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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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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숲의 풍경이 아닌 드넓은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진은 몇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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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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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건가. 아니면 꿈이라도 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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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진은 문득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에 멀린과 악수를 나눴던 손. 손등에 별자리가 새겨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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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꿈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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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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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뭐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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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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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심해선 안 됐다. 자신이 떠내려온 강줄기를 따라 추격자가 따라붙을 수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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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남긴 흔적을 정리하던 나진은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도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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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하도시의 위에 지어져 있었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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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런 게 위에 있었구나’ 하고 놀랍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썩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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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곳에 얼마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지 나진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는 도시의 첨탑을 나진은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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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상징과 같은 문양이 걸려있는 첨탑. 저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교단의 등대일까. 그 등대의 생김새를 머릿속에 아로새기고, 언젠가 반드시 무너트려 버리겠노라 다짐하며 나진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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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에 시선을 둘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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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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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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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바깥세상에 나온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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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지식이 나진에겐 전무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어디까지고 도망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소년의 세상은 한순간에 넓어졌지만··· 넓어진 세상에 소년은 마치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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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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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게 펼쳐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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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향하고 어디로 걸어야 할까.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일단은 도시에서 멀어지잔 생각으로 나진이 첫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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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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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손등이 빛났다. 조금 전까진 보이지 않았던 별자리가, 나진의 손등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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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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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렀습니까. 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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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멀린의 성역에서 사라지고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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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손님이 그녀의 성역에 발을 디뎠다. 성역에 발을 디딘 존재는 멀린과 같은 영역에 별을 걸어둔 성좌이자, 마지막까지 원탁을 떠나지 않은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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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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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의 베디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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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박살 난 원탁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는 기사.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믿을만한 기사를 바라보며 멀린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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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할 말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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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와 관련된 일입니까? 그거라면 저도 좀 알아본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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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비어가 호숫가 근처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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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쪽에는 개입이 어려워 알아낸 정보가 한정적이긴 합니다만, 우선 성혈(星血) 교단 쪽에선 알고 있는 정보가 없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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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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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성혈 교단의 처형인이 엑스칼리버를 뽑는,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쪽 교단의 주신이 직접 부정했으니··· 아마 맞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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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다른 쪽으로 접촉을 해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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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던 베디비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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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한정적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희도 교단이나 하나 만들 걸 그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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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땅도, 별의 전장도, 하물며 캄란의 인근도 아닌 내륙. 인간들이 살아가는 그 땅에 이미 승천한 성좌들이 개입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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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몇몇 성좌들은 개입을 위해 교단을 만들었으며, 또 몇몇 성좌들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무력 집단을 만들어 내륙에 배치하곤 했다. 하지만, 멀린과 베디비어를 비롯한 원탁과 관련된 기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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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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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만든 게 아니라 못 만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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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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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지평선의 너머를 향했다. 그곳에서 꿈틀거리는 용의 움직임에 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드리워져 있던 별의 그물이 용을 옭아매 땅에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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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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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의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에서 시선을 돌린 멀린이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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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을 견제하는 것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내륙 쪽까지 어떻게 신경을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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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치곤 요즘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던데요.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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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상 현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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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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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비어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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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이 알아낸 정보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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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의 주인을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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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주인을 찾··· 예? 뭐라고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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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비어가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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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입니까? 제국의 소드마스터? 검의 교단의 검성? 그도 아니라면 그들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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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니야. 나도 처음 보는 애송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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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스물이 된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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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어린 애송이.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애송이가 검을 뽑았노라고 멀린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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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싹수없는 애송이였단 말야? 이렇게 눈 부릅뜨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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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베디비어는 문득 멀린의 얼굴을 흘겨봤다. 위화감이 든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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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는 목소리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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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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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흥미롭다는 듯이. 베디비어가 바라본 멀린의 입꼬리 역시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다, 라고 베디비어는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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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대로라면 새로운 후보자의 등장을 누구보다도 꺼릴 게 바로 멀린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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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서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배반의 기사의 예언을 직접 들은 인물이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기에 멀린은 엑스칼리버를 뽑을지도 모를 후보자들을 꺼려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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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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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다. 머나먼 과거, 왕과 함께 여행했던 그때처럼 멀린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베디비어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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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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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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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하고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더라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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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던 자신 또한 어느새 멀린 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엑스칼리버를 뽑은 소년’의 이야기는 베디비어가 듣기에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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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왕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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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대단하군요. 분명 아직 별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애송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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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별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없어. 진짜로, 그냥 평범한 애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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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풍경을 보고도 견뎌냈다라··· 우리의 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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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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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비어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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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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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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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히죽였다. 