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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나무를 날려버리고 만들어낸 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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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한가운데임에도 나무 한 그루 없이 텅 비어있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그리핀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가 들어 올린 검 위로 붉은 나뭇가지가 하늘 높이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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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시나무 형상의 검기(劍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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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한가운데에 붉은 가시나무가 뿌리내렸다. 검을 들어 올리는 그리핀의 동작은 느릿했지만, 그 움직임에 빈틈은 없었다. 빈틈을 찌르고 들어가려던 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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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다. 빈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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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리핀이 보여줬던 것과는 무언가 다름을 나진은 직감했다. 기초적인 검술이 아니다. 한 명의 무인이 한평생 갈고닦아온 무술. 그리핀의 자세에선 그런 기세와 정교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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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직감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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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뒤로 물러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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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술을 펼치는 상대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것은 분명한 악수(惡手)다. 하지만, 저 검을 받아낼 수단이 없다면 악수를 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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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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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내려찍으며 제 몸을 멈춰 세웠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기울었지만, 나진은 기어코 땅을 박차고 뒤로 도약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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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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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시나무가 가지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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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휘둘러질 적 들려온 소리는 ‘서걱’ 과 같은 절삭음이 아니다. 쩌억, 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어오는 바람과 솟구치는 흙먼지.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갈라져 있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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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나진이 서 있던 위치가, 그리핀의 주변 다섯 걸음 안팎의 땅에 가시나무의 형태로 검흔(劍痕)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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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리핀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내린 채 그가 가시나무를 휘둘렀다. 그 모습은 검을 휘두르는 기사라기보단, 거대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 휘두르고 있는 거인을 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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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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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갈라진다. 그리핀이 손에 쥔 검은 120cm 남짓의 롱소드이나, 붉은 가시나무의 검기를 두른 순간부터 그 길이와 폭은 세 배가 넘어간다. 그러나 검기에 무게는 없고 반발력만이 존재하기에 그 속도는 롱소드를 휘두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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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부터는, 상식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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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읽었던 그 문장을 나진은 지금 몸소 체감해야만 했다. 길이만 3m가 넘어가는 대검이, 롱소드를 휘두르는 것 같은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다. 뻗어 나오는 저 가지에 닿는 순간 살갗은 물론이고 뼈마저 썰려 나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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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구르고, 땅을 박차고, 눈을 부릅떠 동작을 미리 읽어내며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회피만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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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피하지 못하는 공격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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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으로 휘둘러지는 붉은 가시나무를 향해 나진이 제 검을 들이밀었다. 한계까지 검기의 출력을 올렸음에도, 그리핀의 검기와 맞부딪치는 순간 나진의 검기는 급속도로 깎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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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 가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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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력에서 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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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에서 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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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강하게 움켜쥐었거늘, 거세게 흔들리는 칼자루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만 같다. 우득, 하고 손가락이 꺾였다. 받아낼 수 없다. 이대로 있다간 열 손가락이 모조리 꺾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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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득, 나진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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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발을 뗀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뜬 채 옆으로 떠밀렸다. 받아낼 수 없다면, 차라리 밀려서 날아가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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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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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내던져진 나진이 간신히 몸을 구르며 일어섰다. 팔이 저리고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태반이 깎여나간 검기는 이젠 세찬 빛을 내지 못한다. 다 타들어 간 횃불처럼 짧게 점멸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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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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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용량 이상의 마나를 받아내고 몸을 채찍질하며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나진이다. 엉망이 된 체내는 비명을 지르고, 전투 시작과 동시에 길게 베인 어깨에선 검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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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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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렸고, 상대는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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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달콤한 속삭임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아라. 뽑는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그 속삭임에 나진은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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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자신이 다루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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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힘에 의존하고, 위기에 몰릴 때마다 꺼내 든다면 성장할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이런 자리에서 뽑는다면 당장은 넘어가더라도 더 큰 시련이 다가올 뿐이겠지. 나진은 숨을 가다듬고 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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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굴려라. 답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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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강인한 기사에게서 살아남을 방법을 떠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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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부족한 것은··· 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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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요소들은 어떻게든 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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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검을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검기의 차이. 그 차이를 메꿀 방법이라 해보아야 결국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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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心象), 마음에 새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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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에 담을 구체적인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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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지 못하면 죽는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진은 검을 고쳐잡았다. 하지만, 어떻게? 