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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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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나무를 날려버리고 만들어낸 공터.

숲의 한가운데임에도 나무 한 그루 없이 텅 비어있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그리핀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가 들어 올린 검 위로 붉은 나뭇가지가 하늘 높이 뻗어나갔다.

붉은 가시나무 형상의 검기(劍氣).

숲의 한가운데에 붉은 가시나무가 뿌리내렸다. 검을 들어 올리는 그리핀의 동작은 느릿했지만, 그 움직임에 빈틈은 없었다. 빈틈을 찌르고 들어가려던 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이지 않는다. 빈틈이.

지금까지 그리핀이 보여줬던 것과는 무언가 다름을 나진은 직감했다. 기초적인 검술이 아니다. 한 명의 무인이 한평생 갈고닦아온 무술. 그리핀의 자세에선 그런 기세와 정교함이 느껴졌다.

나진의 직감이 외쳤다.

당장 뒤로 물러서라고.

큰 기술을 펼치는 상대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것은 분명한 악수(惡手)다. 하지만, 저 검을 받아낼 수단이 없다면 악수를 둬야만 했다.

쿵.

나진이 땅을 내려찍으며 제 몸을 멈춰 세웠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기울었지만, 나진은 기어코 땅을 박차고 뒤로 도약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그리핀이 검을 휘둘렀다.

붉은 가시나무가 가지를 뻗었다.

검이 휘둘러질 적 들려온 소리는 ‘서걱’ 과 같은 절삭음이 아니다. 쩌억, 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어오는 바람과 솟구치는 흙먼지.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갈라져 있는 땅이다.

조금 전 나진이 서 있던 위치가, 그리핀의 주변 다섯 걸음 안팎의 땅에 가시나무의 형태로 검흔(劍痕)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리핀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내린 채 그가 가시나무를 휘둘렀다. 그 모습은 검을 휘두르는 기사라기보단, 거대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 휘두르고 있는 거인을 보는 것만 같다.

쩌억!

땅이 갈라진다. 그리핀이 손에 쥔 검은 120cm 남짓의 롱소드이나, 붉은 가시나무의 검기를 두른 순간부터 그 길이와 폭은 세 배가 넘어간다. 그러나 검기에 무게는 없고 반발력만이 존재하기에 그 속도는 롱소드를 휘두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소드 시커부터는, 상식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읽었던 그 문장을 나진은 지금 몸소 체감해야만 했다. 길이만 3m가 넘어가는 대검이, 롱소드를 휘두르는 것 같은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다. 뻗어 나오는 저 가지에 닿는 순간 살갗은 물론이고 뼈마저 썰려 나갈 게 분명했다.

바닥을 구르고, 땅을 박차고, 눈을 부릅떠 동작을 미리 읽어내며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회피만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기어코 피하지 못하는 공격이 온다.

횡으로 휘둘러지는 붉은 가시나무를 향해 나진이 제 검을 들이밀었다. 한계까지 검기의 출력을 올렸음에도, 그리핀의 검기와 맞부딪치는 순간 나진의 검기는 급속도로 깎여나갔다.

카, 가가가가가각!

반발력에서 밀린다.

밀도에서 밀린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거늘, 거세게 흔들리는 칼자루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만 같다. 우득, 하고 손가락이 꺾였다. 받아낼 수 없다. 이대로 있다간 열 손가락이 모조리 꺾이고 만다.

으득, 나진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땅에서 발을 뗀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뜬 채 옆으로 떠밀렸다. 받아낼 수 없다면, 차라리 밀려서 날아가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니까.

쩌엉!

저 멀리 내던져진 나진이 간신히 몸을 구르며 일어섰다. 팔이 저리고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태반이 깎여나간 검기는 이젠 세찬 빛을 내지 못한다. 다 타들어 간 횃불처럼 짧게 점멸할 뿐이었다.

“쿨럭, 컥.”

허용량 이상의 마나를 받아내고 몸을 채찍질하며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나진이다. 엉망이 된 체내는 비명을 지르고, 전투 시작과 동시에 길게 베인 어깨에선 검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렀다.

상황은 최악이다.

궁지에 몰렸고, 상대는 건재하다.

나진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달콤한 속삭임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아라. 뽑는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그 속삭임에 나진은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으니까.

아직 자신이 다루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힘.

그런 힘에 의존하고, 위기에 몰릴 때마다 꺼내 든다면 성장할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이런 자리에서 뽑는다면 당장은 넘어가더라도 더 큰 시련이 다가올 뿐이겠지. 나진은 숨을 가다듬고 사고했다.

머리를 굴려라. 답을 찾아라.

저 강인한 기사에게서 살아남을 방법을 떠올려라.

‘내게 부족한 것은··· 검기.

다른 요소들은 어떻게든 메꿀 수 있다.

상대의 검을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검기의 차이. 그 차이를 메꿀 방법이라 해보아야 결국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심상(心象), 마음에 새긴 풍경.

