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인족과 처음 만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전대 용신이 갑자기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서란과 담청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용신이 어인족을 두고 승천했으리라고. 물론 의아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향로 법보를 남겨 놓고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말도 없이 사라질 필요까지 있었나? 독안룡과 만나서 싸우지는 않았을까? 애초에 독안룡이 같은 용까지 공격했을까? 전대 용신의 승천은 성공했나? 만약 실패했다면 전대 용신의 생사는? 독안룡은 동족을 압도할 정도로 강했나? 아니면 상처 입은 전대 용신의 도주를 허용했나? 전대 용신이 살아 있다면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담청이 의식을 통해 여의주를 완성한 이후, 많은 의문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었다. 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린 전대 용신은 모든 것을 망각하고 세상의 중심으로 향했을 것이다. 용궁과 어인교단, 그리고 법보를 남겨 둔 채로. 독안룡과의 전투 발생 여부는 모르겠지만 교단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알 것도 같았다. 여기까지가 서란과 담청이 열심히 추리해서 끼워 맞춘 전대 용신의 실종 사유였다. 하지만 전대 용신은 여의주를 완성하고도 승천 욕구에 잡아 먹히지 않았었다. 서란과 담청의 추리는 전제부터 틀린 셈이었다. 명탐정 이인조는 명예를 위해 기꺼이 재도전했다. ***** 커다란 문 앞에서 서란이 물었다. “여기가 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라고요?” 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히는 수집품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보관해 놓은 방이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들이 있었나요?” “책이나 의복 같은 건 물론이고 골동품, 부서진 법보의 파편, 가구, 심지어 자기 초상화도 있었다.” 서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초상화요?” “방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었지.” “자기애가 강한 성격이었을까요?” 담청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글쎄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 봐야지.” 그러더니 발을 내디뎠다. 담청의 걸음에 맞춰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용만 들여보내 주는 자동문인 모양이었다. 서란은 재빨리 뒤따라 들어갔다. 장기간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깨끗했다. 진법이나 법술 같은 모종의 대비가 있었으리라. 어인족이 들어와서 청소한 건 아닐 테니까. 서란은 전대 용신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일부러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대문짝만해서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화폭 안에는 묘령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용족 특유의 사슴뿔, 청록색 눈동자, 눈부신 미모, 그리고 자애로운 미소까지. 서란은 경건한 마음으로 초상화를 감상했다. 담청이 서란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한눈팔지 말고 어서 가자꾸나. 용신이 사라진 이유를 밝혀내야지.” “아, 맞다!” 둘은 복잡하게 쌓인 잡동사니의 미로를 헤치고 책장이 잔뜩 늘어선 공간에 당도했다. 무수한 장서들이 책꽂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개인 도서관이나 다름없었다. 책장 사이를 오가던 담청이 물었다. “그쪽에는 뭐가 있느냐?” 서란이 대답했다. “돼지고기찜 맛있게 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 있네요. 요리책 두는 곳인가 봐요. 거기는 어때요?” “하나같이 천체 관측 기록뿐이구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찾아보죠.” 서란과 담청이 찾는 건 전대 용신의 일기였다. 어인교단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대 용신은 자나깨나 공책과 함께하는 기록광이었다고 한다. 식사할 때도 왼손에 붓을 쥐고 있었다는데 설마하니 일기만 안 적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책장 사이를 헤매던 서란과 담청은 마침내 전대 용신의 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기장이 서란과 담청을 반겼다. 원하는 부분만 골라내기가 심히 곤란했다. 분류 체계 없이 마구잡이로 꽂아 놓은 탓이었다. 두 명탐정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란과 담청은 무작위로 한 권씩 골라 읽었다. 속독으로 빠르게 훑어보면서 어인족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했다. 그리고 언급이 있는 일기만 따로 분류했다. 서란은 답답한 마음에 말했다. “진짜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적어 놨네요...” “어렴풋한 광기가 느껴지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좀 무서워지네요...” 그때 저 멀리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초인종 소리였다. 어인교단 관계자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서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그래, 가급적이면 빨리 돌아와 줬으면 싶구나.” “걱정 마세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잠시 후, 서란이 돌아와서 말했다. “담청 님, 문이 안 열려요.” “아,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담청은 자동문이 있는 곳까지 서란을 바래다줬다. 