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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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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대해 나진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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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는 기사보다 더럽고 어두운 일을 수행한다는 것 정도의 기초적인 지식. 그들이 암행, 요인 암살, 함정술, 매복에 탁월하단 정보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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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는 까다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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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 더 덧붙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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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까다롭지. 뭐라 말하긴 힘든데 레인저들은 까다로워. 그 왜, 유명한 격언 하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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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싸움이 경지로 구분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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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대부분의 상황에선 개소린데, 레인저들을 상대할 때는 개소리가 아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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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과 오펜에게서 들었던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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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은 사냥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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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는 사냥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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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이 짐승을 상대할 때 정면에서 상대하냐? 멧돼지하고 눈을 마주치고 정면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그냥 또라이 새끼지, 사냥꾼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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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은 철저하게 ‘사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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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습성, 특징, 움직임, 경로, 버릇, 아주 사소한 약점까지 꿰차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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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손가락으로 나진의 관자놀이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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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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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뇌를 갈기는 시늉을 하며 이반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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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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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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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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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들려오는 장전 소리에 나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쇠뇌에 화살을 걸고 있는 카프만이 있었다. 쇠뇌가 자신에게 겨누어져 있진 않지만, 나진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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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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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뇌가 독특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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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괜스레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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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쇠뇌는 처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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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원래는 성벽에나 달아두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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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이 손에 든 것은 대형 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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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 고정시켜 사용하는 요격용 발리스타와 비슷한 크기였지만, 카프만은 별 무겁지도 않다는 듯 쇠뇌를 어깨에 걸친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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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근력으론 안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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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한 크기의 쇠뇌를 지지대에 고정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화살을 쏘는 장면이 나진의 머릿속엔 잘 그려지지 않았다. 반동 때문에 뒤로 밀려나거나 자빠질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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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간은 불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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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태연하게 행하는 것이 초인이고, 소드 시커는 초인에 근접한 이들이다. 그들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무인이라면 하기야, 어려울 것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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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카프만은 말없이 수로를 걸었다. 우선 지하 수로의 깊은 곳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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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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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에 물 흐르는 소리는 들렸지만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둘 모두 기척을 지우는 데는 도가 튼 까닭이다. 나진은 앞장서 걷고 있기에, 뒤에서 제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카프만의 시선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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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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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유심히 지켜보던 카프만은 짧게 물었다. 대뜸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나진이 걸음을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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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걷지. 걸으면서 이야기해도 되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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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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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암부 소속이었냐고 물었다. 교단의 암부와 비슷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길래. 비슷··· 아니군. 그놈들보다 더 나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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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은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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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제법 많아 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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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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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은 불명. 기록은 하나도 없음. 나이도 이름도 심지어 경지까지 불분명하지. 캄브리아 재단의 우두머리쯤 되는 귀족이 보증을 서줬기에 망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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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던 카프만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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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면 제법 고생 좀 했을 거야. 이거 경험담이다. 나도 신분을 숨기고 들어왔다가 고생 좀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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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렇게 다 까발려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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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아보잖냐. 내가 누구인지. 그렇게 말하며 카프만은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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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바라고 던지는 말은 아니니, 대답하려고 머리 굴릴 필요 없다. 그냥 꼰대 아저씨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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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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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지. 네가 내 나이 돼봐라. 말이 많아져. 굳이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는데 괜히 잡담을 나누고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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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수로는 끝없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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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해서 그런가, 괜히 사람이 감수성이 풍부해져서 그런가··· 어떨 때는 의뢰 대상이랑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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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의 깊은 곳까진 아직 거리가 제법 남아 있었기에, 카프만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것은 소통을 바라는 대화라기보단 차라리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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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지거든. 아, 이놈은 어떻게 살아왔나. 이놈은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이 지경까지 왔나. 