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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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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도주극은 한동안 이어졌다.

얼굴이 알려진 것은 디에타뿐이었으므로, 나진은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가까운 마을에서 식량을 구하고 기사들의 경로를 확인하며 나진은 도주 경로를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썩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디에타와 함께라곤 하나, 지하도시 때보단 상황이 곱절은 좋았으니까. 때로는 숲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때로는 골목길에 숨어 하룻밤을 보내며 그들은 도주극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나흘째 되는 날이다.

“그거 말인데요.”

깊은 숲속. 꺼내든 광석등을 후려치고 있는 나진을 바라보며, 디에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꽤 독특한 광석등이네요?”

“그렇습니까?”

“모험가들이 들고 다니는 광석등은 이런 색깔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출력이 약하지도 않고요. 광석을 고정한 프레임을 보니 구식인 것 같기도 하고···.”

“잘 아시는군요.”

“상단에서 취급하는 물건이니까요.”

디에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서 난 광석등인가요? 불빛이 나쁘지 않은데. 저도 하나 장만해 볼까 싶네요.”

“제 고향에서 났습니다. 구하긴 힘들 겁니다. 외부와 꽤 단절된 곳이라서.”

“테첼 산맥의 레인저들은 이런 걸 쓰나 보죠?”

“······예?”

나진이 눈을 깜빡였다.

디에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모른척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말했다.

“저 다 알아요. 당신 테첼 산맥 출신이잖아요. 어쩐지 실력이 좋다 했어. 이 정도 암행 실력을 갖춘 게 레인저가 아닐 리가 없잖아요? 이쯤 되면 확실······.”

“잘못 짚으셨습니다.”

“네?”

단호한 말투. 거짓말을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디에타는 눈을 깜빡였고, 나진은 담담히 말했다.

“테첼 산맥이 어딨는지도 전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곳 출신은 아닙니다. 뭐, 듣게 되면 놀라기야 하겠지만···.”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당장은 밝히고 싶지 않군요.”

“그래요?”

“썩 좋은 곳 출신은 아니라서.”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죠.”

디에타는 더는 질문하지는 않았다.

캄브리아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깊은 곳에 파고들지 않고, 자연스레 끊어지는 대화. 디에타는 이런 가벼운 대화가 싫진 않았지만···.

“있잖아요.”

달이 빛나고 있기 때문일까.

깊은 숲속에서 광석등 하나에 의지한 채, 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일까. 묘한 상황이 디에타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적당한 바윗돌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이던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샛노란 눈동자가 나진을 응시했다.

벗겨진 가면을 다시 쓰고 있지 않았기에, 금화를 삼키는 뱀이 아닌 ‘디에타’로서 눈앞의 남자를 마주하고 있기에.

“제 이야기, 조금 들어주실래요?”

디에타는 끊어진 대화의 다음에 발을 디뎠다.

아직 잠은 오지 않았고, 밤은 깊었으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적이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제 약점을 알리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였고.

조숙해야만 했던 아이가 가진 상처였다.

철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됐으며, 모든 것을 이용해야만 했으니까. 그렇기에 디에타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곱 번째 생일날부터 줄곧 그랬다.

줄곧 그렇게 살아왔던 뱀은.

가면을 벗고, 모든 것을 내려둔 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른 깊은 밤, 노을빛을 은은하게 흘리는 광석등 앞에서 디에타는 제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살았어요.”

라고, 디에타는 말했다.

“그렇게, 살아왔어요. 사실 후회는 없어요. 원래 위로 올라간다는 건 누군가를 짓밟는단 거잖아요. 그 사실에 후회는 없는데···.”

어스름한 광석등을 바라보며 그녀가 웃었다.

“가면을 쓰고, 나 자신을 숨기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웃음은 씁쓸하고.

“이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조금은 슬픈 웃음이었다.

“저번에 당신이 물어봤죠. 제 목표가 뭐냐고. 그 질문에 금화를 모으는 게 목표라 답했더니, 금화를 모아서 뭘 할 거냐고 다시 물었었죠?”

“그랬었죠.”

“그땐, 가치를 올린다고 둘러댔는데 말이에요.”

디에타가 제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사실 제 목표는 복수였어요.”

“그렇습니까.”

“네. 금화를 잔뜩 삼켜서, 가치를 올리고 또 올려서··· 공작가마저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뱀이 되는 게 제 목표였어요.”

나진은 가만히 디에타의 말에 귀 기울였다.

대답을 원해서 늘어놓는 말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공작가를 삼키고, 짓밟아버리면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뭘 말입니까.”

“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했던 시간. 내가 버텨야만 했던 것들. 웃어넘기고, 쌓아두고, 단지 삭혀야만 했던 순간들. 그런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바보 같죠, 하고 디에타는 중얼거렸다.

“그렇게 공작가를 짓밟는다 해서 그 시간들이 돌아오는 게 아닐 텐데······.”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 공작가의 별장에서 몇번이고 올려다보았던 달을 바라보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바보 같죠, 정말?”

“그게 왜 바보 같습니까?”

“···네?”

디에타가 고개를 내렸다.

