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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도주극은 한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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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알려진 것은 디에타뿐이었으므로, 나진은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가까운 마을에서 식량을 구하고 기사들의 경로를 확인하며 나진은 도주 경로를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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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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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입은 디에타와 함께라곤 하나, 지하도시 때보단 상황이 곱절은 좋았으니까. 때로는 숲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때로는 골목길에 숨어 하룻밤을 보내며 그들은 도주극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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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흘째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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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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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속. 꺼내든 광석등을 후려치고 있는 나진을 바라보며, 디에타가 문득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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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독특한 광석등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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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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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들이 들고 다니는 광석등은 이런 색깔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출력이 약하지도 않고요. 광석을 고정한 프레임을 보니 구식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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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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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서 취급하는 물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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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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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난 광석등인가요? 불빛이 나쁘지 않은데. 저도 하나 장만해 볼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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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에서 났습니다. 구하긴 힘들 겁니다. 외부와 꽤 단절된 곳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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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첼 산맥의 레인저들은 이런 걸 쓰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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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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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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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모른척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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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 알아요. 당신 테첼 산맥 출신이잖아요. 어쩐지 실력이 좋다 했어. 이 정도 암행 실력을 갖춘 게 레인저가 아닐 리가 없잖아요? 이쯤 되면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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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짚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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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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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 말투. 거짓말을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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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눈을 깜빡였고, 나진은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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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첼 산맥이 어딨는지도 전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곳 출신은 아닙니다. 뭐, 듣게 되면 놀라기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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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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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밝히고 싶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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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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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좋은 곳 출신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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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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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더는 질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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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깊은 곳에 파고들지 않고, 자연스레 끊어지는 대화. 디에타는 이런 가벼운 대화가 싫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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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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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빛나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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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속에서 광석등 하나에 의지한 채, 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일까. 묘한 상황이 디에타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적당한 바윗돌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이던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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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눈동자가 나진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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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겨진 가면을 다시 쓰고 있지 않았기에, 금화를 삼키는 뱀이 아닌 ‘디에타’로서 눈앞의 남자를 마주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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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 조금 들어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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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끊어진 대화의 다음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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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잠은 오지 않았고, 밤은 깊었으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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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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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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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적이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제 약점을 알리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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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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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해야만 했던 아이가 가진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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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됐으며, 모든 것을 이용해야만 했으니까. 그렇기에 디에타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곱 번째 생일날부터 줄곧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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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그렇게 살아왔던 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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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고, 모든 것을 내려둔 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른 깊은 밤, 노을빛을 은은하게 흘리는 광석등 앞에서 디에타는 제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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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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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디에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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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아왔어요. 사실 후회는 없어요. 원래 위로 올라간다는 건 누군가를 짓밟는단 거잖아요. 그 사실에 후회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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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광석등을 바라보며 그녀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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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고, 나 자신을 숨기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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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은 씁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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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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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슬픈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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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당신이 물어봤죠. 제 목표가 뭐냐고. 그 질문에 금화를 모으는 게 목표라 답했더니, 금화를 모아서 뭘 할 거냐고 다시 물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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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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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가치를 올린다고 둘러댔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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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제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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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 목표는 복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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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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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금화를 잔뜩 삼켜서, 가치를 올리고 또 올려서··· 공작가마저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뱀이 되는 게 제 목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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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가만히 디에타의 말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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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원해서 늘어놓는 말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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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작가를 삼키고, 짓밟아버리면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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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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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했던 시간. 내가 버텨야만 했던 것들. 웃어넘기고, 쌓아두고, 단지 삭혀야만 했던 순간들. 그런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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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죠, 하고 디에타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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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작가를 짓밟는다 해서 그 시간들이 돌아오는 게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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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 공작가의 별장에서 몇번이고 올려다보았던 달을 바라보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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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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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바보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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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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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고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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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광석등과 같은 노을빛으로 빛나는 나진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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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바보 같은 거다. 해봐야 돌려받는 건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다 헛소리입니다. 돌려받는 게 왜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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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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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내하고, 증오의 고리를 끊고, 그게 다 뭔 개 같은 소리인지··· 그런다고 좆같았던 과거가 예쁘게 포장되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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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나오는 것은 거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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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서 살아왔던 사냥개는 날것의 단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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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해도, 복수하고 나면 기분은 시원할 거 아니에요. 