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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아르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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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나진의 앞에 나타났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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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진이 중위 사제 볼크만의 의뢰를 받았단 사실과 의뢰의 내용, 그리고 수행 날짜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길드에 심어둔 정보원이 많았으니까. 남은 건 나진의 복귀를 기다리는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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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진이 복귀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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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우연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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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길드에 볼일이 있어서 들렸으며, 아주 ‘우연히’ 그 과정에서 당신과 마주쳤다는 식으로 디에타는 나진에게 접근했다. 그만큼의 수고로움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남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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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거절 안 하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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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장갑을 벗고 내민 맨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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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는 악수를 거절당했지만 이번엔 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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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등급보다 더 높은 의뢰를 받고 싶으신 거 아니에요? 그 부분은 제가 도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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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필요한 걸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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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미소 지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디에타의 손길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나진이 이내 손을 뻗어 디에타와 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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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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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의 개인 접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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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앞에 놓인 찻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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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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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종종 이반이 커피를 내려 먹곤 했었지? 지하도시에선 엄청난 사치품이었는데. 근데 이걸 뭔 맛으로 먹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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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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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의 뜻이죠. 지난번에 제 소개를 해드렸었는데, 기억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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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제 명패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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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디에타 상단의 상단주고, 제 상단은 이 도시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규모도 제법 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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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도 안다. 지난 열흘간 이 도시에서 생활하며 얻은 기초적인 정보에는 디에타 상단의 정보 역시 포함돼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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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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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규모의 상단이며, 도시 외부와의 교류를 책임지는 상단이었다. 모험가들이 팔아치운 마물의 소재를 바깥으로 수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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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상단은 중앙 길드와 제휴를 맺은 상단이랍니다. 그리고, 길드와 제휴를 맺을 만큼 공신력있는 집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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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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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써드릴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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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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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종이를 가리키며 디에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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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수주하는 데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길드에서 매기는 등급. 하지만, 공신력 있는 집단에서 ‘이 사람은 믿을만하다’ 라고 소개장을 써줄 수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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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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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이라고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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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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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실적은 없지만, 위로 올라갈 만한 실력을 지닌 인물. 그런 인물에게 특정한 단체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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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당신의 실력을 저희 디에타 상단이 보증하게 됩니다. 흑색 등급보단 훨씬 높은 등급의 의뢰를 수주할 수도 있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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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진의 앞에 종이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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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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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제안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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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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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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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과 같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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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디에타는 나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담백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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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신이 돈이 될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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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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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이 잘해주는 이유가 뭐겠어요? 금화가 나올 것 같으니까 잘해주는 거지. 당신, 흑색 등급에 오래 머물만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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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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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에 앉아있는 소년의 실력이 고작 흑색 등급에 머물러 있을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 나진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해 확신하진 못하나, 청색 등급에 근접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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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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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시일 내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지. 주어진 단서는 적지만 자신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에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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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이름을 빌려주는 건, 저로서도 굉장한 도박이에요? 당신의 실패가 곧 상단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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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보증을 서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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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죠. 높게 올라갈 만한 사람에게 미리 침을 발라두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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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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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때요? 어차피 당신도 알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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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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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드러내는 게 뭐가 나쁜가? 오히려 의도와 목적이 분명한 편이 더 신뢰가 간다. 순수한 욕망만큼이나 뚜렷한 건 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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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순수한 호의로 접근하는 편이 더 의심스럽지 않나? 그게 더 수상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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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는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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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퍼줘도 나중에 당신이 나 몰라라 하면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뛰어난 인재에게 ‘미리 투자했다’는 인상 정도는 시장에 남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남는 장사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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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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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든, 전 당신에게 투자하고 있는 입장이에요. 당신이 실적을 쌓으면 쌓을수록, 더 많은 것을 투자할 생각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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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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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눈동자가 나진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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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빠르게 등급을 올리는 모험가가 디에타 상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상단의 장비와, 상단의 포션, 상단의 금고를 사용한다··· 이것만으로도 제법 광고가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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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들은 특별한 이들을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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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은 곧 모방으로, 모방은 곧 대상과 같은 물건의 소비로 이어지는 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광고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디에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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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원받아서 좋고, 저는 당신을 모델로 광고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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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제 속내를 모조리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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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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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이용할 거고, 당신도 저를 이용하면 그만이에요. 여기에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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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디에타의 말에 귀 기울이던 나진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디에타는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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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웃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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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신선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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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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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시원하게 목적을 까놓는 사람은 못 만나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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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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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좋습니다. 제게서 도대체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투자하시겠다면야 저야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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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가 꺼낸 보증서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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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어디 등급까지 서주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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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등급까지는 써드릴 수 있지만, 고민 중이네요. 아직 당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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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하고 나진이 제 입가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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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줘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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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나이가 28세잖아? 그럼 편린 정도는 보여줘도 되겠지. 너도 슬슬 드러낼 생각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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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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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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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춤의 칼자루에 나진이 손을 얹은 순간 디에타의 곁에 서 있던 호위 기사 파시온이 반응했다. 