검기에 담을 구체적인 형상.

떠올리지 못하면 죽는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진은 검을 고쳐잡았다. 하지만, 어떻게? 검기에 심상을 담는다는 애매모호한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그 순간이다.

줄곧 침묵하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넌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넌 이미 계기를 경험했어.”

멀린은 말했다.

“악마 기사와 전투 이후부터 네가 뽑아낼 수 있었던 순백색의 검기, 그게 심상의 편린이야.”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깊은 어둠.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진의 내면이다.

“심상이란 곧 마음에 그리는 풍경.”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뜨면, 멀린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나진의 내면··· 즉 심상의 풍경이다.

“네 뇌리에 강하게 남은 기억, 닮고 싶은 것, 손에 넣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이야.”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멀린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지평선 저 너머까지 이어진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멀린의 눈에는 보였다.

나진의 심상에 자리 잡기 시작한 풍경들이, 악마 기사와의 전투 이후로 윤곽을 잡기 시작한 풍경들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그 풍경 사이를 거닐며 멀린은 나진에게 속삭였다.

“네 시작점은 어땠지?”

그 물음에 답하듯 풍경이 요동쳤다.

윤곽만이 잡혀있던 풍경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지하도시의 풍경이다. 어두컴컴한 지하도시의 모습. 멀린이 거닐던 곳은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변해 있었다.

고작 해봐야 열 걸음 남짓한 범위.

아주 좁은 범위에 새겨진 풍경이다.

이 드넓은 공간을 다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선 안 되는 법이다. 멀린은 계속해서 나진에게 속삭였다.

“네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지? 별, 기사, 긍지, 명예. 네 뇌리에 자리 잡은 단어들을 곱씹어. 그것들을 풍경으로 그려내 봐.”

빛이 반짝였다.

“너는 말했지. 가장 낮은 곳에서도 빛나던 기사가 있었다고.”

반짝이는 빛은 지하도시의 한가운데에 떠올랐다. 그것은 순백색의 빛이다. 긍지를 잃지 않았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빛날 수 있었던 어느 기사를 상징하는 빛이다.

“너는 저 빛에게 맹세했어.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걸겠노라고. 그래,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는 별을 꿈꿨지.”

또 하나의 빛이 떠올랐다.

떠오른 빛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반짝였다. 가장 낮은 곳에 걸린 순백의 별과, 가장 높은 곳에 걸린 백금색의 별. 나진의 심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별을 바라보며 멀린은 미소 지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곳.”

지하도시의 풍경이 뚜렷해졌다.

“별을 잃지 않은 기사와의 맹세.”

낮게 뜬 순백색의 별이 세차게 점멸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

높게 뜬 백금색의 별이 찬란히 빛났다.

“그리고, 네 손에 들린 것은 검이야. 비록 엑스칼리버는 아니지만 그게 중요할까? 너는 엑스칼리버에게 선별 받았어. 선별의 검의 인정을 받았지. 그리고 네 내면에는 빛나는 별이 두 개나 있잖아.”

그러니까, 하고 멀린은 속삭였다.

“별을 그리며 휘두르면 그게 곧 별의 검이야.”

멀린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앞에 놓인 새하얀 별. 세차게 점멸하는 별이, 한순간 크게 반짝였다. 한순간의 섬광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모조리 증발했다. 하지만 그것이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멀린은 알았다.

저 풍경은 나진의 내면이 아닌.

나진의 검 위로 자리를 옮겨갔을 뿐이니까.

멀린은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나진의 눈으로 보는 세상. 멀린은 나진의 시야를 통해 나진이 쥐고 있는 검을 보았다. 검 위로 피어오르는 순백의 검기.

그 검기는 어딘가 별을 닮아 있었다.

순백의 별을 닮은 검기가 새하얀 입자를 흩뿌렸다.

싸움이 쉽사리 결판이 나질 않는다.

그리핀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영웅, 아르타 트리가디언의 검술까지 꺼내 들었거늘 예상과는 달리 싸움은 늘어져만 갔다. 온갖 수단을 써가며 청년은 검을 피해내고 있다. 피를 흘리고, 제 몸을 망가트려 가며 시간을 끌고 있다.

결코 패배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시간이 끌리면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리핀에게 있어 패배나 다름없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군이 내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기사다움이었으니까. 그리핀은 들어 올린 발을 내려찍으며 나진에게 다가섰다.

결판을 내야 하리라.

그렇기에 그리핀은 떠올렸다.

자신의 심상의 근본이 되는 풍경을.

그것은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정원에 놓인 앙상한 가시나무다. 그리핀이 어렸을 때부터 가시나무는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핀을 종자로 삼았던 기사는 저 나무를 아르베니아의 수호목이라 불렀다.

300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킨 가시나무.

그 나무를 바라보며 그리핀은 검을 휘둘렀다. 그간 세월이 흘러 모시던 스승은 은퇴하고, 그리핀은 기사가 되었으며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라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르베니아 수호목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수호목을 보고 수십 년간 검을 휘둘러왔기에 그리핀의 내면에도 가시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제 주인이 무엇을 바라던 다만 이행하는 우직한 거목.