아서의 옆에서 기막힌 계획을 세웠던 책략가이자, 길잡이로서의 웃음. 오랜만에 보는 멀린의 웃음에 기뻐할 만도 하지만, 베디비어는 기뻐하기보단 등골이 싸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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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저리 웃을 때는 언제나 사고를 치곤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잘 풀리긴 했지만, 그 과정이 몹시나 힘겨웠음을 베디비어는 기억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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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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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비어가 말을 틀어막는 것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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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짓궂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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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데리고 오려고.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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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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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송이가 있는 곳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잖아. 최소한 별들의 전장까지는 와야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시련도 내리고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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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언제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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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따른 연놈들이 낚아챌지 어떻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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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의식체를 저 아래로 옮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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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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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를 매개로 그 애송이한테 내 의식체를 옮기면, 그 애송이하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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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달리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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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인도할 거야. 각오를 다졌다고, 가장 높은 곳을 향하겠다고 그 애송이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어. 그럼 걸어야 할 길은 하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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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그 소년의 길잡이가 되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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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셨던 왕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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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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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영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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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걷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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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이야기하는 멀린을 베디비어는 말 없이 흘겨봤다. 의식체를 옮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디비어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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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의 권능은 별자리가 걸려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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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성역(星域)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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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의식체를 옮긴다는 건, 성좌로서 가진 권능을 비롯한 격과 무력을 모두 놓아둔 채 떠난다는 것과 같았다. 목소리를 통해서만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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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내륙에 개입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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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일이며 위험한 일이다. 의식체를 담은 소년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다면, 멀린의 의식체마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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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히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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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베디비어는 조언하려 했지만, 멀린의 얼굴을 본 순간 베디비어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이미 결정한 이의 얼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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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해도 안 들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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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디비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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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부른 이유도 잘 알겠습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당신이 하던 일을 대신 맡아달라, 그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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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것 없어. 용이 꿈틀댈 때마다 한 번씩 눌러주면 돼. 별도 남겨두고 갈 테니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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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일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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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짬처리를 맡게 된 베디비어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늘어났지만, 이내 베디비어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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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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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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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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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이 자리를 지켜왔던 별자리들에겐 찰나에 불과한 순간일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멀린이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몸이 별빛이 되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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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사라진 호숫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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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베디비어는 제 갑옷을 매만졌다. 그곳에 새겨진 것은 원탁의 문양이다. 원탁이 주인을 잃고 박살난지가 어언 수백년이다. 그 수백년간 외로이 원탁을 지키던 기사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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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을 기다려 왔는데, 십수 년을 기다리는 게 뭐 대수일까.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지만 베디비어 또한 호기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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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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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보며, 베디비어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손에 붙잡히는 것은 아서에게 하사받은 무기인 새하얀 창이다. 창을 움켜쥔 채 베디비어는 성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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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이 이곳에 도달하는 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자신은 자리를 지켜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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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의 틈새로 빠져나오려는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베디비어는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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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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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의 별자리가 점멸하기를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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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제 손등을 바라봤다. 점멸했던 별자리는 자신이 언제 빛났다는 양, 또다시 사라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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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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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 손등을 문지르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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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문질러도 안보일 걸. 다른 별자리들도 못 보게 숨겨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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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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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칫, 어깨를 떤 나진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봤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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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돌려도 안보이니까 힘 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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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이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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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조금 전까지 듣고 있었던 목소리였기에, 나진은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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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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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당황한 눈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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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예요?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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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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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웃음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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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 지켜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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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깜빡였고,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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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가 아서와 경쟁할 거라면··· 최소한 조건이라도 같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공평한 경쟁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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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과 같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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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나진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 전에, 멀린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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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도 길잡이는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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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걸어야 할 길을 가리키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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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제야 멀린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아서의 여정에는 언제나 조언자 겸 길잡이가 함께했었다. 숱한 기사들이 아서의 뒤를 따라왔지만, 아서의 옆자리만큼은 언제나 한 사람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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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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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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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에서 멀린을 소개하는 문장이었다. 다만 나진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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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 길잡이가 되어주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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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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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싫어하는 거 아니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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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싫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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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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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건 싫은 거고,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넌 내가 내린 시련을 깨트림으로써 자격을 증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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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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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을 지닌 이에게 마땅한 기회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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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을 지닌 이에게 마땅한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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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일대기에서 본 적이 있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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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고 말고를 떠나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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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막막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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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지하도시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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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바깥세상에 대해 무지(無知)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으니, 당연히 어디로 향해야 할지 역시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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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고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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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할 필요 없어. 