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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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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대장장이가 벼려낸 47개의 무구이자, 기적과도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유물. 예로부터 이를 무구로 분류해야 할지 유물로 분류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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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어느 것은 창칼의 형태요, 또 어느 것은 등불이나 외눈 안경, 그리고 시계와 같은 장신구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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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가 걸작이 ‘위험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걸작은 신비를 품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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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이 만들어지고 수천, 수만 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신비라는 개념은 정의됐다. 다름 아닌 대마법사 멀린에 의해서. 그녀의 말에 의하면 신비(神秘)란 아래와 같은 뜻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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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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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바깥에 놓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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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타오르고 얼음은 차가우며, 그림자는 빛의 반대 방향으로 진다와 같은··· 너무나도 당연한 규칙. 그런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바로 신비다. 달리 말하자면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것들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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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바깥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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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개념이 깃든 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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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물건들이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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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예시지만,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걸작 ‘책갈피’가 소드 시커급의 무인을 죽인 사례도 있었으니 그 위험도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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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전력 차이를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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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깨고 전황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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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구에 깃든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걸작을 든 상대와의 전투는 몹시도 고단해지는 법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무인은 걸작을 쥔 상대, 특히나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가진 이와의 전투를 피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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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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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에 깃든 신비를 알아야 변수에 대비할 수 있는 법인데, 통상적으로 신비를 알아낼 방법은 ‘처맞아 본다’ 이외에는 달리 없었으니까. 그리고 걸작에 당한 이들은 대개 그 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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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걸작 책갈피. 그 걸작에 깃든 신비를 알아차리기까지 총 68명의 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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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자신이 그 68명이 되고 싶은 무인은 없다. 다른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가며 걸작의 신비를 파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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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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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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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예외란 게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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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처맞아보지 않더라도, 한번 식견 한 것만으로도 신비(神秘)를 꿰뚫어 보는 인물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 대마법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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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걸작에 깃든 신비, 아지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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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를 정의한 대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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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나진에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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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와 감각을 혼동시켜. 하지만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나진 않아. 불을 직시하면 ‘시야’가 흔들려. 그리고 바닥의 불그림자를 밟으면 감각이 흔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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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거나, 그림자를 밟거나 삼켜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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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여기선 그림자를 피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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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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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지하 수로에 숨어든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이 지하 수로는 저 걸작을 사용하기에 너무나도 유리한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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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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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에 한 말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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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를 향해 달리며 나진은 속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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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고. 나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뜸과 동시에 나진은 제 몸에 흐르는 흐름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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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날 이후로 제 몸에 깃든 별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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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져 있고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제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찬란히 빛나는 별빛이 나진의 몸에는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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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몸은 엑스칼리버의 검집이나 다름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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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퍼트 때야 자각하기 어려웠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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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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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느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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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의 편린을 깨우쳤다. 소드 시커의 초입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진의 영혼과 육신은 분명히 성장했고, 성장은 제 안에 숨겨져 있던 것들을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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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느껴진다. 영혼에 깃든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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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자신이 다룰 수 없는 것. 너무나도 거대하고 세찬 별빛. 하지만 그것을 아주 조금, 한 줌이나마 움켜쥐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한 줌의 별빛을 온몸에 두를 수는 없다. 별빛을 쓸 수 있는 것은 한정된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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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디에 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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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에 별빛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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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으로 물든 눈동자가 등불에 타오르는 불길을 똑바로 응시했다. 드리운 불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순간 나진의 감각은 뒤흔들렸지만, 그 시야가 흔들리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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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는 걸작의 위에 존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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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검은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는 개념인데, 어딜 걸작 따위가 엑스칼리버에 비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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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는 걸작의 상위개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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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히죽였고 나진은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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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진탕이 됐지만, 시야만큼은 멀쩡하다. 제 뜻과 반대로 몸이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이 제 두 눈동자에 보였으므로 수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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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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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차며 나진이 속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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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나진을 보며, 파우베가 눈을 부릅떴다. 걸작을 응시하고도 정면에서 달려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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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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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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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등 위로 떠오른 서클이 반짝이고, 주문을 토해냈다. 뼈 말뚝. 뼈 늪. 저 돌진을 막고 시간을 벌기 위한 주문들. 즉발된 주문들이 나진의 길을 가로막지만··· 나진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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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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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면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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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말뚝이 나진의 검기에 휩쓸려 가루가 됐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뒤덮은 뼈늪 역시 마찬가지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나진은 멈춰 서는 법이 없었고, 휘두르는 동작과 걸음을 내딛는 동작은 구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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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스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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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두를 때마다 뼈들이 뭉텅이로 쓸려나간다. 