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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꽤나 독특한 방식의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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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특이한 건, 1차 시험에서 과락만 면하면 무조건 2차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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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 평균이 43점이든 61점이든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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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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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합격-불합격 방식의 시험도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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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아한 부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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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1차 시험 성적과 2차 시험 성적을 종합해서 합격자를 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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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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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합격-불합격 방식말고 성적순으로 1차 시험 합격자를 가려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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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차 시험 시기만 되면 도원향 총타는 선계 전역에서 모인 고시생들로 미어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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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대충 하다 과락 맞고 1차 탈락한 허수 외에는 전부 2차 시험 보러 오니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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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숙박업자들은 행복의 비명을, 행정 관료들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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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가 너무 오래 전에 만들어진 제도라는 게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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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은 올해로 제342회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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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마다 시행된다는 걸 고려하면 무려 34000년 이상 된 낡은 제도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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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한두 번 개편된 제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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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법관 고시는 절대평가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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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2차 시험 모두 합격-불합격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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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기준은 당연히 선백파흑진군이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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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은 굉장히 엄격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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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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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하늘이 그에게 지어준 등선명 자체가 ‘흰 것을 뽑고 검은 것을 깨뜨리다’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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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의 무자비한 합격 기준이 법관 고시 응시생들을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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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연속으로 합격자가 전무하자, 참다 못한 법관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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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부족 문제가 너무 심각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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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백파흑진군이 넓은 아량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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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정원제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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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은 합격-불합격 방식으로 유지하고, 2차 시험 성적순으로 당락을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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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2차 시험 과락 제도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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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관들의 과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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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시험마다 합격 정원의 1할도 못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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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선백파흑진군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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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높은 낙제 기준에 1차 시험 합격자들이 우수수 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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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제도의 역사는 곧 개편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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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은 자기만의 기준을 꿋꿋하게 내세우고, 인력 부족에 시달린 법관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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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수많은 제도들 중에서 개편 횟수만 따지면 법관 고시가 압도적으로 1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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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수백 번의 개편을 거친 법관 고시는 마침내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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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누더기처럼 기워 붙였더니 원래는 어떻게 생긴 제도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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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백파흑진군은 단 하나 만큼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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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실기 시험의 난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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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권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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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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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화 결계를 제외하면, 용안의 권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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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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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용안을 지니고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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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용에게는 용안의 권능이 일절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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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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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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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상호 간에 두 단계 정도의 경지 차이가 존재하면 용안의 권능은 무용지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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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2차 시험장에 은한기 수사를 들여보낸 선백파흑진군의 무자비함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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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은한기 수사는 구술 담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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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의 권능으로 구술 담당이 말하는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실기 시험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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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 수사가 구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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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사기 범죄자의 비공개 사건 기록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잘 듣고 진위 여부를 가려주세요.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사기 범죄자 ‘갑’은 평소 알고 지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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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 수사는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사건 기록을 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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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본 기록과 2차 시험을 위해 일부 변경한 실기용 기록, 두 개를 모두 숙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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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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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자들이 할 일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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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담당의 말을 통해 기록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 원본을 유추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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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탐지기 성능 실험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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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 수사의 구술이 계속될수록 응시생들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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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계나 되는 경지 차이 때문에 용안의 권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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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내용의 진위 여부를 구분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응시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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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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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갑’은 공범 ‘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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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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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병’은 공범이 아니라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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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가 시작되자 공범 ‘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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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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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을’은 범죄자 ‘갑’의 공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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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갑’은 서부 ‘경5 구역’으로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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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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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확히 어디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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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처가 ‘경5 구역’이 아닐 수도 있고, 아예 도피에 관한 모든 것이 위증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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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다 읽은 구술 담당이 시험장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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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빠르게 답안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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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식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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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구술 담당이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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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광홍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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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로 치면 방금 나간 은한기 수사가 ‘상’, 지금 들어온 사람이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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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구술 담당이 들어왔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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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 광홍기, 은한기 등 경지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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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실기 시험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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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생들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시험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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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궁 내부의 최고재판소 인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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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 담당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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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주관식 문제라서 채점하기 곤란한데 응시생 숫자까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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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 안에 전부 끝내려면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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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 한 명이 답안지를 들여다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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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거짓, 거짓, 거짓, 거짓, 진실,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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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역할은 초벌 채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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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내용의 진위 여부만 확인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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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채점은 옆에 앉은 동료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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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그야말로 기계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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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거짓, 거짓, 진실, 거짓, 진실,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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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은 동료가 한마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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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좀 채점하면 큰일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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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안 하면 자꾸 헷갈린단 말이야. 아, 어디까지 채점했는지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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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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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다시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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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거짓, 거짓, 거짓, 진실, 거짓...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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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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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12번 문제 진위 여부 다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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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동료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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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문제? 그거 구술 담당 준선경 수도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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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여태까지 채점하면서 전부 틀렸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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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 맞혔지? 찍었는데 운이 좋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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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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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 문항이 50개가 넘는데? 그리고 진위 여부는 틀리기라도 하면 그 즉시 감점이잖아. 그런 걸 모르겠다고 냅다 찍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차라리 빈칸으로 놔두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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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틀리면 감점이네... 진짜 어떻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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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실력으로 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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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동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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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나? 태성기 수사의 용안이 준선경 수사한테 통했다고? 경지 차이만 세 단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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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완전히 통한 건 아닌가 봐. 12번 문제, 진위 여부만 적혀 있고 나머지는 공백이잖아. 자세한 내막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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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깝다. 진위 여부는 부분 점수 되게 적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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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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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점수가 어디야. 고시생들, 필기 1점 올려 보겠다고 몇 년씩 고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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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것도 그래. 아니, 근데 뭐 이런 문제를 출제하냐? 응시생들 다 틀리는 문제가 무슨 변별력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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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을 하다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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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막힌 동료 대신 인사과장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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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퍽 한가한 모양이야? 이렇게 한담을 다 나누시고. 당연히 채점들은 다 하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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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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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아직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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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남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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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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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장이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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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빨리 좀 해 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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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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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맙군. 눈물나게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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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장이 떠나고, 두 직원은 묵묵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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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초벌 채점한 답안지를 옆자리 동료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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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답안지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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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옆자리 동료가 숨죽인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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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잠깐 이것 좀 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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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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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진위 여부 다 맞힌 아까 그 답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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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인사과장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옆자리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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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지에는 믿기지 않는 점수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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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성적이 무려 70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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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났다가 인사과장에게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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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3차 면접 응시 자격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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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성적은 필기 43점, 실기 59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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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을 내면 51점, 합격 안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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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면접장으로 가던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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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점검하겠습니다. 이런,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면접관이 보이는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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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152번, 담청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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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존댓말 특훈은 성공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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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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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너무 떨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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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3차 면접은 사실상 요식 행위거든요. 빨가벗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합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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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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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긴장한 담청을 잘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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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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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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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최종 성적은 필기 61점, 실기 70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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