당연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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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장 조언 좀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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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준다는 걸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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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라. 이반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나진은 짧게 숨을 내뱉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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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지금 저는 쫓기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아마도 죽을 거고요. 움직이면서 자세한 건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은 그냥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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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진이 손을 뻗어 뒤에 있는 도시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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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 최대한 저 도시에선 멀어지는 게 좋습니다. 추격자들을 보내온 게 저 도시고, 제 생김새와 특징은 이미 다 노출된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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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범죄라도 저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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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요. 태어나면서부터 범죄자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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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나중에 다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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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이유로, 당장 어디로든 도망쳐야 할 상황입니다. 괜찮은 길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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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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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안내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를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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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와서야 나진은 숨을 돌렸다. 도시와의 거리도 제법 됐고, 드높게 솟은 나무들이 몸을 가려줘서 숨기에도 적당했다. 잠깐동안 안내를 받은것뿐이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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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로서의 멀린은 제법 뛰어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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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숨기기에 적합하고, 잠시 숨을 돌리기에 최적인 장소를 멀린은 순식간에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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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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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아니 성좌를 도구처럼 부리고 있긴 하지만 나진은 그닥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건 또 뭐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은 고개를 들어 우거진 나무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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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라는 게 이렇게 생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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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도 나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큰 나무는 본 적이 없었다. 제 키의 서너배는 돼 보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진이 새삼 감탄했다. 하여간에 모든 게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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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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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어느 정도 숨을 돌린 것을 확인한 멀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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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니 추격자니 하는 건 뭔 소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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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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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돌린 나진이 멀린의 물음에 답하려는 순간이다. 문득 나진이 말을 멈췄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이 조금 전과는 달랐으니까. 새까맸던 밤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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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색깔이 왜 저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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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늘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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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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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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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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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에 보이는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나무의 높은 곳에 걸터앉은 채 나진이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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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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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한구석이 지하도시에서 늘 봐왔던 광석등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검게 물들였던 어둠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노을빛이 대신했다. 이윽고 지평선 너머에서 둥그런 무언가가 빛을 끌며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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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따스하게 빛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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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정체를 한참이나 고민하던 나진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태양. 지하도시의 주민들이 광석등의 노을빛으로 흉내 내고자 했지만, 결코 흉내 내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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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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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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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태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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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처음으로 일출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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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태양. 하늘이 밝아지며 노을빛이 물러가고 하늘이 푸르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나진은 넋 놓고 바라봤다. 너무나도 신비로운 광경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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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태양이구나,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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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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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태양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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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어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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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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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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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보는 것도, 푸른 하늘을 보는 것도 오늘 처음이라고요. 제가 살던 곳에선 태양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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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땅굴에서 살기라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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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데서 살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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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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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8년의 삶을 보내온 곳. 그곳에 대해 요약하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진이 말을 고르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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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기 어려우면 움직이면서 해. 천천히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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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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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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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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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하는 조건이, 미리 정해둔 목적지랑 부합하는 것 같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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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멀어져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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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들에게 도망쳐야 하고. 노출된 신분을 갈아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한 곳. 우연찮게도 멀린이 미리 점찍어 둔 목적지는 그 모든 것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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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도시, 캄브리아(Camb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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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를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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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나진은 눈을 크게 떴다. 캄브리아, 그 지명은 나진 역시 들어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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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겐 동화책에서 본 거긴 하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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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뽑는 서장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제1장의 무대가 바로 캄브리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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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와 멀린이 조우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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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서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도시였다.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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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의 용이 매장된 곳. 용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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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네. 그걸 누가했는지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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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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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하고, 아서왕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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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과 멀린이 처음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계기다. 한 명의 검사와, 한 명의 마법사가 두 마리의 용을 떨어트렸다는 전설을 시작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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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는 아니지만, 나진은 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글줄로만 접해봤던 동화 속 이야기가 제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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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로 향하기 전에, 딱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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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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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실력 좀 확인하자. 네 수준을 알아야 견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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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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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건 없고. 마나는 다룰 줄 알아? 그것만 봐도 견적이 대충 잡힐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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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잠깐 고민하다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지하도시를 빠져나오는데 제법 신세를 진 호겔 영감의 검이었다. 검을 쥔 채 나진이 검기를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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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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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위로 백색의 광채가, 이윽고 백색의 광채를 뒤따라 금빛의 입자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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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면 될까요? 당장 보여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일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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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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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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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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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말문이 틀어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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