검기에 심상을 담는다는 애매모호한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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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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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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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침묵하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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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할지, 넌 이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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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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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미 계기를 경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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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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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와 전투 이후부터 네가 뽑아낼 수 있었던 순백색의 검기, 그게 심상의 편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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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깊은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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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진의 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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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란 곧 마음에 그리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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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감고 있던 눈을 뜨면, 멀린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나진의 내면··· 즉 심상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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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뇌리에 강하게 남은 기억, 닮고 싶은 것, 손에 넣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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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멀린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지평선 저 너머까지 이어진 어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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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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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눈에는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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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심상에 자리 잡기 시작한 풍경들이, 악마 기사와의 전투 이후로 윤곽을 잡기 시작한 풍경들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그 풍경 사이를 거닐며 멀린은 나진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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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점은 어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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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음에 답하듯 풍경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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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만이 잡혀있던 풍경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지하도시의 풍경이다. 어두컴컴한 지하도시의 모습. 멀린이 거닐던 곳은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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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해봐야 열 걸음 남짓한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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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좁은 범위에 새겨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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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넓은 공간을 다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선 안 되는 법이다. 멀린은 계속해서 나진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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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지? 별, 기사, 긍지, 명예. 네 뇌리에 자리 잡은 단어들을 곱씹어. 그것들을 풍경으로 그려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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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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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했지. 가장 낮은 곳에서도 빛나던 기사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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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빛은 지하도시의 한가운데에 떠올랐다. 그것은 순백색의 빛이다. 긍지를 잃지 않았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빛날 수 있었던 어느 기사를 상징하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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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저 빛에게 맹세했어.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걸겠노라고. 그래,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는 별을 꿈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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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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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빛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반짝였다. 가장 낮은 곳에 걸린 순백의 별과, 가장 높은 곳에 걸린 백금색의 별. 나진의 심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별을 바라보며 멀린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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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보이지 않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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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의 풍경이 뚜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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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잃지 않은 기사와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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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뜬 순백색의 별이 세차게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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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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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게 뜬 백금색의 별이 찬란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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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 손에 들린 것은 검이야. 비록 엑스칼리버는 아니지만 그게 중요할까? 너는 엑스칼리버에게 선별 받았어. 선별의 검의 인정을 받았지. 그리고 네 내면에는 빛나는 별이 두 개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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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고 멀린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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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그리며 휘두르면 그게 곧 별의 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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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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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앞에 놓인 새하얀 별. 세차게 점멸하는 별이, 한순간 크게 반짝였다. 한순간의 섬광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모조리 증발했다. 하지만 그것이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멀린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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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풍경은 나진의 내면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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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 위로 자리를 옮겨갔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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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나진의 눈으로 보는 세상. 멀린은 나진의 시야를 통해 나진이 쥐고 있는 검을 보았다. 검 위로 피어오르는 순백의 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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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기는 어딘가 별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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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별을 닮은 검기가 새하얀 입자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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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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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쉽사리 결판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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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이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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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아르타 트리가디언의 검술까지 꺼내 들었거늘 예상과는 달리 싸움은 늘어져만 갔다. 온갖 수단을 써가며 청년은 검을 피해내고 있다. 피를 흘리고, 제 몸을 망가트려 가며 시간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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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패배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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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간이 끌리면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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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리핀에게 있어 패배나 다름없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군이 내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기사다움이었으니까. 그리핀은 들어 올린 발을 내려찍으며 나진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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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판을 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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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리핀은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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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심상의 근본이 되는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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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정원에 놓인 앙상한 가시나무다. 그리핀이 어렸을 때부터 가시나무는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핀을 종자로 삼았던 기사는 저 나무를 아르베니아의 수호목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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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킨 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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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를 바라보며 그리핀은 검을 휘둘렀다. 