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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나진은 남의 움직임을 흉내를 내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이반이 한두 번 보여준 기술을 곧잘 흉내 내곤 했으며, 한번 보고 배운 것은 좀처럼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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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과 유연성 등 신체적 조건의 부족으로 따라 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한번 본 움직임을 까먹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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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에 대해 나진은 별다른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지하도시를 나오고 멀린과의 대화 속에서 그런 자신이 비정상적임을 나진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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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말야, 그렇게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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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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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밤하늘의 초월자인 성좌가 보기에도 비정상적인 관찰력과 기억력. 다만, 나진의 눈동자는 단순히 그 둘로 분류하기엔 특별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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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보면 머릿속에서 이렇게 그려지지 않나요? 동작이 하나하나 끊어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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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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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를 탈출하기 직전, 이반이 보여줬던 기술을 나진은 종이에 쓱쓱 그려냈다. 하나의 움직임을 여러 장으로 잘게 쪼갠 그림. 그것이 나진이 눈을 부릅뜨면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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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된 움직임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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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된 움직임 수십 장을 이어 붙인 듯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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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움직임을 단계별로 쪼개서 기억하고, 계단을 오르듯이 동작과 동작을 이어 붙여 움직이는 것. 그것이 나진이 타인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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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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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종이에 그려놓은 움직임을 본 멀린이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나진이 그려둔 그림은 대략적인 움직임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힘을 주는 부분, 검의 각도, 숨을 삼키며 들어간 복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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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모두 표현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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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한두 번 봤다고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나진과 비슷한 종류의 천재가 원탁의 기사 중에 하나 있긴 했지만, 그조차 이런 식으로 흉내 내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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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 최강의 기사 갤러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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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 같은 기사조차 감각적으로 남의 움직임을 따라 했지, 나진처럼 완전히 모방하진 못했다. 가령 그림으로 비유를 대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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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해드가 그림의 느낌을 떠올리며 감각적으로 모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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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같은 그림의 위에 종이를 두고, 본을 뜨듯이 모작을 하고 있었다. 정교함의 부분에서 갤러해드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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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보통은 그렇게 못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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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이젠 조금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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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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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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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와 용병들로 붐비는 창구의 한 구석에 앉아 나진은 의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까지는 다소 여유가 남았기에, 나진은 길드의 한구석에 놓여있는 안내 책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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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책자에 실린 것은 이 도시의 랭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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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등급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나진은 가장 상위에 적힌 백각(白角) 등급의 용병 다섯의 이름과 간단한 신상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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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테첼 산맥의 레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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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의 눈, 카프만 테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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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제노벨스 가문의 기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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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리하르트 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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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용병단의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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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로젤린 아스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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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간단한 신상, 그리고 뒷배경이 공개된 건 위의 세명뿐이었다. 남은 둘은 공개하기를 거부했으므로. 당장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이들의 정보를 읽으며 나진은 제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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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각 등급 정도 되면 명예 작위를 얻는다던데, 그게 사실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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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겠지. 소드 시커급의 강자는 내륙에선 그렇게 흔한 게 아니니까. 어지간한 가문의 기사단장이 가능한 강자들이야. 그 정도 대우는 해주는 게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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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급의 강자. 어지간한 가문의 기사단장이 가능하며, 이 도시를 벗어나 제국의 수도로 나가도 한자리씩 꿰찰 수 있는 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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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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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과 오펜이 꿈꿨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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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제 1 목표로 삼은 경지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나진이 가늠해 보고 있을 무렵이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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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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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대충 깎은 듯 까슬까슬해 보이는 턱수염과, 후줄근한 도복 차림의 남자. 그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진에게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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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이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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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의 용병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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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진이 이 도시에서 활동하기 위해 제 스승에게서 빌린 이름이자 위장 신분이었다. 본래 이반의 나이는 마흔 중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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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마흔 중반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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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티가 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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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정한 나이가 28세다. 훗날 검기를 뽑아내며 소드 엑스퍼트임을 증명하더라도, 28세 정도면 음 재능있는 놈이군···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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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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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의자에서 일어서서 사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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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가 이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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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 보이는군. 명패에는 28세의 용병이라 적혀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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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동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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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조금 부럽군. 