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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이아금은 일단 교역 본부로 갔다.
인형 재료를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수속을 끝내자,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일을 마친 지암서가 일행에 합류했다.
지암서는 서란과 이아금을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출퇴근 거리가 짧은 모양인지 금방 도착했다.
보금자리에 돌아온 지암서는 가면을 벗었다.
어벙한 얼굴이 됐다는 뜻이었다.
서란이 물었다.
“그 표정 연기 어떻게 하는 거야?”
“예? 아, 이거요?”
지암서가 ‘고압적인 연구원’ 표정을 지었다.
마치 두 얼굴을 탈착식으로 바꿔 끼는 듯 했다.
봐도 봐도 신기했다.
서란은 너무 궁금했다.
“응, 그거. 혹시 비결이 있어?”
지암서가 대답했다.
“코가 간지러운 상상을 하면 돼요.”
서란이 곧장 코를 찡그렸다.
“아금아, 어때? 다른 사람 같아 보여?”
“응, 감쪽같다. 배고픈데 저녁이나 먹을까요?”
일행은 사이좋게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단은 지상이나 지저 세계나 거기서 거기였다.
대부분의 식량을 지상에서 들여오니 당연했다.
양갈비를 먹던 서란이 물었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는 왜 그랬던 거야? 나랑 아금이는 인간이잖아. 종족도 서로 다른데 굳이 질투할 이유가 있나?”
지암서가 떠듬떠듬 대답했다.
“아니, 토토서 인기 많아서... 혹시나 했어요...”
토토서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
외모, 머리, 건강, 성격 등을 모두 갖췄다.
이 정도면 세금도 남들 다섯 배씩은 내야 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니 식사가 끝났다.
지암서가 만든 음식은 훌륭했다.
요리 잘 하는 두더지, 매력 포인트 +5점.
후식은 빙과와 냉음료였다.
서란은 살짝 멈칫했다.
아이스크림과 아이스티를 함께?
조합이 이게 맞나?
미궁언서 녀석들, 얼음 엄청 좋아하네.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지저 세계다.
수도자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배탈이 났을 거다.
하지만 직접 만들었다니까, 매력 포인트 +2점.
이 정도면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물론,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서란은 반쯤 헤치운 빙과를 내려놓았다.
“지암서, 운동은 자주 해?”
지암서한테 물었는데 대답은 이아금이 했다.
“갑자기?”
“쉿!”
서란이 검지손가락으로 동생의 입술을 막았다.
그리고 엄격한 면접관처럼 말했다.
“매력도 및 연애 성공률을 산정하기 위한 질문이야. 아무튼, 너는 운동을 얼마나 자주 하지?”
지암서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운동은 보통 이틀에 한 번씩 해요.”
“어떤 운동을, 어떤 목적으로?”
“어, 요즘은 수영을 배우고... 목적, 목적은... 건강 증진과 재난 상황 대처?”
“훌륭해. 아주 훌륭해, 지암서.”
운동하는 두더지, 매력 포인트 +10점.
위기 대처 능력, 매력 포인트 +10점.
서란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외에 자기 관리를 하는 게 있어?”
“건강을 위해서 식단 조절을 하고, 털 관리도 꾸준히 받아요. 아, 최근에는 새로운 학위를 따기 위해서 야간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참고로 식단 구성은?”
“영양학적으로 치우치지 않게 골고루, 그리고 체중이 줄거나 늘지 않을 만큼만 챙겨 먹어요.”
균형 잡힌 식단, 매력 포인트 +7점.
털 관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매력 포인트 +1점.
공부를 멈추지 않음, 매력 포인트 +5점.
종합 점수, 40점.
총평, 어제보다 나아지기를 멈추지 않음.
서란이 결연히 선언했다.
“지암서, 너는 완벽하게 준비됐다.”
“정말인가요?!”
“그래!”
물론, 점수를 매길 요소는 아직 많았다.
예를 들면 외모 경쟁력 등이 있겠다.
하지만 서란이 보기에, 그런 질문들은 무의미했다.
못 생겼으니 포기하라고 할 것도 아니고.
애초에 외모는 선천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자기 관리를 꾸준히 한 지암서의 매력은 이미 태생적 한계에 도달했을 확률이 높았다.
토토서의 취향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부터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그 밖에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란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가자, 고백하러!”
이아금도 벌떡 일어나서 서란을 만류했다.
“그건 아니지!”
“내 육감이 외치고 있어! 이건 분명히 된다고!”
“근거가 하나도 없다는 소리잖아!”