단 1초도 나진의 발걸음을 붙잡지 못한 채, 파우베의 주문은 쓸려나갔다.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나진의 모습에 파우베는 섬뜩함마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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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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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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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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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는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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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으로 감각과 시야를 뒤흔들어놨을 텐데, 마치 통하지 않는 것처럼 땅을 박차고 달리고 있다. 견제를 위해 날린 주문을 정면으로 박살 내며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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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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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클 이상의 주문을 읊을 시간을 벌기 위한 주문은, 단 1초의 시간도 벌어주지 못했다. 눈을 한번 깜빡였을 땐 이미 코앞까지 거리가 좁혀진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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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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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휘두른 검이 파우베의 장막을 박살 냈다. 장막이 박살 남과 동시에 거부의 장막이 척력을 발생시키나,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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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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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살이 붙잡힌 채,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 척력마저 이용해 내팽개친다. 본대에서 계속해서 멀어지며 궁지로 몰리고 있음을 파우베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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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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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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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거부의 장막은 이리 남발할 수 있는 주문이 결코 아니다. 보호 주문을 유지하는 데 서클을 소모하기에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요, 주문의 연산 능력 역시 소모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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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대부분의 마법사에게 있어 ‘보호 주문’은 만일을 대비할 보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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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겹으로 보호 주문을 두르고 다니는 건 연산 능력과 서클이 차고 넘치는 6환 이상의, 아크메이지나 돼야 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도 파우베가 거부의 장막을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몸에 두른 유물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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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환의 흑마법사 케팔론이 숨겨둔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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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하수로에 숨겨진 케팔론의 공방에는, 그런 유물들이 차고 넘친다. 고작 며칠 동안의 탐사로 손에 넣은 유물만 해도 이 정도이지 않은가. 이만한 유물은 마탑주의 수제자나 되어야 차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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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만에 이만한 유물. 그렇기에 파우베는 이 공방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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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곳에는 더 대단한 유물들이 한가득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쫓는 추격자들을 요격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시간을 번다면 이곳에서 경지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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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벌고, 경지를 높이고 이 도시를 이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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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본래 파우베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지금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달려드는 미친 칼잡이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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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리가 없을 텐데.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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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는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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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위험도는 세간에 사환(四環)이라 알려졌으므로, 잘 쳐줘 봐야 소드 시커급의 무인이 올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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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소드 시커급의 무인에겐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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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에, 숱한 유물에, 자신을 따르는 흑마법사와 시체 무리까지. 이만한 전력과 변수를 쥐고 있으면 소드 시커쯤이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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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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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거부 장막이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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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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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내던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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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면 몸에 두르고 있던 유물들은 거의 다 박살 나 있다. 거부 장막의 대가를 감당하고 박살 난 유물들이 한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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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횟수는 고작 해봐야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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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횟수마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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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는 이를 악물고 주문을 읊었다. 견제는 쓸모가 없다. 차라리 장막이 깨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 방을 먹인다. 파우베의 서클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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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클 마법, 핏빛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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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에서 뽑아낸 피가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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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치는 피가 번쩍이고 나진을 향해 사출됐다. 사출된 핏빛 광선이 지하수로를 붉게 물들였다. 3서클 주문 중에서도 발군의 위력을 지닌 주문답게, 그 파괴력은 견제를 위한 주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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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이이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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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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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광선에 스친 지하수로의 표면이 들끓고 김이 피어오르며, 광선에 닿은 수로의 벽면은 녹아내렸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입힐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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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은 마법이 각인된 단검으로 파훼했지만, 나진에겐 파훼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우베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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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간과한 것은 나진의 신체 능력과 반응속도, 그리고 그 동체시력이다. 파우베의 지팡이가 핏빛으로 빛나는 순간 나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에 핏빛 광선은 지팡이 끝에서 쏘아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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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출 경로를 예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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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앞서 몸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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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번뜩이는 순간 나진이 자세를 낮춘 채 땅을 박찼다. 나진의 머리 위로 광선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파우베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지팡이를 움직여 광선의 궤도를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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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의미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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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는 파우베의 지팡이 끝에 고정돼 있다. 지팡이의 움직임으로 핏빛 광선의 궤적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땅을 박차고 벽을 타고 달리며 나진은 또다시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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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카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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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장막이 하나 더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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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장막은 이제 세 번에 불과하다. 파우베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대로 가다간 패배하고 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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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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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를 쥔 건 분명 이쪽일 텐데, 오히려 저쪽에서 변수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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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대와는 이미 한참 떨어졌고 저쪽에서 자신을 도와주러 올 수도 없다. 마법의 제물로 쓸 시체들과의 거리도 멀어져 더는 핏빛 광선을 쏠 수도 없다. 이쪽에서 가진 이점이 차례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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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다. 죽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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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칼잡이가 온다. 자기 목을 베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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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뒤로 밀려나던 그녀가 발견한 것은 케팔론의 숨겨진 공방으로 향하는 통로다. 