이후, 서란은 돌아오지 못했다. 의리 없이 친구를 유기한 게 아니었다. 용신제 준비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읽고 결재 도장을 쾅! 서란은 그야말로 재봉틀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너무 많았다. 담청이 일기 지옥에 홀로 남겨진 연유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책더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담청이 외쳤다. “드디어!” 끔찍할 정도로 지루했던 분류 작업이 끝났다. 담청은 벽 너머를 흘낏 바라봤다. 서란은 결재 서류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당분간 돌아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담청은 콧노래를 부르며 첫 권을 펼쳤다. 너무 궁금해서 더는 못 기다릴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먼저 읽어 볼 요량이었다. 일기는 이름 없는 용의 하루 일과로 시작됐다. 용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수행으로 보냈다.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나긴 세월 동안 반복해 온 나날이었다. 여의주를 완성하려는 노력과 승천을 향한 갈망. 용은 본 적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담청의 과거와도 굉장히 유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의 미물들이 용의 동굴 근처에 나타났다. 일기에 적힌 묘사로 봤을 때, 어인족이 분명했다. 어인족은 요괴들을 피해서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이름 없는 용과 만났다. 겁에 질린 어인족, 뒤따라온 요괴 무리, 용의 법술에 일소되는 적, 눈물 어린 감사, 간곡한 요청과 승낙, 새로운 신의 탄생. 하나같이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름 없는 용이 어인족의 신이 된 이유는 모른다. 일기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탓이었다. 다만 행간에서 은연중에 감정이 드러났다. 미물이나 마찬가지인 종족을 향한 미약한 연민. 맹목적인 추앙에 대한 꺼림칙함. 괜히 귀찮은 짓을 자초했다는 후회. 전대 용신은 분명 선량하고 자비로운 신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딱히 어인족을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담청의 추측이었다. 일기의 표면적인 내용은 지극히 건조했다.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고민한 흔적과 어인족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대부분이었다. 전대 용신의 책임감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한동안 우당탕탕 건국기가 이어졌다. 공물이랍시고 뭘 자꾸 바치는 어인족, 겁도 없이 덤벼드는 대요괴들, 항상 골치가 아픈 전대 용신. 전대 용신과 어인교단은 조금씩 변해 갔다. 야만스럽던 어인족은 어느새 문명을 이룩했다. 그리고 영향이란 본디 서로 주고 받는 것이었다. 전대 용신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거울을 보며 치장하던 전대 용신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던가?’ 전대 용신은 창고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꺼냈다. 오래전 어인족이 바친 시답지 않은 공물이었다. 그림 속의 전대 용신은 무표정했다. 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오로지 전대 용신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건 오직 행동뿐이었다. 용신은 어인족에게 명령했다. 오래된 초상화를 버려라. 그리고 새로운 초상화를 그려라. 미소 어린 초상화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렸다. 담청은 고개를 들어 초상화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분류된 일기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전대 용신의 생애를 담은 방대한 일기 중, 어인족을 만난 이후 쓰인 것들은 한 줌에 불과했다. 담청은 다시 일기에 고개를 박았다. 또 다시 뻔한 이야기가 계속됐다. 전대 용신의 여의주, 제단을 만드는 어인족, 의식을 마치고 목격한 선계, 승천 욕구, 환호, 용을 지상으로 추락시키는 닻. 한 줄의 문구가 기나긴 일기를 끝맺었다. ‘과연 용은 홀로 온전한 존재가 맞는가?’ 그 의문의 뒷장은 모조리 백지였다. 담청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빈 종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기의 마지막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매를 뒤져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물론 담청색 용안도 보였다. 등대는 결코 스스로를 비추지 못한다. 용도 마찬가지였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권능이 있지만 스스로의 내면 만큼은 들여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담청은 거울 속의 자신을 한없이 바라봤다. 용안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랜 의문에 종지부를 찍은 기분이었다. ***** 용신제가 개최됐다. 이번에도 어인족은 물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서란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술이 좋을 것 같구나. 아, 물론 사랑도.” 이십여 년 전의 침묵과 달리, 담청도 대답했다. “서로 더욱 아끼고 의지했으면 싶구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