그곳엔 광석등과 같은 노을빛으로 빛나는 나진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복수는 바보 같은 거다. 해봐야 돌려받는 건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다 헛소리입니다. 돌려받는 게 왜 없습니까?”

나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감내하고, 증오의 고리를 끊고, 그게 다 뭔 개 같은 소리인지··· 그런다고 좆같았던 과거가 예쁘게 포장되는 것도 아닌데.”

튀어나오는 것은 거친 말투.

지하도시에서 살아왔던 사냥개는 날것의 단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설령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해도, 복수하고 나면 기분은 시원할 거 아니에요. 그것만 해도 복수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나진이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은 노을빛을 머금은 광석등을 바라보고 있다. 나진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디에타에게 있어 달밤이 그러하듯, 나진에게 있어선 이 광석등이 뿜어내는 인조적인 노을빛이 과거를 떠올리게 했으니.

“저도 그렇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곳에 올라서··· 복수를 해야만 할 상대가 있어요.”

성휘 교단.

그 이름을 속으로 삼키며 나진은 말했다.

“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음··· 이요?”

“박살 내든, 다 태워버리든, 짓밟아버리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다음, 다음이라.

디에타는 문득 저 자신을 바라봤다. 그렇게 덩치를 키워서 공작가를 삼킨 다음, 그 다음을 디에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음이라···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는 문제입니다.”

나진이 디에타를 바라봤다.

“꼭 언제나 가면을 쓸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때론, 숨 좀 돌리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화내고 싶으면 화도 내고. 그렇게 살다 보면 저절로 생깁니다. 다음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도는.”

나진이 미소 지었다.

“제가 그랬거든요.”

닮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나진을 따라, 디에타는 웃어 보였다.

“보기 좋네요. 평소에도 좀 웃고 다녀요.”

“그, 그래요?”

“말을 왜 더듬어요?”

“보기 좋다길래···.”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햐, 하고 디에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며 그녀가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리곤 툭 내뱉듯이 말했다.

“저, 지금 좀 즐거운 것 같아요.”

“상황에 어울리진 않네요.”

“그래도요.”

그래서 말인데, 하고 디에타가 말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

“좀 그러면 말 안 해줘도 돼요. 그냥, 당신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서요.”

누군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제 속내와 약점을 모두 드러낸 디에타다. 가면을 벗고 솔직하게 제 모든 것을 드러낸 그녀의 물음에 나진은 잠깐 동안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만 가면의 뒤로 숨는 건 치사하다고 나진은 생각하고 말았으니까.

“음, 역시 대답 안 해줘도···.”

“나진.”

나진이 말했다.

“나진. 그게 제 이름입니다.”

나진,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본 디에타가 환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나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맞잡은 채 디에타는 말했다.

“고마워요, 나진.”

그리고.

“잘 부탁할게요. 앞으로도.”

닷새째 되는 날, 추격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저 멀리 트레바체의 영지가 보인다.

저 관문을 넘기만 하면 추격은 끝이 난다. 제아무리 공작가의 기사라 한들, 후작가의 영지를 마음대로 들쑤시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발목은 좀 괜찮습니까?”

“네, 한쪽은 좀 괜찮네요.”

디에타가 절뚝거리며 걸었다.

마을에서 구해온 온갖 포션을 뿌린 덕에 한쪽 발은 디딜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일 수 있는 정도고, 걸을 때마다 아프긴 하지만 일단은 설 수 있다는 것에 디에타는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럼 갑시다.”

디에타를 업고 나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발짝 앞으로 내딛던 나진이 천천히 멈춰 섰다.

누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후작가의 영지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 그 길목을 가로막아 선 것은,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가문이 새겨진 갑옷을 차려입은 한 명의 기사다. 마치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는 양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디에타 아가씨.”

그가 입을 열었다.

나진의 등에 업힌 채 그를 바라보는 디에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자가 누구인지 디에타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핀 경.”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소드 시커급의 강자이며, 아르베니아의 가장 날카로운 검. 디에타가 숨을 삼키고 나진의 어깨를 건드렸다.

나진이 자세를 낮춰 디에타를 내려주었다.

나진의 팔을 붙잡은 채 땅을 디디고 선 그녀가 길을 가로막은 그리핀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 중 하나다. 당황할 만도 하지만, 흔들렸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가라앉았다.

“경까지 파견된 모양이군요.”

“공작께서 아가씨를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함께 돌아가시지요.”

“거절한다면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핀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디에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곤 나진을 바라봤다. 이 상황에 대해선 나진과 이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기사단장, 그리핀.」

「소드 시커급의 무인이에요. 추격대에 동원될 기사들 중 당신을 확실하게 압도할 만한 무인은, 그리핀뿐이겠죠. 다른 소드 시커가 셋 더 있긴 한데 이번 추격전에는 동원되지 않았을 거예요.」

해가 저문 깊은 숲속에서.

「만에 하나, 그리핀과 마주하게 된다면.」

「저를 버리고 당신은 목적지로 가세요. 제가 있으면 설득이 쉽겠지만, 제가 없어도 되는 일이니까요.」

「저는 시간을 끌게요.」

디에타는 그렇게 말했었다.