그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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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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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이 나진에게 쇠뇌를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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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쇠뇌를 겨누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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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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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미지. 그래도 뒤지기 전에 남길 말이 있으면 들어줘야 할 거 아니냐? 아무리 거지 같이 살았어도 사람이라면 유언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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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은 나진의 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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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스레 쇠뇌를 겨누었음에도, 허리춤에 얹어진 나진의 손은 검을 반쯤 뽑아 들고 있었다. 여기서 쇠뇌를 당긴다면? 곧장 대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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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빠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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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만은 웃음을 흘리며 쇠뇌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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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흑마법사는 예외이니 걱정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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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왜 예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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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걸 묻는군. 내가 말했잖아. 사람이라면 유언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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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눈을 깜빡였고 카프만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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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들은 사람이 아니야. 그건 짐승 새끼들이지. 은혜도 모르는 개좆같은 짐승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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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어뱉듯이 카프만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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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 느껴지는 목소리였고, 깊은 원한이 묻어나오는 중얼거림이었다. 흑마법사와 얽혀서 좋지 못한 일을 당했던 모양이지. 나진은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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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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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철창이 입구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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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라. 뒤는 내가 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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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지하수로의 최심부에 도달했다. 비틀어 열려있는 철창을 지나쳐 걸으면서 나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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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넓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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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지하수로라 그런가, 그 크기가 끔찍하게도 넓다. 어디 그뿐이던가. 이 지하수로는 과거 이 도시가 칠환의 흑마법사 ‘케팔론’에게 점거당했을 때 만들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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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이 지하수로는 흑마법 연구시설과 재단을 숨기고, 케팔론과 그 제자들이 몸을 숨기고 농성하기 위해 설계됐단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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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지하수로의 구조는 거미줄이나 개미굴을 연상케 하는 미로와도 같았다. 이런 미로에서 흑마법사를 어느 세월에 찾는단 말인가. 흐르는 물길과 습한 공기가 흔적을 지워버리기에 평소에 쓰던 추적술 역시, 이 공간에선 쓸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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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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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리 고민했지만, 그 고민이 길게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굳이 흔적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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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익··· 지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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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는 소리 너머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나진이 바라봤다. 그곳에는 경비병이 있었다. 복장은 도시의 경비병의 것이나, 그 살갗은 푸르게 터 있었고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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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병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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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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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마법. 제국에선 금기로 여겨지는 마법이며, 금기를 당연하게도 어기는 이들은 하나밖에 없다. 흑마법사. 아니나 다를까 시체의 너머에 로브를 눌러쓴 흑마법사가 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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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하고 나진이 검을 뽑아 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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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들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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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로를 타고 흐르던 물길이 부글거리더니, 물속에서 시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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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에게 숨거나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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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이 지하수로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양, 쳐들어오는 이들을 요격하기를 선택했다.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의도야 둘째 치고··· 시체 무리를 바라보는 나진과 카프만의 뇌리엔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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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쉬워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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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찾아 헤매는 수고는 덜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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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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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경험해 본 마법이라곤, 지하도시의 연금술사인 약쟁이 하칸이 쓰던 피를 매개로 한 마법뿐이다. 그마저도 굳이 따지자면 연금술의 계통이었기에 마법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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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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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마법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진은 움직이는 시체들의 너머를 보았다. 사령술로 되살려낸 시체는 어디까지나 전위일 뿐이다. 저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는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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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마나가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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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마나가 허공에서 뭉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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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가 뭉쳐지며 나타나는 것은 두 개의 고리다. 마법사들이 서클, 혹은 환(環)이라 부르는 것들. 고리에 새겨진 기이한 문자들이 반짝인 순간이다. 나진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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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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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가르며 쏘아진 것은 뼈로 이루어진 말뚝이다. 인간의 척추뼈를 닮은 말뚝이 콱, 하고 방금까지 나진이 서 있던 위치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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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사령학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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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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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부리고, 시체들의 신체를 공양해 마법을 쓰는 아주 전형적인 네크로맨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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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나진이 자세를 잡았다. 마법이 어떤 식으로 쏘아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기를 울리는 마나의 흐름이 눈에 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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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공격 수단은 뼈 말뚝. 저기 뼈 뽑아대는 거 보이지? 네 앞길을 가로막은 건 전위인 동시에 저놈들이 부리는 흑마법의 매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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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에 검기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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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올 마법은,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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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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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로 검을 당긴 채 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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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늪이네.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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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찬 순간 거의 동시에 바닥에서 뼈 말뚝이 솟구쳤다. 검사의 접근을 차단하는 주문. 