그것만 해도 복수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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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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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선은 노을빛을 머금은 광석등을 바라보고 있다. 나진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디에타에게 있어 달밤이 그러하듯, 나진에게 있어선 이 광석등이 뿜어내는 인조적인 노을빛이 과거를 떠올리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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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곳에 올라서··· 복수를 해야만 할 상대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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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휘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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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속으로 삼키며 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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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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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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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 내든, 다 태워버리든, 짓밟아버리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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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다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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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문득 저 자신을 바라봤다. 그렇게 덩치를 키워서 공작가를 삼킨 다음, 그 다음을 디에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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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이라···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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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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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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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언제나 가면을 쓸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때론, 숨 좀 돌리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화내고 싶으면 화도 내고. 그렇게 살다 보면 저절로 생깁니다. 다음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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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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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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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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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따라, 디에타는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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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네요. 평소에도 좀 웃고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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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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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왜 더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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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다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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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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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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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 하고 디에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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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며 그녀가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리곤 툭 내뱉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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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금 좀 즐거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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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어울리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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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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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하고 디에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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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름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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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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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그러면 말 안 해줘도 돼요. 그냥, 당신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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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제 속내와 약점을 모두 드러낸 디에타다. 가면을 벗고 솔직하게 제 모든 것을 드러낸 그녀의 물음에 나진은 잠깐 동안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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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신만 가면의 뒤로 숨는 건 치사하다고 나진은 생각하고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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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역시 대답 안 해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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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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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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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그게 제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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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본 디에타가 환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나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맞잡은 채 디에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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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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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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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할게요.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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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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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되는 날, 추격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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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트레바체의 영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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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관문을 넘기만 하면 추격은 끝이 난다. 제아무리 공작가의 기사라 한들, 후작가의 영지를 마음대로 들쑤시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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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은 좀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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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한쪽은 좀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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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절뚝거리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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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구해온 온갖 포션을 뿌린 덕에 한쪽 발은 디딜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일 수 있는 정도고, 걸을 때마다 아프긴 하지만 일단은 설 수 있다는 것에 디에타는 의미를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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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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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를 업고 나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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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발짝 앞으로 내딛던 나진이 천천히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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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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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영지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 그 길목을 가로막아 선 것은,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가문이 새겨진 갑옷을 차려입은 한 명의 기사다. 마치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는 양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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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러 왔습니다, 디에타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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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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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등에 업힌 채 그를 바라보는 디에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자가 누구인지 디에타는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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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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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소드 시커급의 강자이며, 아르베니아의 가장 날카로운 검. 디에타가 숨을 삼키고 나진의 어깨를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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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세를 낮춰 디에타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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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팔을 붙잡은 채 땅을 디디고 선 그녀가 길을 가로막은 그리핀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 중 하나다. 당황할 만도 하지만, 흔들렸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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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까지 파견된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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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께서 아가씨를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함께 돌아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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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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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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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디에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곤 나진을 바라봤다. 이 상황에 대해선 나진과 이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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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그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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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급의 무인이에요. 추격대에 동원될 기사들 중 당신을 확실하게 압도할 만한 무인은, 그리핀뿐이겠죠. 다른 소드 시커가 셋 더 있긴 한데 이번 추격전에는 동원되지 않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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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깊은 숲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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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그리핀과 마주하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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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버리고 당신은 목적지로 가세요. 제가 있으면 설득이 쉽겠지만, 제가 없어도 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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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간을 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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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그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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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나진이라 한들 소드 시커급의 무인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는 디에타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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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죽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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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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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속삭이며 디에타가 나진의 팔을 놓았다. 