제 아무리 나진이라 한들 소드 시커급의 무인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는 디에타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진을 죽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가봐요.”

그리 속삭이며 디에타가 나진의 팔을 놓았다. 그리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핀을 상대로 세 치 혀를 놀리며 최소한 시간이라도 끌어보기 위해서.

“그렇게 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을 요구할 상황이 아님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조건이 아니라 조언이라고 하죠.”

디에타가 제 뒤에 서 있는 나진을 가리켰다.

“이자는 캄브리아에서 고용한 제 호위에요. 계약 조건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는 캄브리아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죠.”

“······.”

“그러니, 이자는 보내줘요.”

“그건 불가능···.”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캄브리아의 적색 등급 모험가를 살해한다. 그것도, 캄브리아 재단을 운영하는 트레바체 후작가 영지 근처에서.”

디에타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는 가면을 썼다.

금화를 삼키는 뱀으로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감당되시겠어요, 경?”

“저자는 범죄자입니다. 공작가에 침입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죠. 하물며, 공작가 역시 그리 떳떳한 입장은 아닐 텐데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디에타는 손짓했다.

당장 나진에게 뛰라는 손짓이다.

그러나, 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초조함을 감춘 채 디에타가 조금 더 시간을 끌어보려 한 순간이다.

콱.

나진이 디에타의 어깨를 잡았다.

짧게 몸을 떤 디에타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진이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고 만다.

「저는 시간을 끌게요.」

「당신은 도망치세요.」

그렇게 자신이 말했을 때 나진은 뭐라고 답했던가? 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탁.

나진이 디에타를 뒤로 밀어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앞으로 선 나진은 디에타에게 후작가의 영지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먼저 가 있으세요.”

나진은 말했다.

“시간은 제가 끌 테니까.”

디에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흔들렸으나, 그녀는 이내 나진이 결코 생각을 바꾸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리라.

“죽지 마요.”

이를 악물고 디에타가 걸음을 옮겼다.

한쪽 다리를 끌며, 그녀가 걷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걷고 있지만 그 걸음걸이는 느리다. 후작가의 관문에 도착하려면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리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다리를 끌며 멀어지는 디에타를 향해 그리핀이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다.

카앙!

등골을 타고 느껴지는 섬짓함.

그리핀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엔 검을 뽑아 든 나진이 서 있었다. 한순간에 검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새하얀 검기(劍氣). 검기를 두른 검을 나진이 그리핀에게 겨누었다.

단 한 걸음이라도 움직인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그 목을 쳐버리겠노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날카로운 기세. 그 기세에 그리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검기의 형태를 보아하니 소드 엑스퍼트급의 무인이다.

자신보다 아래 경지에 있는 무인.

작정한다면 손쉽게 꺾어버릴 수 있는 무인이지만, 그 기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발목을 물고 늘어져서라도 시간을 벌겠다. 그런 강렬한 의지가 저 사내에게선 느껴졌으니까.

“······.”

그리핀이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도망치는 디에타가 아닌 나진을 바라봤다. 그것은 사내가 보인 의지에 대한 찬사였다.

“이름은 묻지 않겠다.”

그가 뽑아든 검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형태를 지닌 검기. 검기보다 한 걸음 나아간 곳에 존재하는 소드 시커의 전유물.

“공작께선 명하셨다. 디에타 아가씨의 신원을 확보하고, 그 도주를 도운 이를 죽이라고.”

그가 선언했다.

“나는 아르베니아의 검이요, 공작의 명을 따르는 기사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대상의 정보는 중요치 않지. 그러니, 네가 누구인지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작위를 가진 귀족이던.

모험가 도시의 유명인이던.

죽여선 안 될, 대단한 존재든 간에.

“공작께서 너를 죽이라 명하셨으니, 그 명을 나는 다만 따를 뿐이다.”

그건 자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단지, 공작께서 명하셨고.

단지, 자신은 그 명령을 따를 뿐이었으니.

그것이 그리핀이 말하는 충(忠)이다.

“그럼에도 이를 말하는 것은.”

그리핀이 나진에게 검을 겨누었다.

“너의 선택을 존중하는 까닭이다.”

따르고자 하는 대상이 다를 뿐.

자신이 디에타의 기사였다면 자신 또한 저와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신원불명, 기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눈앞의 저자가 보인 것은 기사로서 가져야 할 고결함이다. 그 고결함을 그리핀은 존중했다.

나진은 가만히 검을 들어 올렸다.

눈앞의 기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제 주인에게 무제한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 그 또한 기사의 일종일 테니까. 옳고 그름, 자신의 가치관을 완전히 배제한 채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 그것을 충(忠)이라 여기는 기사를 나진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저자의 신념일 테니.

그럼에도 검을 들어 올린 것은.

단지.

단지, 나진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는 까닭이다. 디에타는 그 별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말했고 나진은 그 부탁을 이루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그 약속에는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다.

단순하지만, 그것이 나진이 소드 시커급의 무인에게 도전하는 이유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