그것이 그리핀이 생각하는 기사다.

심상이 그리핀의 검을 타고 뻗어나갔다.

조금 더 크기를 불린 거목, 이젠 5m가 넘어가는 가시나무를 그리핀은 휘둘렀다. 도망칠 곳은 없다. 조금 전처럼 밀어내며 도망칠 수도 없게끔 그리핀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이다.

줄곧 도망치던 나진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멈춰 선 나진은 난데없이 검을 제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 저 동작을 그리핀은 알고 있다. 몇몇 기사들, 혹은 아탕가의 기사들이 제 검기를 끌어올리기 전에 습관처럼 취하는 자세였으니까.

검례(劍禮)를 올려 마음가짐을 다잡는 행위.

검례를 마친 순간 나진의 검 위로 새하얀 입자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검기였으나, 무언가 다름을 그리핀은 느꼈다. 다 사그라들었던 나진의 검기가 다시 빛을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새하얀 입자가 나진의 검을 중심으로 만개했다. 마치 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그 순간 그리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단순한 빛무리가 아닌 ‘형태를 갖춘’ 검기. 아직 그 형태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하지만 저곳에 청년의 심상이 담겼음은 분명하다.

소드 시커의 편린에 닿은 것이다.

궁지에 몰린 상황, 생과 사를 오가는 줄타기 속에서 나진은 기어코 닿지 못한 영역에 발을 디뎠다.

카가가가가각!

붉은 가시나무와 새하얀 별이 맞부딪쳤다.

여태까지 나진의 검은 속절없이 밀렸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입자를 흩뿌리며 나진의 검이 붉은 가시나무의 가지를 베어 갈랐다.

수십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 중 하나가 꺾였을 뿐이다. 하지만, 베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베이는 것을 확인한 나진이 눈을 부릅떴다.

대항할 수단이 생겼다는 것. 그것은, 여태껏 쓰지 못했던 수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진이 땅을 박차고 그리핀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걱!

거목의 가지를 쳐내고, 때로는 피를 흘리며 나진은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몇번의 피를 쏟아내야 했지만 나진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진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경험의 차이다.

나진은 이제 막 편린에 닿았지만, 그리핀은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지 이미 십 년이 넘은 실력자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리핀은 착실히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우위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나진의 검에 깃든 심상은 서서히 증발하고 있다.

그 기세는 날카롭지만, 아직 심상을 담은 검을 휘두르는 법을 모르는 애송이다. 경험의 차이가 곧 승패를 갈랐다. 나진은 분전했지만 코앞에 닿았을 때 그 칼날에는 더는 검기가 맺히지 않았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끝났군.

그리 생각하며 그리핀이 검을 휘둘러 끝장을 내려는 순간이다. 쐐에에엑! 귓가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눈을 부릅뜬 그리핀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으나 터엉! 소리를 내며 검과 함께 그리핀이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바닥에 꽂힌 화살을 바라보노라면, 범인의 근력으로는 당길 수 없는 대궁(大弓)에 걸릴만한 화살이다.

그리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트레바체 후작가의 유명한 기사다.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른, 대궁을 다루는 기사. 그자가 쏘아낸 화살이 분명했다. 뒤이어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멈추시오.”

가까워지는 군마.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리핀은 주변을 둘러봤다.

군마를 타고 도착한 것은 후작가의 기사들이다. 그들이 그리핀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핀의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이었고, 이는 곧 그리핀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리핀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검을 내렸다. 후작가의 기사들까지 온 마당에 전투를 속행할 수 없으니.

그렇게 검을 내리려는 순간이다.

그리핀은 무심코 눈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피 칠갑을 한 채 조금 전 자세 그대로 굳어있는 청년이 있었다. 검을 휘두르려는 자세 그대로 멈춰서 숨을 내뱉고 있는 청년. 그 자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리핀은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미래시도, 상대의 움직임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재능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진의 자세를 알아볼 만큼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검의 교단의 검술이었고 가까운 거리에서의 반격기에 최적화된 검술이었다. 검기가 맺히지 않는 칼자루를 후려쳐 자세를 무너트리는 검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검기가 꺼질 것을 예상하고 반격을 위한 자세를 잡았단 말인가?

만일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고 한들.

저 청년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리핀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승리를 거머쥐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패배하진 않겠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청년에게선 그런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으니까.

“······.”

그리핀은 말없이 검을 내렸다.

적으로 만났다곤 하나, 저 청년의 투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었으므로. 여전히 자세를 풀지 않는 나진을 향해 그리핀이 말했다.

“나의 패배다.”

그제야 나진이 검을 내렸다. 그리핀은 한숨을 내쉬곤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젠 검이 아닌 세 치 혀와 명분으로 싸워야만 했으므로.

그리고 그런 전장은.

그리핀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