그리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핀을 상대로 세 치 혀를 놀리며 최소한 시간이라도 끌어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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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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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을 요구할 상황이 아님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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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건이 아니라 조언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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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제 뒤에 서 있는 나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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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는 캄브리아에서 고용한 제 호위에요. 계약 조건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는 캄브리아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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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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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자는 보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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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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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기사단장이 캄브리아의 적색 등급 모험가를 살해한다. 그것도, 캄브리아 재단을 운영하는 트레바체 후작가 영지 근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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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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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그녀는 가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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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으로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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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되시겠어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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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범죄자입니다. 공작가에 침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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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죠. 하물며, 공작가 역시 그리 떳떳한 입장은 아닐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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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하며 디에타는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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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나진에게 뛰라는 손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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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초조함을 감춘 채 디에타가 조금 더 시간을 끌어보려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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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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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의 어깨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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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몸을 떤 디에타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진이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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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간을 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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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도망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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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신이 말했을 때 나진은 뭐라고 답했던가? 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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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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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를 뒤로 밀어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앞으로 선 나진은 디에타에게 후작가의 영지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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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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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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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제가 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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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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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렸으나, 그녀는 이내 나진이 결코 생각을 바꾸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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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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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악물고 디에타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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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다리를 끌며, 그녀가 걷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걷고 있지만 그 걸음걸이는 느리다. 후작가의 관문에 도착하려면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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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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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리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다리를 끌며 멀어지는 디에타를 향해 그리핀이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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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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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을 타고 느껴지는 섬짓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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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이 고개를 휙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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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검을 뽑아 든 나진이 서 있었다. 한순간에 검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새하얀 검기(劍氣). 검기를 두른 검을 나진이 그리핀에게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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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걸음이라도 움직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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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라도 달려들어 그 목을 쳐버리겠노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날카로운 기세. 그 기세에 그리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검기의 형태를 보아하니 소드 엑스퍼트급의 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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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아래 경지에 있는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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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한다면 손쉽게 꺾어버릴 수 있는 무인이지만, 그 기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발목을 물고 늘어져서라도 시간을 벌겠다. 그런 강렬한 의지가 저 사내에게선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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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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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이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도망치는 디에타가 아닌 나진을 바라봤다. 그것은 사내가 보인 의지에 대한 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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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묻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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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뽑아든 검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형태를 지닌 검기. 검기보다 한 걸음 나아간 곳에 존재하는 소드 시커의 전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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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께선 명하셨다. 디에타 아가씨의 신원을 확보하고, 그 도주를 도운 이를 죽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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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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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르베니아의 검이요, 공작의 명을 따르는 기사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대상의 정보는 중요치 않지. 그러니, 네가 누구인지 난 신경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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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를 가진 귀족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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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도시의 유명인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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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선 안 될, 대단한 존재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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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께서 너를 죽이라 명하셨으니, 그 명을 나는 다만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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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자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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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공작께서 명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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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자신은 그 명령을 따를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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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리핀이 말하는 충(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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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를 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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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이 나진에게 검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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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선택을 존중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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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고자 하는 대상이 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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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디에타의 기사였다면 자신 또한 저와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신원불명, 기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눈앞의 저자가 보인 것은 기사로서 가져야 할 고결함이다. 그 고결함을 그리핀은 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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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가만히 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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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기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제 주인에게 무제한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 그 또한 기사의 일종일 테니까. 옳고 그름, 자신의 가치관을 완전히 배제한 채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 그것을 충(忠)이라 여기는 기사를 나진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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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저자의 신념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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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검을 들어 올린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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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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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나진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는 까닭이다. 디에타는 그 별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말했고 나진은 그 부탁을 이루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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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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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에는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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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지만, 그것이 나진이 소드 시커급의 무인에게 도전하는 이유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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