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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을 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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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디에타는 창밖을 바라봤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다.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별채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디에타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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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썩었을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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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순순히 이곳까지 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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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공작가에 반기를 들어봐야 이득 볼 것이 없으며, 오스만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뢰는 등을 믿고 맡길만한 동료나 동반자에게 던지는 신뢰와는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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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동족에 대한 신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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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자신과 같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동족이자 경쟁자에 대한 신뢰. 디에타가 알고 있는 오스만은 냉철한 정치가이자 장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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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오스만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 들 리가 없을 거라고, 디에타는 판단했을 뿐이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오스만이 내린 판단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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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담? 가치를 높게 평가해? 얻을 수 있는 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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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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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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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의 성장세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었으며, 머지않은 시일내에 캄브리아를 넘어 외부로까지 뻗어나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디에타 본인과, 상단이 가진 가치는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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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시기에 상단주를 갈아 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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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은 디에타가 있기에 돌아가는, 그녀를 중심으로 한 상단이다. 그녀가 빠지는 순간 상단이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프로젝트는 중지되거나 동결될 것이며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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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망가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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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자금을 들이붓는다 한들 이득을 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손해라는 뜻이다. 디에타가 알고 있는 오스만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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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늙어서 노망이 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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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샛노란 눈동자도 멀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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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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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편지가 날아왔을 때 곧장 찢어버리고, 대립각을 세울 걸 그랬나. 상단이 큰 타격을 입기야 하겠지만······ 지금보다는 쓸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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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을 너무 고평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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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과 함께 디에타는 창밖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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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의 속도는 점점 느릿해지고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었다. 창가에 비춘 제 얼굴을 디에타는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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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게 굳은 입꼬리. 서늘한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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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은 건재하다. 여전히 이성을 붙잡고 있다. 감정이 술렁이긴 하나 아직까진 눌러둘 만은 하다. 그러니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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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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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숨겨둔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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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개책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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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단도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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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식으로 상단 하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건 결국에, 디에타가 ‘아르베니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까. 만일 평범한 상단을 공작가가 이딴 식으로 삼키려 들었다간 후폭풍이 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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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비난. 적대세력의 견제. 그리고 제국법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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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머릿속에서 퍼즐을 짜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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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가문에 대한 정보와, 적대 세력, 지금 자신에게 남은 수와 연계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짜맞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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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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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최악을 대비하는 건 상인의 덕목이다. 디에타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리라. 아직은 뒤엎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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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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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문밖에는 기사들이 디에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 기사라는 명목으로 공작이 붙여준 기사들. 말이 호위이지 저들은 감시자에 불과하단 사실을 디에타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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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호위 기사 파시온이 이곳에 없으니까. 공작은 가장 먼저 파시온과 자신을 떨어트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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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사람도, 아군도 없다.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다. 디에타는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관리가 안 된 가문의 별채를 바라보는 디에타의 입가가 경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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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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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머니가 목을 매달아 자살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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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이 싸늘한 별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술렁이는 감정을 억누르며 디에타는 별채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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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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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 아르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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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의 자제인 그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안다. 적어도, 아게시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간단하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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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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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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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저울의 반대편에 올려두면 수평은 알아서 맞춰지는 법이다. 아게시오에겐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권력도, 재력도 충분했다. 아르베니아 공작의 첫째 자식이란 지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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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서임식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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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아게시오 아르베니아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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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주인의 작위에 기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법이니, 공작가의 기사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릴 일은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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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에 서 있는 모험가가 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고. 저자는 기사를 동경하지 않은가. 기사라는 작위가 가벼운 것은 아니나, 공작가의 자제인 아게시오에겐 한없이 가벼운 작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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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제안이라 해봐야 별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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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을 쓰듯 아게시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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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우위에 있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상대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미끼를 걸어둔 채, 가벼운 요구사항부터 시작해 점차 팔다리에 족쇄를 채워가는 건 아게시오의 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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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를 한번 물면 그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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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는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어갔다. 눈앞의 모험가는 이 도시에서 가진 명성도, 그 실력도 출중하다. 