그간 세월이 흘러 모시던 스승은 은퇴하고, 그리핀은 기사가 되었으며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라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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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르베니아 수호목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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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호목을 보고 수십 년간 검을 휘둘러왔기에 그리핀의 내면에도 가시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제 주인이 무엇을 바라던 다만 이행하는 우직한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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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리핀이 생각하는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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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 그리핀의 검을 타고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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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크기를 불린 거목, 이젠 5m가 넘어가는 가시나무를 그리핀은 휘둘렀다. 도망칠 곳은 없다. 조금 전처럼 밀어내며 도망칠 수도 없게끔 그리핀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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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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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도망치던 나진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멈춰 선 나진은 난데없이 검을 제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 저 동작을 그리핀은 알고 있다. 몇몇 기사들, 혹은 아탕가의 기사들이 제 검기를 끌어올리기 전에 습관처럼 취하는 자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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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례(劍禮)를 올려 마음가짐을 다잡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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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례를 마친 순간 나진의 검 위로 새하얀 입자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검기였으나, 무언가 다름을 그리핀은 느꼈다. 다 사그라들었던 나진의 검기가 다시 빛을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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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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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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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입자가 나진의 검을 중심으로 만개했다. 마치 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그 순간 그리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단순한 빛무리가 아닌 ‘형태를 갖춘’ 검기. 아직 그 형태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하지만 저곳에 청년의 심상이 담겼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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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의 편린에 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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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상황, 생과 사를 오가는 줄타기 속에서 나진은 기어코 닿지 못한 영역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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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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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시나무와 새하얀 별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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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나진의 검은 속절없이 밀렸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입자를 흩뿌리며 나진의 검이 붉은 가시나무의 가지를 베어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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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 중 하나가 꺾였을 뿐이다. 하지만, 베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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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는 것을 확인한 나진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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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할 수단이 생겼다는 것. 그것은, 여태껏 쓰지 못했던 수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진이 땅을 박차고 그리핀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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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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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의 가지를 쳐내고, 때로는 피를 흘리며 나진은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몇번의 피를 쏟아내야 했지만 나진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진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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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경험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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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이제 막 편린에 닿았지만, 그리핀은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지 이미 십 년이 넘은 실력자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리핀은 착실히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우위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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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에 깃든 심상은 서서히 증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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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세는 날카롭지만, 아직 심상을 담은 검을 휘두르는 법을 모르는 애송이다. 경험의 차이가 곧 승패를 갈랐다. 나진은 분전했지만 코앞에 닿았을 때 그 칼날에는 더는 검기가 맺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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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다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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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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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며 그리핀이 검을 휘둘러 끝장을 내려는 순간이다. 쐐에에엑! 귓가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눈을 부릅뜬 그리핀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으나 터엉! 소리를 내며 검과 함께 그리핀이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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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꽂힌 화살을 바라보노라면, 범인의 근력으로는 당길 수 없는 대궁(大弓)에 걸릴만한 화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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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트레바체 후작가의 유명한 기사다.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른, 대궁을 다루는 기사. 그자가 쏘아낸 화살이 분명했다. 뒤이어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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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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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워지는 군마. 울려 퍼지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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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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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를 타고 도착한 것은 후작가의 기사들이다. 그들이 그리핀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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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의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이었고, 이는 곧 그리핀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리핀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검을 내렸다. 후작가의 기사들까지 온 마당에 전투를 속행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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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검을 내리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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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무심코 눈앞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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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피 칠갑을 한 채 조금 전 자세 그대로 굳어있는 청년이 있었다. 검을 휘두르려는 자세 그대로 멈춰서 숨을 내뱉고 있는 청년. 그 자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리핀은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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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미래시도, 상대의 움직임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재능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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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진의 자세를 알아볼 만큼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검의 교단의 검술이었고 가까운 거리에서의 반격기에 최적화된 검술이었다. 검기가 맺히지 않는 칼자루를 후려쳐 자세를 무너트리는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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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검기가 꺼질 것을 예상하고 반격을 위한 자세를 잡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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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고 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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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청년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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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리핀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승리를 거머쥐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패배하진 않겠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청년에게선 그런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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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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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말없이 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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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만났다곤 하나, 저 청년의 투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었으므로. 여전히 자세를 풀지 않는 나진을 향해 그리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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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패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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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진이 검을 내렸다. 그리핀은 한숨을 내쉬곤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젠 검이 아닌 세 치 혀와 명분으로 싸워야만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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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전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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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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