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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과 처음 만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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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갑자기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서란과 담청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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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어인족을 두고 승천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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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아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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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법보를 남겨 놓고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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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도 없이 사라질 필요까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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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과 만나서 싸우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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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독안룡이 같은 용까지 공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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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승천은 성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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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실패했다면 전대 용신의 생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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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동족을 압도할 정도로 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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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상처 입은 전대 용신의 도주를 허용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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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살아 있다면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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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의식을 통해 여의주를 완성한 이후, 많은 의문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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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린 전대 용신은 모든 것을 망각하고 세상의 중심으로 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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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과 어인교단, 그리고 법보를 남겨 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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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과의 전투 발생 여부는 모르겠지만 교단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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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서란과 담청이 열심히 추리해서 끼워 맞춘 전대 용신의 실종 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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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대 용신은 여의주를 완성하고도 승천 욕구에 잡아 먹히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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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추리는 전제부터 틀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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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이인조는 명예를 위해 기꺼이 재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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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문 앞에서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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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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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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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확히는 수집품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보관해 놓은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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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어떤 물건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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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의복 같은 건 물론이고 골동품, 부서진 법보의 파편, 가구, 심지어 자기 초상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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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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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초상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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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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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애가 강한 성격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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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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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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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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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걸음에 맞춰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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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 들여보내 주는 자동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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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재빨리 뒤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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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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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이나 법술 같은 모종의 대비가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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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이 들어와서 청소한 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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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대 용신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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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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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짝만해서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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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 안에는 묘령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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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특유의 사슴뿔, 청록색 눈동자, 눈부신 미모, 그리고 자애로운 미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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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경건한 마음으로 초상화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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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서란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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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지 말고 어서 가자꾸나. 용신이 사라진 이유를 밝혀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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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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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복잡하게 쌓인 잡동사니의 미로를 헤치고 책장이 잔뜩 늘어선 공간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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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장서들이 책꽂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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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개인 도서관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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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사이를 오가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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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는 뭐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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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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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찜 맛있게 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 있네요. 요리책 두는 곳인가 봐요. 거기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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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천체 관측 기록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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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말고 계속 찾아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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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찾는 건 전대 용신의 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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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교단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대 용신은 자나깨나 공책과 함께하는 기록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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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할 때도 왼손에 붓을 쥐고 있었다는데 설마하니 일기만 안 적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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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책장 사이를 헤매던 서란과 담청은 마침내 전대 용신의 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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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분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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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처럼 쌓인 일기장이 서란과 담청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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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부분만 골라내기가 심히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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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체계 없이 마구잡이로 꽂아 놓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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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탐정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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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무작위로 한 권씩 골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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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독으로 빠르게 훑어보면서 어인족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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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급이 있는 일기만 따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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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답답한 마음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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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적어 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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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광기가 느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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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좀 무서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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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 멀리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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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종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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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교단 관계자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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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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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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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급적이면 빨리 돌아와 줬으면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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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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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서란이 돌아와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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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문이 안 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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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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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자동문이 있는 곳까지 서란을 바래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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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란은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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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없이 친구를 유기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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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 준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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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를 읽고 결재 도장을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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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야말로 재봉틀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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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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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일기 지옥에 홀로 남겨진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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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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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더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담청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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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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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할 정도로 지루했던 분류 작업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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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벽 너머를 흘낏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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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결재 서류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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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돌아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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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콧노래를 부르며 첫 권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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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궁금해서 더는 못 기다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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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혼자서라도 먼저 읽어 볼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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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이름 없는 용의 하루 일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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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수행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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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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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세월 동안 반복해 온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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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완성하려는 노력과 승천을 향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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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본 적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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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과거와도 굉장히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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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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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미물들이 용의 동굴 근처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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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적힌 묘사로 봤을 때, 어인족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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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요괴들을 피해서 동굴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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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름 없는 용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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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린 어인족, 뒤따라온 요괴 무리, 용의 법술에 일소되는 적, 눈물 어린 감사, 간곡한 요청과 승낙, 새로운 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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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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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용이 어인족의 신이 된 이유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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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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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행간에서 은연중에 감정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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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물이나 마찬가지인 종족을 향한 미약한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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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추앙에 대한 꺼림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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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귀찮은 짓을 자초했다는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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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분명 선량하고 자비로운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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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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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어인족을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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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디까지나 담청의 추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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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표면적인 내용은 지극히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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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고민한 흔적과 어인족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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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책임감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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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우당탕탕 건국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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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이랍시고 뭘 자꾸 바치는 어인족, 겁도 없이 덤벼드는 대요괴들, 항상 골치가 아픈 전대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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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과 어인교단은 조금씩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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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럽던 어인족은 어느새 문명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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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향이란 본디 서로 주고 받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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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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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며 치장하던 전대 용신은 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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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부터 이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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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창고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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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인족이 바친 시답지 않은 공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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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전대 용신은 무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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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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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전대 용신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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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건 오직 행동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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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은 어인족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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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초상화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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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운 초상화를 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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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어린 초상화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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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고개를 들어 초상화를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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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류된 일기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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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생애를 담은 방대한 일기 중, 어인족을 만난 이후 쓰인 것들은 한 줌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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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다시 일기에 고개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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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뻔한 이야기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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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여의주, 제단을 만드는 어인족, 의식을 마치고 목격한 선계, 승천 욕구, 환호, 용을 지상으로 추락시키는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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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문구가 기나긴 일기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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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용은 홀로 온전한 존재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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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문의 뒷장은 모조리 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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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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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멍하니 빈 종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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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마지막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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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를 뒤져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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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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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담청색 용안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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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는 결코 스스로를 비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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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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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권능이 있지만 스스로의 내면 만큼은 들여다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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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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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거울 속의 자신을 한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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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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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의문에 종지부를 찍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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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가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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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어인족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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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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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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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좋을 것 같구나. 아, 물론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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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년 전의 침묵과 달리, 담청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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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더욱 아끼고 의지했으면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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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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