삼켜두어서 나쁠 건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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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협력하고, 내가 이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채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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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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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이 몇푼의 금화와 권력, 작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금화를 쫓는 모험가들이 가득한 이런 도시라 한들 별종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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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진은 별종 중의 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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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 그리고 별을 쫓는 이 시대에는 다 사라져가는 멸종위기종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별종들의 특징은 상대가 상상치도 못한 답변을 내놓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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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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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아게시오의 말을 끊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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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말을 끊어낸다는 예의에 벗어난 행위. 캄브리아가 아니었다면 극형에 처할지도 모를 행위다. 그러나 나진의 행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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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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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바라보고 있던 아게시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공작가의 자제가 한낱 모험가를 올려다보고, 한낱 모험가가 귀족을 내려다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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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다 했으니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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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가 말을 잇기도 전에 나진은 고개를 돌렸다. 귀족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등을 보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아게시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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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기사마저 웃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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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의 호위 기사, 필레온이 눈을 부릅떴다. 제 주인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워대던 모험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다. 주인이 만류했기에 몇번이나 인내했으나 이건 명백히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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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법으로 극형에 처해도 충분한 상황. 이곳이 캄브리아라곤 하나 귀족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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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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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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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부락한 체구에서 오는 발걸음은 무겁다. 집무실이 흔들렸다. 앞으로 나서는 필레온을 아게시오는 만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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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금화에 눈이 먼 용병 나부랭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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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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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나진이 뒤를 바라본 순간, 그가 나진을 향해 확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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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명성에 취해, 제 위치를 망각했구나. 아르베니아 공작가가 우스워 보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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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이 나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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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쥔 채 위로 들어올리자 나진의 발이 공중에 떴다. 쾅, 하고 그대로 벽에 나진을 밀어붙인 채 필레온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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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인이 만류하지 않는 이상, 필레온은 눈앞의 건방진 애새끼에게 적당히 예절을 주입할 생각이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짐승에겐 때로는 매가 약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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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게시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기선 제압이 됐을 테지. 그렇게 아게시오가 손을 들어 올려 제 기사를 제지하려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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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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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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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멱살을 잡은 필레온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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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친 건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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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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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나부랭이가 기사에게 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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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에 필레온이 분노하는 것보다 먼저, 나진이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필레온의 손목을 비틀며 나진이 멱살잡이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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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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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살을 찌푸린 필레온이 움직이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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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눈치챘을 땐, 갑옷에 나진의 발이 맞닿아 있었다. 복부를 가린 판금에 맞닿아 있는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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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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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나진의 몸에 흐름이 깃들었다. 한순간의 신체 강화. 한순간에 전신에 마나를 둘러치는, 나진의 마나 운용 속도는 이미 엑스퍼트급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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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필레온이 마나를 끌어올리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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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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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굽혔던 다리를 쫙 펴 필레온의 복부를 걷어찼다. 우락부락한 체구의 필레온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대비하지 못한 불시의 일격. 마나를 끌어올리지 못한 채 허용한 일격은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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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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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공중에 붕 뜬 채 날아간 필레온이, 집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바닥을 굴렀다. 테이블과 접객용 의자가 박살 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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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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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장을 박살 내며 처박힌 필레온이 숨을 토해냈다. 나진의 발차기에 직격당한 판금 갑옷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필레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나, 예상치 못한 일격에 그는 균형을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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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옆에 날아와 처박힌 필레온을 보는 아게시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가 당황하기를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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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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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을 눈치챈 기사들이 계단을 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착한 기사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 상황을 파악했다. 처박혀 있는 필레온과 똑바로 서 있는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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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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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이 거칠게 검을 뽑아 들어 나진에게 겨누었다. 제게 겨누어진 검 사이에서 나진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수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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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공격한 건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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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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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이곳은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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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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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권고사항이지, 법적인 우위를 따져보면 그리 높지 않다. 귀찮은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중앙 길드의 권고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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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급의 모험가라면 귀족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최선을 다해 예의를 표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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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녹색 등급의 모험가며, 내일이면 적색 등급으로의 승급이 확정된 모험가다. 