나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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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말은 씨앗처럼 내 안에 파고들어, 쑥쑥 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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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제 그만하자고 했던 말을 너희에게 거절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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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꽉 움켜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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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서 뭔가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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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깨고 나온다고 표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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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를 막고 있던 아버지의 족쇄가 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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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말을 부정하는 방식은 내게 맞지 않는단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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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반대로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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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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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탐욕적이고, 더 이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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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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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예상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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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실로 궁금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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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확신을 가지자, 이제야 나라는 사람에게 걸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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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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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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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중 누구에게도 향해 있진 않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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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세 사람에게 뻗어진 내 손은 각오와 의지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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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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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말로 내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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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지어진 미소에는 의미 모를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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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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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눈을 뜨자, 처음 나를 반겨준 건 욱신거리는 전신의 통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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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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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자,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간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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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겔 같은 게 꽂혀 있는 건 아니라 슬그머니 일어나자, 마침 간호사분께서 이쪽으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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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깨셨어요? 선생님이 오셔서 설명해 주실 텐데, 몸에 딱히 이상은 없으시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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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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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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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처 맞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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