뭐, 깊게 물어보진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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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씨익 웃으며 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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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볼크만. 검의 교단의 중위 사제이자 소드 엑스퍼트일세. 오늘은 잘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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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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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과 함께 나진은 마차를 타고 초원으로 이동했다. 캄브리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 목적지라고 볼크만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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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의 인근에서 오크 부락이 발견됐다지 뭔가? 그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의뢰를 수주했지. 다른 놈이 채가게 둘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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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의 안에서 볼크만과 대화를 나누며 나진이 깨달은 점이 몇 가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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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었냐고? 아니, 내가 왜? 마을 구할 놈이야 많지 않은가. 나는 오크를 상대로 칼질을 하고 싶을 뿐이라네. 그놈들만큼 경험 쌓기에 좋은 놈들이 또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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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은 말이 제법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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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그놈들 가죽이 보통 질긴 게 아니야. 가죽은 질기고 덩치는 또 크지. 그만한 허수아비가 또 없다 이 말일세. 검기를 쓰지 않고 베기는 몹시 어려우니, 수련하기에 제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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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이면서, 사제 같지 않은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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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은 보통 사제하면 떠올리는 신실하고 고결하며 청렴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다부진 체격과 허름한 도복 등등. 차라리 방랑 검객이라 부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하고 나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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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사제들은 다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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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검’ 의 교단이겠어? 옛날부터 있던 집단인데, 이놈들은 원래 이래. 검에 미쳐 사는 놈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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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단이라 부르는진 모르겠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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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검의 교단은 모시는 주신도 없다고 한다. 제 손안에 들린 한 자루의 검이 곧 자신들이 모시는 신(神)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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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도착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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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볼크만의 대화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고 있자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차는 멈췄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크 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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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도 좋고, 사냥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도 좋네. 오크들의 목을 담을 자루는 챙겨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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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길드에서 받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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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 그럼 어떻게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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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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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까이에서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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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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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이 미소 지었다. 그의 시선은 나진이 허리춤에 채워둔 검과, 나진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 마디에 박혀있는 굳은살. 눈앞의 청년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검사라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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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봐도 좋네. 다만,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게. 위험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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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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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몇걸음의 간격을 유지한 채 볼크만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크 부락의 초입에서 볼크만이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채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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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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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부터 나진은 눈에 힘을 준 채 볼크만을 바라봤다. 볼크만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그의 몸 주변으로 흐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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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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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가볍고 무뎌 보이는 사내의 인상과 달리, 그 손에 쥔 한 자루의 검은 무엇보다도 날카롭게 갈아져 있었다. 검을 쥔 순간부터 볼크만이 두른 기세가 일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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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늘어트린 채 볼크만이 오크 부락에 발을 내디뎠다. 부락의 안쪽에는 넷의 오크와 그들을 따르는 작은 고블린들이 득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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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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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의 존재를 감지한 고블린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것은 고블린,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오크들이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볼크만에게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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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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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숨을 내뱉은 볼크만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다가오는 고블린을 향해 그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단지 하늘과 수평이 되게끔,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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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동작은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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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유지한 채 볼크만은 검을 앞으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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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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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이 고블린의 목을 파고들었다. 고블린의 목을 찌르고 빠져나온 칼끝을 볼크만은 가볍게 옆으로 휘둘렀다. 달려든 두 번째 고블린의 몸이 칼날에 걸려 썰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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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뿌려지는 피 사이로 볼크만이 한 걸음 내디뎠다. 어느샌가 볼크만은 첫 번째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하늘과 수평이 되게 검을 들어 올린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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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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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눈을 부릅뜬 채 볼크만의 자세를 움직임을 관찰했다. 관찰하다 보니 규칙성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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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의 반복,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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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자세를 볼크만은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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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에서 자세가 이어진다. 자세와 자세를 연결하는 행위 자체가 공격이자 곧 방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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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움직임은 놀라우리만치 효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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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를 뽑아내지 않았음에도 볼크만은 최소한의 힘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도륙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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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검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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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나진이 흉내 내던 이반의 검이 묵직하고 강력한 일격을 가진 검이라면··· 볼크만의 검은 정교하고 날카로운, 연속된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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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잡힌 자세와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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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은 찌르기와 베기가 혼합돼 있었다. 