지금 이 통로를 사용했다간 흔적이 남고 결국 시설이 발각되고 말 테지만···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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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도망치며 벽을 지팡이로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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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마나가 벽을 휘감고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덜컥,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파우베가 통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녀가 통과하자마자 닫히려는 문을 향해 나진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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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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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으로 향하는 문이 굳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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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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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하고, 습하고, 기분 나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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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진은 감각이 곤두섬을 느꼈다. 이 공간에 퍼져있는 기운 자체가 흉흉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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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공방이 다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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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케팔론인가 뭔가 하는 놈이 숨겨둔 공방인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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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진이 파우베를 추격했다. 불 하나 없이 어둡지만, 나진의 눈에는 도망치는 파우베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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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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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찬 나진이 도망치는 파우베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슬슬 거부 장막이 만들어내는 척력에도 익숙해져, 나진은 집어던지는 게 아닌 파우베의 등을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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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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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지르며 파우베가 땅을 나뒹굴었다. 무언가에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파삭 소리를 내며 유물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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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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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의 수를 세고 있던 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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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검을 쥔 채 파우베를 향해 다가갔다. 승기는 이미 기울었고, 걸작의 지속시간도 끝나 감각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슬슬 지겨운 추격전을 끝낼 시간이리라 나진은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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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크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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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간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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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파우베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실성한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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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따라 들어오면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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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 역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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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웃음을 흘리며 지팡이를 내려찍었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로 고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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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환(四環)을 파우베가 모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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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가 내뿜는 빛과 함께 주변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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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드러난 풍경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생체실험의 흔적. 흑마법의 매개로 사용할 만한 소재들이 지척에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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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공방에 발을 디디면, 곱게는 못 뒤진단 이야기도 못 들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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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공방. 그들의 터전이자, 숱한 술식이 준비된 곳. 하물며 이곳은 칠환의 흑마법사였던 ‘케팔론’이 만든 공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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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어, 미친 칼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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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히죽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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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마나와 함께, 공방에 깔린 매개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네 개의 고리가 거칠게 회전하며 곧장 주문을 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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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와 유물의 보조를 받아 회전하는 서클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온다. 4서클 이상의 위력을 가진 거대한 주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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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회전하는 서클의 앞에서 나진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공방에 들어오면 불리하단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 불리함을 감안하고서도, 이길 수 있기에 곧장 파우베를 추격해 달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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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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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가 요동치는 소음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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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소음에 나진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나진이 귀 기울이는 것은 제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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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를 뽑긴 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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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시설로는 엑스칼리버의 빛을 가릴 수 없으니까. 고위 악마의 권능쯤은 돼야 잠깐이나마 빛을 가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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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고 멀린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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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검기를 가리기엔 충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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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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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나진이 검을 높게 들었다. 심상의 편린을 붙잡고, 그 심상을 거닐며 나진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심상이 조금 기이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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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의 중심을 이루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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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로 나타나는 강렬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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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하나여야 할 그것이, 나진의 심상에는 두 개가 존재했으니까. 하나는 낮은 곳에 걸린 순백색의 별이며, 남은 하나는 높은 곳에 걸린 백금색의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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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내가 불러왔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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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색의 별. 순백의 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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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하나는 남들 앞에서 꺼내선 안 됐으며, 기사로서 행동할 때는 순백색의 별이 더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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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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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신이 행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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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를 베어 가르는 것이며, 사특하고 사이한 것을 베는 일이다. 그런 일에 더 적합한 것은 순백의 검기가 아님을 나진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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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떠올리는 것은 가장 높게 뜬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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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불러낼 기회가 없었던 백금색의 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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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내면에 있던 멀린은 보았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별이 세차게 빛나더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감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멀린은 눈을 감았다. 별이 빨려 들어간 곳은 나진이 손에 쥔 한 자루의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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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의 형태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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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의 성질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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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색으로 타오르는 검기는 마치 별과도 같다.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을 동경한 소년이 그려낸 검기는 아름답고도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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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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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공방을 채우는 처연한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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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색의 검기를 마주한 순간 파우베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검에 대해 무지한 자라 한들 백금의 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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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오직 단 한 명에게만 허락된 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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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이 다루던 검기가 저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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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고, 또한 명료하다. 백금의 검기 앞에서 파우베는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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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과 사냥감이 뒤바뀌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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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자신은 사냥감에 불과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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