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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반사신경이 오히려 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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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수로의 꺾인 길에서 팔 하나가 뻗어 나왔을 때, 나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과연 나진의 반사신경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 의도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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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공이 꼭 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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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보았다. 뻗어 나온 손에 쥐고 있는 등불을. 등불의 안에서 싯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은 일렁였다. 일렁이는 불길이 나진의 망막에 맺힌 순간, 나진은 세상이 뒤집히는듯한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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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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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길이 그림자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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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림자가 나진의 망막에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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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났다. 가장 먼저 균형감각이 상실되고 두 번째론 눈으로 보는 풍경이 일그러졌으며, 세 번째로는 체내의 감각이 엉망이 됐다. 나는 지금 서 있는 건가? 쓰러졌나? 그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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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와 감각의 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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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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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마저 왜곡되진 않는다. 그것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닌 영혼의 울림이었으므로. 멀린의 목소리가 메아리침과 동시에 나진은 까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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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엉망이 된 가운데도 나진은 ‘무언가’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제 직감을 믿고 나진은 팔을 뻗었다.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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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바바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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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진 뼈 말뚝이 나진의 몸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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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굴을 노린 뼈 말뚝은 나진이 앞으로 뻗은 손에 가로막혔고, 땅을 박찬 덕에 급소에 꿰뚫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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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와 감각이 뒤엉킨 상태에서 보였다기엔 놀라운 움직임. 하지만 거기까지다. 주변을 보지 않고 도약한 나진이 지하수로에 흐르는 물길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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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그리고 쏴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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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물에 빠진 것과 거의 동시에 한 발의 화살이 쏘아졌다. 쏘아진 화살은 길을 가로막은 시체들을 모조리 터뜨리며 등불을 쥔 손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화살이 팔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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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 끼기긱. 끼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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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위로 펼쳐진 방어 주문이 화살을 붙잡았으니까. 이윽고 파챵, 소리를 내며 주문이 박살 났다. 단 한 발로 마법사가 두른 방어막을 박살 냈단 점은 놀라워할 만하나···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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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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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꺾인 길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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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푸르게 타오르는 등불을 손에 쥐고, 인골(人骨)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찬 여인. 이번 임무의 목표인 흑마법사 파우베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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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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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하고 끊어진 팔찌가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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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주문의 대가를 대신 짊어진 팔찌였다. 어지간한 소드 엑스퍼트의 검격 네 번은 버티는 팔찌가 일격에 박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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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만한 위력이지만 정작 파우베는 짧게 감탄할 뿐, 크게 당황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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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몸에 지닌 유물은 아직 한참 더 남아있었으니까.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파우베가 자신에게 쇠뇌를 겨누고 있는 레인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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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괜찮겠어? 벌써 동료가 수로에 빠졌는데. 구하러 안 가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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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그녀가 손에 쥔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그녀의 등 뒤로 고리가 떠올랐다. 파우베가 손에 든 등불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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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에 한 번 당한 채로 물에 빠지면··· 절대 못 올라올걸? 구하러 안 가면 익사할 텐데. 어서 물에 뛰어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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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고리. 뼈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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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에에엑,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 뼈 말뚝이 카프만에게 닿으려는 순간 카프만이 쇠뇌를 당겼다. 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깊게 눌러쓴 판초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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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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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진 화살이 뼈 말뚝을 박살 냈다. 흩뿌려지는 뼛가루를 가르며 나아간 화살이 파우베의 코앞에서 정지했다. 이번에 화살은 파우베의 방벽을 박살 내지 못했다. 정면에 집중된 방벽은 화살을 붙잡아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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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걸. 의리가 없는 남자는 별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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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끌끌 혀를 차며 지팡이를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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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를 어쩌나. 전위 없는 사수처럼 무력한 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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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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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고리가 파우베의 등 뒤로 떠올랐다. 그녀의 등 뒤로 나타난 것은 고리만이 아니다. 꺾인 길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눈동자가 뒤집힌 시체들과 흑마법사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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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에는 기사와 이단심문관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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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돌입했거나, 혹은 얼마 전에 흑마법사에게 당했다고 알려진 이들일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카프만은 혀를 찼다. 일이 귀찮아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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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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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 카프만 테오시스는 상황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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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二環)의 흑마법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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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환(四環)의 흑마법사 하나와, 그들이 매개로 부릴만한 시체가 스물이 넘어간다. 이것만으로도 ‘대비’하지 않은 상황에선 상대하기 어려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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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마저 소유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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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형태의 걸작. 불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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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걸작의 정확한 효과는 모른다. 하지만 저 등불이 일렁였을 때, 균형을 잃고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물에 빠진 그놈을 보아하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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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혹은 감각 교란 계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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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손에 쥔 등불의 불길은 거의 사그라들어 있었다. 서서히 불꽃이 크기를 불려 가는 걸 보아하니 보아하니 재충전 시간을 요구로 하는 유물이겠지. 