“아금아, 너에게는 보이지도 않더냐! 스스로를 갈고닦아 온 치열한 생애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는 부단한 노력이! 지암서가 흘린 피와 땀이!”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어!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호 간의 합의야! 외교처럼 사전에 넌지시 의사를 보내고, 준비할 시간도 줘야 한다고!”
“자고로 용기 있는 자만이...!”
이아금은 최후의 수단을 썼다.
잔에 담긴 얼음을 서란의 입에 쑤셔 넣었다.
덕분에 시간을 조금 벌었다.
이아금이 지암서에게 말했다.
“지암서, 고백은 진짜 아니에요. 일단은 진솔한 모습부터 보여 주세요.”
지암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진솔한 모습이요?”
“예, 진솔한 모습. 직장 선배들이 시킨 그 이상한 연기 말고, 진짜 지암서의 모습이요.”
“하,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연기를 해서... 가면을 안 쓰면 토토서 앞에서는 말이 잘 안 나와요. 막,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입에 든 얼음을 다 삼킨 서란이 말했다.
“아니, 네가 뭐 어때서?”
지암서가 중얼거렸다.
“두 분은 하나도 몰라요. 진짜 저보다는 연기로 만들어진 가짜가 훨씬 나아요. 말도 제때 잘하고, 망설이지도 않고... 또 용감하잖아요. 차라리 그랬으면 엄마 아빠도...”
지암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음이 가득 든 잔이 보였다.
지암서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서란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지암서는 서란을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고는 싶은데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그냥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서란은 부드럽게 지암서를 다독였다.
“괜찮아, 지암서. 말을 할지 말지 차분하게 고민해 봐. 끝까지 기다려 줄게. 혹시라도 말하기 싫어지면 안 해도 돼.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잔에 든 얼음은 어느새 전부 녹았다.
평소 일찍 자던 이아금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침내 지암서의 입이 열렸다.
지암서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더 좋으면 아빠와 간다.
반대로 엄마가 더 좋으면 엄마와 간다.
지암서의 형제자매는 순식간에 갈라졌다.
가장 마지막까지 선택을 못한 건 지암서였다.
그녀는 도저히 결정할 수 없었다.
지암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떨었다.
다 마신 음료 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지암서의 부모는 마지막 남은 딸을 꼬드겼다.
달콤한 약속, 전 배우자에 대한 음해, 고함.
소심했던 지암서는 끝내 ‘그냥, 다시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화가 잔뜩 난 부모는 자신을 선택한 아이들만 데리고 떠났다.
지암서는 홀로 남겨졌다.
잔 안에 남은 얼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암서는 용기없는 자신이 싫어졌다.
사연을 전부 들은 서란이 말했다.
“그랬구나...”
한 번 말문이 터진 지암서는 멈추지 않았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다음부터, 저는 쭉 보육원에서 지냈어요. 물론 거기서도 외톨이였어요. 친구가 없었거든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졸업할 때까지 혼자서 공부만 했고...”
“그래서 아까 그런 얘기를 한 거야? 진짜 나보다 가짜가 낫다고?”
“예, 그렇죠. 적어도 가면을 쓰면 용감해지잖아요. 말도 제때제때 하고, 망설이지도 않고... 아무리 봐도 저보다는 낫죠. 지금도 보세요, 이런 옛날 일 하나 털어놓는데 한참이나 꾸물거렸는데...”
서란은 애써 지암서를 위로했다.
“친구가 왜 없어, 토토서가 있잖아.”
“토토서랑 처음 대화한 건 졸업식 날이었어요.”
“졸업식?”
지암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졸업식 날 학교 구석에서 울고 있었거든요. 학창 시절에 친구 하나 못 만든 게 서러워서. 그러다가 근처를 지나가던 토토서랑 만났어요.”
서란이 물었다.
“그래서?”
“뭐. 왜 우냐, 무슨 일이 있냐. 그렇게 물어 보더라고요. 제가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니까 근처 가게로 데려가서 음료수를 사줬어요.”
서란은 지암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종족이 달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토토서 얘기가 나오자 다소 밝아진 것 같았다.
그래서 관련된 질문을 계속했다.
“토토서랑은 그렇게 친해진 거야? 좋아하게 된 건 그 다음이고?”
“아뇨, 좋아하기는 그때부터 좋아한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한번 잘 생각해 봐. 인상적인 일이었을 테니까 분명히 떠오를 거야.”
