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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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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판단을 잘못했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디에타는 창밖을 바라봤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다.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별채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디에타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정도로 썩었을 줄은 몰랐는데.

디에타가 순순히 이곳까지 온 이유.

그것은 공작가에 반기를 들어봐야 이득 볼 것이 없으며, 오스만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뢰는 등을 믿고 맡길만한 동료나 동반자에게 던지는 신뢰와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동족에 대한 신뢰였다.

자신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자신과 같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동족이자 경쟁자에 대한 신뢰. 디에타가 알고 있는 오스만은 냉철한 정치가이자 장사치였다.

그런 오스만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 들 리가 없을 거라고, 디에타는 판단했을 뿐이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오스만이 내린 판단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혼담? 가치를 높게 평가해? 얻을 수 있는 게 많아?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다.

그 사람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디에타 상단의 성장세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었으며, 머지않은 시일내에 캄브리아를 넘어 외부로까지 뻗어나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디에타 본인과, 상단이 가진 가치는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터.

그런데, 이런 시기에 상단주를 갈아 끼운다?

디에타 상단은 디에타가 있기에 돌아가는, 그녀를 중심으로 한 상단이다. 그녀가 빠지는 순간 상단이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프로젝트는 중지되거나 동결될 것이며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금방 망가지겠지.

공작가의 자금을 들이붓는다 한들 이득을 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손해라는 뜻이다. 디에타가 알고 있는 오스만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도 늙어서 노망이 난 걸까?

그 샛노란 눈동자도 멀어버린 걸까.

디에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지가 날아왔을 때 곧장 찢어버리고, 대립각을 세울 걸 그랬나. 상단이 큰 타격을 입기야 하겠지만······ 지금보다는 쓸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았을 테니까.

‘오스만을 너무 고평가했나.

한숨과 함께 디에타는 창밖을 바라봤다.

마차의 속도는 점점 느릿해지고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었다. 창가에 비춘 제 얼굴을 디에타는 바라봤다.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 서늘한 눈동자.

가면은 건재하다. 여전히 이성을 붙잡고 있다. 감정이 술렁이긴 하나 아직까진 눌러둘 만은 하다. 그러니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아직 숨겨둔 수는 있었다.

타개책은 있다.

쓸 수단도 아직 남아있다.

이딴식으로 상단 하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건 결국에, 디에타가 ‘아르베니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까. 만일 평범한 상단을 공작가가 이딴 식으로 삼키려 들었다간 후폭풍이 불기 마련이다.

‘정치적인 비난. 적대세력의 견제. 그리고 제국법상으로도······.

디에타는 머릿속에서 퍼즐을 짜 맞췄다.

아르베니아 가문에 대한 정보와, 적대 세력, 지금 자신에게 남은 수와 연계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짜맞추기 시작했다.

‘괜찮아. 아직은.

최악의 최악을 대비하는 건 상인의 덕목이다. 디에타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리라. 아직은 뒤엎을 수 있으니까.

끼이익.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문밖에는 기사들이 디에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 기사라는 명목으로 공작이 붙여준 기사들. 말이 호위이지 저들은 감시자에 불과하단 사실을 디에타는 알았다.

제 호위 기사 파시온이 이곳에 없으니까. 공작은 가장 먼저 파시온과 자신을 떨어트렸으니까.

믿을 만한 사람도, 아군도 없다.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다. 디에타는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관리가 안 된 가문의 별채를 바라보는 디에타의 입가가 경련했다.

‘아아.

제 어머니가 목을 매달아 자살한 곳.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이 싸늘한 별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술렁이는 감정을 억누르며 디에타는 별채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게시오 아르베니아.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자제인 그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안다. 적어도, 아게시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간단하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주면 그만이다.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을 저울의 반대편에 올려두면 수평은 알아서 맞춰지는 법이다. 아게시오에겐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권력도, 재력도 충분했다. 아르베니아 공작의 첫째 자식이란 지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

“기사 서임식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러니 아게시오 아르베니아는 확신했다.

“모시는 주인의 작위에 기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법이니, 공작가의 기사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릴 일은 없지 않겠나?”

제 앞에 서 있는 모험가가 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고. 저자는 기사를 동경하지 않은가. 기사라는 작위가 가벼운 것은 아니나, 공작가의 자제인 아게시오에겐 한없이 가벼운 작위였다.

“물론 내 제안이라 해봐야 별것 없다.”

선심을 쓰듯 아게시오는 말했다.

이 자리에서 우위에 있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상대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미끼를 걸어둔 채, 가벼운 요구사항부터 시작해 점차 팔다리에 족쇄를 채워가는 건 아게시오의 특기였다.

미끼를 한번 물면 그걸로 끝이다.

아게시오는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어갔다. 눈앞의 모험가는 이 도시에서 가진 명성도, 그 실력도 출중하다. 삼켜두어서 나쁠 건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내게 협력하고, 내가 이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채 때때로······.”