거기까지 판단한 카프만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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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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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은 저들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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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냥감에 대한 파악을 마치지 못했으며 불리한 전장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카프만은 레인저였고, 레인저이기 이전에 군인이었다. 유리한 상황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싸운 일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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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상황을 뒤집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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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이 카프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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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이단심문관의 시체는 파우베를 지키고 서 있으며, 밀려드는 시체들의 뒤에서 파우베와 흑마법사들은 주문을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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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를 세우고 큰 마법을 준비한다. 흑마법사인 주제에 정석적인 방법을 쓰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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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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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며 카프만은 발리스타의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발리스타의 반동에 몸을 맡겼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시체들에겐 굳이 조준이 필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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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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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과 함께 카프만이 뒤로 크게 물러섰다. 물러서며 그는 발리스타를 놓았다. 쿠웅, 소리를 내며 발리스타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카프만의 손은 이미 판초의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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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초에서 빠져나온 손에 들린 것은 투척용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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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화살에 꿰뚫려 크게 수가 줄은 시체들 사이에 단검이 파박, 소리를 내며 박혔다. 단검에 머리가 꿰뚫려 고꾸라지는 시체들 사이로 시야가 트였다. 저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지팡이를 겨눈 파우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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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겨눈 지팡이 위로 핏방울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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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법이 무엇인지 카프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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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혈 학파 연금술사들, 그리고 사령술사들이 즐겨 쓰는 마법이다. 혈액을 매개로 한 마법. 대량의 혈액을 필요로 하기에 선혈 학파가 아니라면 쓰기 어려운 주문이나··· 흑마법사들에겐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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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자신의 피가 아니어도 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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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도, 화살도 맞지 않았음에도 쓰러져있는 시체들이 있다. 그들의 피부는 바싹 말라 있다. 마치 모든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시체에서 빠져나간 피가 파우베의 지팡이 위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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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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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클 마법, 핏빛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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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여진 이름 그대로의 주문이 온다. 지팡이의 끝에서 피의 광선이 쏘아졌다. 파괴적인 위력과 더불어 흑마법사들이 애용하는 주문이기에, 카프만은 저 주문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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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파훼법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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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이 자세를 낮춘 채 손가락을 튕겼다. 시체들에게 처박혀있던 단검이 새파랗게 빛났다. 카프만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마도구를 다룰 줄은 안다. 쓸 수 있는 무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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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단검에 새겨진 것은 ‘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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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빛나는 단검이 핏빛 광선을 굴절 시켰다. 이리저리 꺾이며 날아오는 광선을 피해 카프만이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팔이 향한 곳은 파우베의 곁에 서 있는 흑마법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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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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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달린 쇠뇌에서 화살이 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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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진 화살이 주문을 읊는 흑마법사를 방해한다. 그리 하여 벌어낸 몇초의 시간. 카프만이 등에 짊어진 대궁을 뽑아듦과 동시에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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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수만 번이고 반복한 동작. 매끄러운 동작과 함께 활시위가 한계까지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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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이이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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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절된 핏빛 광선이 지하수로의 벽을 녹이며 다시 돌아온다.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는 핏빛 광선. 저 광선이 제 등에 닿기 전에 수를 줄인다. 그런 생각으로 카프만이 당긴 활시위를 놓으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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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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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들렸다.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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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물살을 가르며 수로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수로에서 튀어나온 것은, 몸에 뼈 말뚝이 박힌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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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에는 이미 검기가 둘러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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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빙글, 몸을 돈 나진이 지하수로의 천장에 제 검을 박아 넣었다. 검을 벽에 꽂음과 동시에 검기를 거둔다. 그리하여 천장에 검을 고정한 나진이 천장에 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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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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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꽂혀있던 검에 다시금 검기가 휘감기며 빛이 새어 나온다.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나진이 천장을 박차고 파우베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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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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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카프만을 향해 겨누었던 지팡이를 휙, 꺾어 나진에게 겨누었다. 지하수로의 벽을 긁으며 돌아온 핏빛 광선이 나진을 향하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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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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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상황을 판단한 카프만이 활시위를 놓았다. 쏘아진 화살이 노리는 곳은 파우베의 지팡이.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광선은 화살을 녹이지만, 완전히 녹기 전에 화살은 지팡이의 끝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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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 겨누어지던 지팡이의 궤도가 틀어졌다. 핏빛 광선이 아슬아슬하게 나진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몸을 비튼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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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검기가 순백의 궤적을 그린다. 반월의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기가 파우베가 몸에 두른 방어 주문 위로 내려쳐졌다. 엑스퍼트의 검격은 족히 네 번은 막아서는 주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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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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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격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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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검기가 방어 주문을 쪼갰다. 