중앙 길드에서 신원을 보증하는 인물이며, 때에 따라서는 캄브리아의 법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세력들의 비호를 받을 수도 있는 인물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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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등급 모험가는 그만한 인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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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을 받았기에 반격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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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둘러싼 기사들 사이에서도 나진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게시오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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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해볼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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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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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게시오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게시오는 공작가의 권위를 앞세워 지금 이 자리에서 나진을 벌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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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고, 무릎 꿇려 보복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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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서야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갑작스레 도시에 찾아온 공작가의 자제가, 도시에서 이름을 날리는 상급 모험가를 권위로 무릎 꿇렸다는 말이 돌게 되면 타격을 입는 것은 아게시오 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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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의 입지가 곤란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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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몹시도 귀찮은 일들이 벌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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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벌인 일인가? 그렇다면 과연 놀라운 일이다. 웃음을 흘리며 아게시오는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검을 무르라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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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심이 과한 내 기사가 실례를 범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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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가 나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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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제안은 긍정적이게 생각해보게나. 아직 시간은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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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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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길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밀치고 나진은 건물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게시오는 제 눈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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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미친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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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박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들개와도 같은 모험가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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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탐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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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가 손가락으로 툭툭 테이블을 건드렸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재밌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방금 보여주었던 무력의 수준은 무인과는 길이 먼 아게시오가 보기에도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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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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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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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을 떠올리며 아게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미끼에 낚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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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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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건물을 빠져나온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싸가지없어 보이는 금발이 내뱉은 말들이 나진의 속을 긁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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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위쯤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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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면 서임식 정도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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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가볍게, 선심을 쓰듯 말하는 아게시오의 언동이 나진은 몹시 불쾌했다. 상대가 공작가의 자제쯤 되니 참고 끝까지 들어준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의자를 집어 던지고 나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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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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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진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무렵이다. 나진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급하게 나진을 쫓아온 듯한 파시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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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호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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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만난 그에게 나진이 디에타는 어디로 갔길래, 저딴 싹바가지없는 금발이 앉아있냐고 질문하려던 찰나다. 파시온이 나진에게 무언갈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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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 공자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호의의 표시이니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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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거절하려는 순간이다. 파시온이 나진의 귀에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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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시. 동쪽 외곽 37구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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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파시온을 흘겨봤다. 파시온은 그 말만 남긴 채, 나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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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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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해가 저문 1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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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그곳엔 로브를 뒤집어쓴 파시온이 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파시온은 골목길의 깊은 곳으로 나진을 데리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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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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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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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따로 불러내신 이유가 뭡니까? 디에타 상단주는 또 어떻게 된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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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관해서 해야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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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이 숨을 가다듬고선 로브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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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 일렁이는 작은 등불 아래서 파시온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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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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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가명.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파시온이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으며, 굽힌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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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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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오물이 깔린 바닥에도 개의치 않고 파시온은 제 무릎을 기꺼이 바닥에 닿게 만들었다. 갑옷이 더러워짐에도 그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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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은 결코 가벼운 기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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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 무릎을 꿇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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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예를 안다. 긍지도 안다. 제 주인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알며, 한번 충성을 바친 이를 결코 배반하지 않는 기사다. 그는 디에타의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의 딸아이인 디에타의 수호 기사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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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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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자식만큼은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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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긍지, 그리고 충성심. 세 가지 가치에서 무엇을 가장 높게 치냐는 기사들마다 제각각이다. 그리고 파시온에게 있어서 가장 높은 가치는 충성이다. 충성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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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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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나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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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님께선 함정에 빠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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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인에겐 숨겨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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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알지만, 아게시오를 따라 모험가 도시로 강제로 보내진 파시온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가를 떠나기 직전 오스만 공작이 제 부하와 중얼거리던 말을 엿듣고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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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를 꺾어 망가트려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던 오스만. 뒤이어 그가 부하에게 내렸던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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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앞에선 제 주인이 준비한 숨겨둔 수마저 쓸모가 없어지고 말 테다. 그 사실을 알기에 당장에라도 움직이고 싶지만, 파시온은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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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야 한다. 모든 것이 함정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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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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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부탁임은 알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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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것을 바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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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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