지암서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음, 창가 자리에 앉았던 것 같아요. 냉음료를 하나씩 시키고... 저는 그때도 과즙 음료였을 테고, 토토서는... 우유랑 꿀이었나?”
“그래, 과즙 음료랑 꿀 탄 우유. 그리고?”
지암서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까랑 똑같이 왜 울었냐, 무슨 일이냐. 아, 자기가 상담을 해주겠다는 말도 했어요.”
서란이 반색했다.
“상담으로 네 마음의 상처를 단번에 치료해 준 거야? 그래서 사랑에 빠졌고?”
“아뇨, 가물가물하긴 한데... 도움은 그다지 안 됐던 것 같아요. 한참 고민하다가, 학창 시절을 친구 하나 없이 보낸 게 슬퍼서 울었다고 털어놨거든요? 그러고 나서 가게를 나왔어요.”
“아니, 왜?”
“가게 영업시간이 끝났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보육원으로 돌아갔어요. 아, 토토서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해서 지금의 관계가 된 거예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좋아하게 된 거야?”
“어, 그러게요?”
지암서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어째서 토토서를 좋아하게 됐지?
냉음료 한 잔? 아니면 받지도 못한 상담?
울고 있을 때 보낸 호의?
지암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홀로 흘린 눈물, 얼음이 가득한 냉음료, 상담을 해주겠다던 토토서, 어느새 끝나 버린 가게 영업시간.
졸업식, 냉음료, 상담, 영업시간.
눈물, 얼음, 토토서, 영업시간.
그래, 가게 영업시간.
지암서는 깨달았다.
상담을 해주겠다는 토토서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내면의 나약함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건 두렵다.
지암서는 그때도 두려움에 떨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얼음이 담긴 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남겨진 그 날처럼.
그때도 지암서는 망설이고 있었다.
잔에 담긴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졸업식이 막 끝난 순간부터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을 때까지.
혼자 울고 있던 이유, 그 짧은 얘기를 털어놓기까지 정말로 긴 시간이 걸렸다.
그게 토토서를 사랑하게 된 이유였다.
가게 주인의 눈치 때문에 음료수를 몇 번이나 더 주문하면서도 기다려줬다.
설레는 졸업식 날, 처음보는 여자를 위해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줬다.
지암서의 부모조차 그 정도는 안 기다렸었다.
두려움과 망설임 끝에, 지암서는 고개를 들었다.
잔 안에 든 얼음 녹은 물, 빈 음료 잔이 가득한 탁자, 선량함이 가득 담긴 두 눈.
토토서는 그때까지도 지암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지암서의 짝사랑은 그 순간에 시작됐다.
지암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나뒹굴고, 탁자가 요동쳤다.
졸고 있던 이아금은 화들짝 놀라서 깼고, 탁자 위에 놓인 음료 잔도 넘어졌다.
지암서가 주먹을 하늘로 힘차게 뻗으며 외쳤다.
“용기가 생겼어요!”
서란조차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뭐, 뭐라고?”
“아니, 그게! 저는 분명 우물쭈물하고, 망설이고... 또 용기도 없지만, 토토서는 이런 저를 기다려줬어요! 얼음이랑 영업 시간이... 아니, 아무튼! 용기가 생겼어요!”
서란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동조했다.
“가자, 지암서! 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거야! 토토서의 마음을 사로잡아! 너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 왔잖아!”
“저는 두더지 요수인데요?”
“더 나은 미궁언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 왔잖아! 스스로를 갈고닦은 시간을 떠올려!”
“맞습니다,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찬란히 빛나는 성백은처럼!”
결국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왔다.
쭈굴쭈굴해진 지암서가 말했다.
“일단 좀 치울까요?”
“그러자. 아금아, 들어가서 자.”
지암서는 넘어진 의자와 잔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물로 흥건해진 탁자를 닦았다.
얼음 녹은 물이라 그런지 차가웠다.
지암서가 문득 중얼거렸다.
“얼음...”
그러고는 서란을 바라봤다.
잠에 취한 동생을 챙기고 있었다.
상담, 자신을 염려하던 표정, 그 선량함.
한동안, 지암서는 가만히 서서 서란을 바라봤다.
오죽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아금이 물었다.
“언니, 어제 나 잘 때 뭐 했어?”
“전문적인 상담을 해 줬지.”
“상담 한 번으로 사람이 저렇게 변한다고?”
서란이 오류를 정정했다.
“사람이 아니라 미궁언서야.”
“아무튼, 그게 말이 돼?”
“그만큼 내 상담이 훌륭했다는 뜻이지.”
서란이 우쭐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