거세게 요동치는 검기가 파우베의 목덜미에 닿으려는 순간, 쩌엉 소리를 내며 방어 주문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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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클 주문, 거부의 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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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한 척력에 나진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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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이 서 있는 곳까지 밀려난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곳엔 카프만이 어이없단 눈치로 나진을 흘겨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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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용케도 살아났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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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다는 중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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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물에 빠진 순간부터 검기를 두른 검을 벽에 박아 넣고, 무작정 물살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단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짧게 정보만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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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환각, 1분 30초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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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뒤틀린 순간부터 나진은 속으로 시간을 쟀다. 불그림자인지 뭔지 하는 저 걸작이 영향을 미치는 시간. 그 시간을 전달하며 나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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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는 뼈 말뚝이 박혀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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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숨을 참아야 했기에 호흡 또한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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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정보 없이 첫 조우에 치명상을 입은 까닭이다. 나진이 몸에 박힌 뼈 말뚝을 뽑아내며 호흡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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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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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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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까지 상대할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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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먼저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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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검을 늘어트린 채 눈앞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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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와 함께 모여있는 흑마법사 둘과, 그들이 사역하는 시체들. 이단심문관과 기사들의 시체를 보아하니 혼자서 상대하긴 다소 까다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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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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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파우베는 눈을 부릅뜬 채 나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부의 장막을 사용했음에도, 밀려나기 직전 나진의 검기는 기어코 파우베의 살갗을 할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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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서 흐르는 핏물.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짓누른 채 파우베가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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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욕설을 뇌까리며 제 허리춤에 달린 등불을 거칠게 두들겼다. 충전이 끝난 불그림자가 다시 한번 싯푸르게 일렁였다. 일렁이는 등불을 보며 카프만이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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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년은 제가 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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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의 귀에 나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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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놈들은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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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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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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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 정신 나간 소리냐고 되묻는 것보다 먼저 나진이 땅을 내려찍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수로의 바닥에 금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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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의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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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차고 나진이 내달렸다. 눈을 감고 있어 카프만은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숨을 헛삼켰다. 한순간 느껴졌던 기척이 너무나도 사나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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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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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차고 나진은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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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끌어올린 마나와 함께 질주하는 나진의 속도는 소드 시커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나진의 모습을 흑마법사들은 두 눈으로 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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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나진이 그들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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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의 시체는 나진의 움직임에 뒤늦게 나마 반응했다. 그들이 나진을 향해 검을 내려쳤고, 파우베가 나진을 향해 등불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나진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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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으나 기척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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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내디딘 속도를 그대로 살려,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거부의 장막이 박살 나며 나진의 몸을 밀어내려 하는 순간 나진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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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장막의 척력은 ‘두 번’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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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장막을 박살 낸 무기에 집중해 즉각적으로 발생하고, 두 번째 척력은 잠깐의 틈을 두고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그 사실을 멀린에게 들었고 방금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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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했기에 나진은 그 틈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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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했기에, 한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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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을 깨트린 검과, 검을 쥔 왼손이 뒤로 휙 젖혀졌지만 오른손은 남아있다. 나진이 앞으로 뻗은 오른손이 파우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척력에 나진의 몸이 뒤로 떠밀리는 순간 파우베의 목이 당겨진 로브에 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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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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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트러진 호흡. 흐트러진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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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틈을 나진이 놓칠 리가 없다. 들어 올린 발로 땅을 내려찍으며 나진이 팔을 휘둘렀다. 자신을 밀어내는 척력마저 이용해 나진이 파우베를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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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베가 저 멀리 내던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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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조하는 흑마법사와, 그녀를 지키는 시체들과 거리가 벌어진다. 뒤늦게 시체 기사가 검을 휘두르고 이단심문관이 창칼을 휘두르지만··· 이미 그때 나진은 땅을 박차고 파우베에게 내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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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파우베를 향해 나진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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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진은 그 두 눈을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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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채 달려드는 나진을 바라보며 파우베가 이를 악물었다. 아예 눈을 감고 싸울 생각인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라. 그녀가 제 목덜미를 매만지며 등불을 크게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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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림자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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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 정도로 파훼 된다면, 걸작이라 불릴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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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당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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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저 몸통을 핏빛 광선으로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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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파우베의 입가에 웃음이 맺히는 순간이다. 나진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곤 일렁이는 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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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릅 뜬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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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는 백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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