지형을 함정으로 뒤바꿔 발을 묶고, 먼 거리에서 요격하는 아주 정석적인 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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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고 있다면 대응하긴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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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참과 동시에 나진이 지하수로의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소드 시커에 근접한 육체 능력과 타고난 균형 감각은 벽을 타고 달림에도 땅을 박차는 것과 거의 속도 차이가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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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바바바바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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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뼈 말뚝이 수로의 벽에도 튀어 오르지만, 역시나 늦다. 말뚝이 솟구쳤을 때 나진은 이미 시체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있었다. 흑마법사가 급히 지팡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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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이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투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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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폭발하며 그 뼛조각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사령학파의 흑마법사들은 그 매개로 삼을 시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까다로워진다. 이만한 숫자의 시체가 있다면 전사 하나쯤을 갈아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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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터뜨리며 흑마법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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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천장에 검을 박아 넣은 채 거꾸로 매달려있는 나진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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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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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동체시력으론 나진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고, 그가 주문을 발현할 때 나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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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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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진의 귓가에 울리는 것은 멀린의 목소리. 그 눈으로 보는 것은 마나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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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언제 쏘아질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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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마법의 형태를 멀린이 속삭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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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달리 말하자면 상대가 휘두르는 검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궤적’을 그리며 ‘어느 순간’에 다가올지 모두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알고 있다면 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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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에게 질 일이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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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나진이 무릎을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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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뜻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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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낮은 마법사에게 ‘몰라서’ 당할 일은 없다고 했잖아. 뭐··· 내 도움이 없어도 됐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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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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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천장을 박찼다. 흑마법사를 향해 사선으로 쏘아지는 나진은 마치 한 발의 화살과도 같다. 흑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뼈 말뚝을 쏘아보고, 시체들을 끌어들여 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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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공중에서 검을 휘두르며 몸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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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에 맺힌 검에 닿은 순간 뼈 말뚝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회전하는 검이 스친 순간, 길을 가로막은 시체들은 모조리 갈라졌다. 돌벽은 물론이고 강철조차 베어가르는 검기를 시체 따위가 막아설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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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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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트인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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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흑마법사의 코앞에 발을 디딘 순간, 흑마법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사에게 접근을 허용한 순간부터 마법사에겐 불리한 전장이 된다. 그리고 불리함을 뒤엎을 수단이 흑마법사에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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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이 흑마법사의 손목을 갈랐다. 지팡이를 쥔 손목을 날려버리며 나진이 손을 뻗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손가락, 지팡이, 혹은 입이라고 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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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음절과 회로에 구애받으니까. 그거 다 막아버리면 마법 못 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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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지팡이는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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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입. 나진이 흑마법사의 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그 입을 닥치게 만든 다음, 나진은 흑마법사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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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제압된 흑마법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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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든 말든 나진은 옆쪽을 흘겨봤다. 이쪽을 반기던 흑마법사는 둘이었다. 하나는 나진이 제압했고, 남은 하나는 어떻게 됐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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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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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처박혀있는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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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부에는 거대한 화살 한 발이 박혀있었다. 복부를 관통하고 벽에 깊게 박힌 화살. 그 화살에 꿰뚫려 있는 흑마법사는 마치 박제된 곤충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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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쏘아졌을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노라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시체들이 가득했다. 마치 몸이 터져버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화살에 꿰뚫린 흔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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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발의 화살로 만들어냈다기엔 섬뜩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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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날아온 궤적의 끝에는 무표정한 카프만이 서 있었다. 그가 화살 한 발을 더 장전하며 걸음을 옮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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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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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로에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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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오른쪽으로 꺾인 길에서 소리는 들려왔다. 길이 꺾여있기에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벽에 비춘 그림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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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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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라도 손에 들고 있는지 그림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제압해 둔 흑마법사를 던져버리며 나진이 그림자를 향해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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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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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길에서 팔이 뻗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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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감춘 채 그림자의 주인은 팔만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팔에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 푸른색으로 타오르는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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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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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불꽃이 나진의 망막에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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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꽃. 일렁이는 등불. 그리고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지하수로의 벽에 드리운 그림자는 불꽃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불의 그림자가 수로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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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화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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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림자가 나진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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