그러나 그가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몇푼의 금화와 권력, 작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금화를 쫓는 모험가들이 가득한 이런 도시라 한들 별종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진은 별종 중의 별종이다.

명예와 긍지, 그리고 별을 쫓는 이 시대에는 다 사라져가는 멸종위기종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별종들의 특징은 상대가 상상치도 못한 답변을 내놓곤 하는 것이다.

“거절합니다.”

나진이 아게시오의 말을 끊어냈다.

귀족의 말을 끊어낸다는 예의에 벗어난 행위. 캄브리아가 아니었다면 극형에 처할지도 모를 행위다. 그러나 나진의 행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진을 바라보고 있던 아게시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공작가의 자제가 한낱 모험가를 올려다보고, 한낱 모험가가 귀족을 내려다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할 말은 다 했으니 가보겠습니다.”

아게시오가 말을 잇기도 전에 나진은 고개를 돌렸다. 귀족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등을 보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아게시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기사마저 웃진 못했다.

아게시오의 호위 기사, 필레온이 눈을 부릅떴다. 제 주인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워대던 모험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다. 주인이 만류했기에 몇번이나 인내했으나 이건 명백히 선을 넘었다.

제국법으로 극형에 처해도 충분한 상황. 이곳이 캄브리아라곤 하나 귀족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쿠웅!

필레온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우락부락한 체구에서 오는 발걸음은 무겁다. 집무실이 흔들렸다. 앞으로 나서는 필레온을 아게시오는 만류하지 않았다.

“천한, 금화에 눈이 먼 용병 나부랭이가···.”

그가 나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나진이 뒤를 바라본 순간, 그가 나진을 향해 확 손을 뻗었다.

“제 명성에 취해, 제 위치를 망각했구나. 아르베니아 공작가가 우스워 보이더냐?”

필레온이 나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채 위로 들어올리자 나진의 발이 공중에 떴다. 쾅, 하고 그대로 벽에 나진을 밀어붙인 채 필레온이 눈을 부릅떴다.

제 주인이 만류하지 않는 이상, 필레온은 눈앞의 건방진 애새끼에게 적당히 예절을 주입할 생각이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짐승에겐 때로는 매가 약이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게시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기선 제압이 됐을 테지. 그렇게 아게시오가 손을 들어 올려 제 기사를 제지하려던 순간이다.

“야.”

나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제 멱살을 잡은 필레온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먼저 친 건 너다.”

“···뭐?”

용병 나부랭이가 기사에게 반말.

그 사실에 필레온이 분노하는 것보다 먼저, 나진이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필레온의 손목을 비틀며 나진이 멱살잡이에서 빠져나왔다.

“놈!”

눈살을 찌푸린 필레온이 움직이려는 순간이다.

그가 눈치챘을 땐, 갑옷에 나진의 발이 맞닿아 있었다. 복부를 가린 판금에 맞닿아 있는 발.

···어느새?

찰나의 순간 나진의 몸에 흐름이 깃들었다. 한순간의 신체 강화. 한순간에 전신에 마나를 둘러치는, 나진의 마나 운용 속도는 이미 엑스퍼트급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뒤늦게 필레온이 마나를 끌어올리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 있었다.

쩌억!

나진이 굽혔던 다리를 쫙 펴 필레온의 복부를 걷어찼다. 우락부락한 체구의 필레온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대비하지 못한 불시의 일격. 마나를 끌어올리지 못한 채 허용한 일격은 치명적이다.

콰아아아아앙!

몸이 공중에 붕 뜬 채 날아간 필레온이, 집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바닥을 굴렀다. 테이블과 접객용 의자가 박살 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커억!”

장식장을 박살 내며 처박힌 필레온이 숨을 토해냈다. 나진의 발차기에 직격당한 판금 갑옷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필레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나, 예상치 못한 일격에 그는 균형을 잡지 못했다.

제 옆에 날아와 처박힌 필레온을 보는 아게시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가 당황하기를 잠시.

쿵, 쿵쿵···.

소란을 눈치챈 기사들이 계단을 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착한 기사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 상황을 파악했다. 처박혀 있는 필레온과 똑바로 서 있는 나진.

카캉!

기사들이 거칠게 검을 뽑아 들어 나진에게 겨누었다. 제게 겨누어진 검 사이에서 나진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수 있다는 듯이.

“먼저 공격한 건 저자입니다.”

나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이곳은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입니다.”

귀족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표할 것.

그것은 권고사항이지, 법적인 우위를 따져보면 그리 높지 않다. 귀찮은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중앙 길드의 권고일 뿐이니까.

물론 하급의 모험가라면 귀족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최선을 다해 예의를 표해야겠지만.

나진은 녹색 등급의 모험가며, 내일이면 적색 등급으로의 승급이 확정된 모험가다. 중앙 길드에서 신원을 보증하는 인물이며, 때에 따라서는 캄브리아의 법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세력들의 비호를 받을 수도 있는 인물이란 뜻이다.