검을 뽑는 순간 곧장 달려들 것 같은 파시온의 움직임에 나진은 미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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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드리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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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든 검날을 디에타가 아닌, 바닥을 향해 나진이 늘어트렸다. 그리곤 칼자루를 콱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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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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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외부의 마나를 끌어들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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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가르쳐준 마나 연공법으로 체내에 축적해 둔 소량의 마나. 그 마나를 움직여 나진은 검기를 빚어냈다.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백색의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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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검기의 편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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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검기가 되어, 백금색의 광채가 흘러나오지 않게 주의하며 나진은 힘을 제한했다. 외부에서 대량의 마나를 끌어오지 않았기에 힘을 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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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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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에 맺힌 백색의 광채는 지켜보던 이들의 눈을 부릅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파시온과 디에타가 눈을 크게 뜬 채 나진의 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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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청색 등급은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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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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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등급의 의뢰까지 수행 가능하다는, 상단의 보증서를 받은 나진이 자리를 뜨고 잠시. 접견실에 남아있던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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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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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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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검기였죠?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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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겐 검기의 편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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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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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온전한 검기의 형태를 이루진 않았지만, 한없이 검기에 근접한 광채였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소년의 경지가 소드 엑스퍼트에 근접했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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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상의 나이는 28세이긴 한데··· 솔직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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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쳐줘 봐야 이십 대 초반 같더군요. 얼핏 보면 디에타 님의 또래로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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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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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검기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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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지에 디에타는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조금 전 그 남자의 이름이 정말로 ‘이반’이고 20대 후반의 청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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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쳐도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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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문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는 유망주들이 검기를 뽑아내는 건 빨라도 30대 초반이었으니까. 파시온 역시 아르베니아 가문이 발굴해 낸 천재란 소리를 들었음에도 31세에 검기를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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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남자, 검기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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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만 있다면 완성이 될 겁니다. 늦어도 한두 달 안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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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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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까요? 테첼 산맥의 레인저들은 검기도 뽑아내나요? 그들은 검기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수련을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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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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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은 당황을 감춘 채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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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금 전 나진이 선보인 검기를 가까운 곳에서 보았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디에타는 알 수 없었을 테지만, 파시온만큼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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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검기가 가진 기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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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완전히 검기가 맺히지 않았지만, 검신을 타고 흐르는 백색의 광채는 몹시도 짙었다. 그만큼의 밀도를 지닌 검기의 편린을 파시온은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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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건 부딪쳐 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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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에 불과함에도, 제대로 뽑아낸 검기와 맞부딪쳤을 때 밀릴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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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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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의 보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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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증서를 창구에 보여주자 나진은 청색 등급의 의뢰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게시판에 빼곡히 붙여져 있는 종이를 바라보며 나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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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청색 등급 정도 되면 복잡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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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등급에선 단순히 몬스터를 토벌하거나, 재료를 수집하는 의뢰가 대부분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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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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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개체 ‘외눈의 오크’ 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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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수배범 ‘와이먼’ 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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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등급은 호위 임무부터 시작해, 특수한 마물의 생포나 현상 수배범의 사냥 등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제법 전문적으로 변한 의뢰서를 훑어보던 나진의 시야가 어느 곳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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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괜찮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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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네. 경험을 쌓기에도,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에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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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각을 드러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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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실적을 쌓기에도 적합한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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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걸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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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멀린의 의견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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촥, 하고 나진이 의뢰서를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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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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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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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 바르거? 보고 할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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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수주하신 의뢰, 인원 모집이 마감됐습니다. 인원 명단을 뽑아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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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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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하가 건낸 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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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더미를 대충 쓱쓱 넘기던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종이를 쿡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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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이거? 깜댕이가 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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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댕이. 널리고 깔린 흑색 등급의 모험가들을 낮춰 부르는 멸칭이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이반이라는 사내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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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수주 등급이 청색 아니었어? 깜댕이가 어떻게 의뢰를 수주해? 길드 놈들 일 처리 똑바로 안 한 거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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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 사항을 확인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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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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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가 서류를 마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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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이 보증을 섰다고? 내가 아는 그 디에타 상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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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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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 삼키는 미친년이 있는 거기? 그년이 무슨 일로 남한테 보증을 다 서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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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러낼까 하다가 그 부분이 걸려서 가지고 와 봤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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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의 물음에 여인이 팔짱을 낀 채 툭툭, 손가락으로 팔뚝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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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그 뱀 같은 년이 그냥 보증을 서줬을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긴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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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가 생기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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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새까만 머리칼이 출렁였다. 등허리를 타고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고무줄로 대충 묶으며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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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내버려 둬 봐. 어떤 놈인지 보기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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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벽에 걸린 검들 중 하나를 골라 허리춤에 채우며 제 부하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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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서 괜찮은 것 같으면 확 낚아채 버릴까. 어떻게 생각하냐, 바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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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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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때? 이 바닥에선 좋은 조건 대는 놈이 채가는 게 당연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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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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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럼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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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용병단의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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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다섯뿐인 백각(白角)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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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로젤린 아스칼로가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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