동작과 동작이 부드럽게 연결됐다. 적의 움직임과 상황에 따라 일변하는 자세는 마치 하나의 춤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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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검의 교단의 검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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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보고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 보니 나진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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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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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일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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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 정도야 쉽게 베어 넘길 수 있을 테지만, 저 오크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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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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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오크가 볼크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볼크만은 검기를 뽑아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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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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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강하게 움켜쥔 볼크만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땅 위에 볼크만의 발걸음이 어지러이 찍혔다. 그 발걸음이 멈춘 순간 볼크만이 잡은 자세는 여태껏 순환하던 네 가지 자세와는 전혀 다른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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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늘어트린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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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라도 위로 튀어 오를 것처럼 굽힌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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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가 볼크만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는 순간 볼크만이 움직였다. 굽혔던 무릎을 피며 튀어 오르듯이 그가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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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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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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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를 두르지 않았음에도 볼크만의 검은 부드럽게 오크의 가죽을 찢어발겼다. 곤봉을 쥔 오크의 손목을 반쯤 가르며 빠져나온 칼끝은 하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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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면서도 위력적인 올려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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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던진 돌이 땅을 향해 떨어지듯, 칼끝을 비튼 볼크만이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볼크만의 검이 번뜩이고, 오크의 어깻죽지부터 허리에 이르기까지 긴 자상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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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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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피가 튀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진은 혀를 내둘렀다. 정교하고 위력적이며, 또한 아름답다. 검의 교단이 오랜 세월 깎아내고 개량해 온 검술의 정교함에 조금이지만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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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진이 방금까지 자신이 본 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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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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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고개를 돌린 볼크만이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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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나진의 고막을 울리기도 전에 나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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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또한 인기척을 느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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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락에 숨어있던 고블린 셋이 나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빈틈을 찌른 기습이었지만 나진에겐 그리 치명적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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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뛰어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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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을 파고드는 고블린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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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나진의 눈에는 느릿하게 보일 뿐이었으니까. 여유가 있었기에 나진은 검을 쥔 채 머릿속으로 조금 전 보았던 볼크만의 자세를 떠올렸다. 정확한 보법과 정확한 힘의 분배로 만들어지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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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힘을 들여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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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발을 디뎌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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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향으로 검을 들어올려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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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나진의 머릿속에는 정확하게 그려졌다. 그려졌으므로 남은 건 따라 하는 것뿐이었다. 볼크만처럼 검을 고쳐 쥔 채 나진이 한 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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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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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수평이 되도록 들어 올린 검 끝을 나진이 가볍게 뻗었다. 달려들던 고블린의 목이 칼끝에 꿰뚫렸다. 그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진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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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와 자세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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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에서 두 번째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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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이 부드럽게 고블린의 몸을 가르며 지나갔다. 칼끝에 찔린 고블린은 피를 게워 내며 널브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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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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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와 자세를 연결해, 다시 첫 번째 자세로 돌아왔을 때 나진의 곁에는 고블린의 시체 세 구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나진이 짧게 숨을 뱉어내며 검을 늘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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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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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효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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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를 상대할 때 볼크만이 보인 움직임은 아직 흉내 내보진 못했지만, 하다 보면 그것도 될 것 같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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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어정쩡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볼크만이 있었다. 크게 뜨인 볼크만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으며, 그 입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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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 사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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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이 나간 듯한 사제를 향해 나진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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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뒤 보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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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을 향해 달려드는 오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볼크만은 컥, 커흑 하고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눈앞에 오크를 처리해야만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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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저 심정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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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귓가에 멀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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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하고 싶은데 말문이 탁 막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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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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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 괴물 같은 애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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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반응이야 어쨌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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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의 반응을 본 나진은 확신했다. 볼크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겠다는 첫 번째 계획이 성공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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