적색 등급 모험가는 그만한 인력이니까.

“공격을 받았기에 반격했을 뿐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 사이에서도 나진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게시오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더 해볼 거냐?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는데.

그야말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게시오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게시오는 공작가의 권위를 앞세워 지금 이 자리에서 나진을 벌할 수는 있다.

짓밟고, 무릎 꿇려 보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갑작스레 도시에 찾아온 공작가의 자제가, 도시에서 이름을 날리는 상급 모험가를 권위로 무릎 꿇렸다는 말이 돌게 되면 타격을 입는 것은 아게시오 본인이다.

이 도시에서의 입지가 곤란해질 테니까.

그리고, 몹시도 귀찮은 일들이 벌어질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벌인 일인가? 그렇다면 과연 놀라운 일이다. 웃음을 흘리며 아게시오는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검을 무르라는 신호였다.

“충성심이 과한 내 기사가 실례를 범했군.”

아게시오가 나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제안은 긍정적이게 생각해보게나. 아직 시간은 많으니.”

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앞길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밀치고 나진은 건물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게시오는 제 눈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미친놈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박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들개와도 같은 모험가이지 않은가.

“더욱 탐나는군.”

아게시오가 손가락으로 툭툭 테이블을 건드렸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재밌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방금 보여주었던 무력의 수준은 무인과는 길이 먼 아게시오가 보기에도 압도적이었다.

탐이 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 방법을 떠올리며 아게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미끼에 낚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이었으니까.

상단의 건물을 빠져나온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싸가지없어 보이는 금발이 내뱉은 말들이 나진의 속을 긁은 까닭이다.

기사 작위쯤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원한다면 서임식 정도야 뭐.

그런 식으로 가볍게, 선심을 쓰듯 말하는 아게시오의 언동이 나진은 몹시 불쾌했다. 상대가 공작가의 자제쯤 되니 참고 끝까지 들어준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의자를 집어 던지고 나왔으리라.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진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무렵이다. 나진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급하게 나진을 쫓아온 듯한 파시온이 있었다.

디에타의 호위 기사.

때마침 만난 그에게 나진이 디에타는 어디로 갔길래, 저딴 싹바가지없는 금발이 앉아있냐고 질문하려던 찰나다. 파시온이 나진에게 무언갈 건넸다.

“아게시오 공자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호의의 표시이니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거절하려는 순간이다. 파시온이 나진의 귀에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9시. 동쪽 외곽 37구획.”

나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파시온을 흘겨봤다. 파시온은 그 말만 남긴 채, 나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 자리를 떴다.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문 19시.

나진은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그곳엔 로브를 뒤집어쓴 파시온이 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파시온은 골목길의 깊은 곳으로 나진을 데리고 들어섰다.

“그래서.”

나진이 입을 열었다.

“저를 따로 불러내신 이유가 뭡니까? 디에타 상단주는 또 어떻게 된 거고요.”

“그에 관해서 해야 할 말이 있다.”

파시온이 숨을 가다듬고선 로브를 벗었다.

해가 저물고,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 일렁이는 작은 등불 아래서 파시온이 입을 열었다.

“이반.”

나진의 가명.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파시온이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으며, 굽힌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췄다.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골목길.

더러운 오물이 깔린 바닥에도 개의치 않고 파시온은 제 무릎을 기꺼이 바닥에 닿게 만들었다. 갑옷이 더러워짐에도 그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파시온은 결코 가벼운 기사가 아니다.

아무에게 무릎을 꿇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다.

그는 명예를 안다. 긍지도 안다. 제 주인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알며, 한번 충성을 바친 이를 결코 배반하지 않는 기사다. 그는 디에타의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의 딸아이인 디에타의 수호 기사를 자처했다.

그분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자식만큼은 지키기 위해서.

명예, 긍지, 그리고 충성심. 세 가지 가치에서 무엇을 가장 높게 치냐는 기사들마다 제각각이다. 그리고 파시온에게 있어서 가장 높은 가치는 충성이다. 충성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렇기에, 그는 나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디에타 님께선 함정에 빠지셨다.”

제 주인에겐 숨겨둔 수가 있다.

그 사실을 알지만, 아게시오를 따라 모험가 도시로 강제로 보내진 파시온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가를 떠나기 직전 오스만 공작이 제 부하와 중얼거리던 말을 엿듣고 말았으니까.

디에타를 꺾어 망가트려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던 오스만. 뒤이어 그가 부하에게 내렸던 명령.

그것 앞에선 제 주인이 준비한 숨겨둔 수마저 쓸모가 없어지고 말 테다. 그 사실을 알기에 당장에라도 움직이고 싶지만, 파시온은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알려야 한다. 모든 것이 함정임을.”

그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무리한 부탁임은 알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내 모든 것을 바칠 테니.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