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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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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숲의 풍경이 아닌 드넓은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진은 몇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돌아왔나.

돌아온 건가. 아니면 꿈이라도 꾼 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진은 문득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에 멀린과 악수를 나눴던 손. 손등에 별자리가 새겨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온데간데없었다.

‘진짜 꿈이었나?

꿈이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그거야 뭐 어쨌든······.

나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심해선 안 됐다. 자신이 떠내려온 강줄기를 따라 추격자가 따라붙을 수도 있는 거니까.

자신이 남긴 흔적을 정리하던 나진은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도시를 바라봤다.

아마도 지하도시의 위에 지어져 있었을 도시.

커다란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런 게 위에 있었구나’ 하고 놀랍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썩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저곳에 얼마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지 나진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는 도시의 첨탑을 나진은 노려봤다.

교단의 상징과 같은 문양이 걸려있는 첨탑. 저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교단의 등대일까. 그 등대의 생김새를 머릿속에 아로새기고, 언젠가 반드시 무너트려 버리겠노라 다짐하며 나진은 고개를 돌렸다.

지나간 것에 시선을 둘 시간은 없었다.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지?

이제 막 바깥세상에 나온 나진이다.

바깥의 지식이 나진에겐 전무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어디까지고 도망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소년의 세상은 한순간에 넓어졌지만··· 넓어진 세상에 소년은 마치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드넓은 세상.

드넓게 펼쳐진 들판.

어디로 향하고 어디로 걸어야 할까.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일단은 도시에서 멀어지잔 생각으로 나진이 첫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다.

반짝.

나진의 손등이 빛났다. 조금 전까진 보이지 않았던 별자리가, 나진의 손등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불렀습니까. 멀린.”

소년이 멀린의 성역에서 사라지고 잠시.

새로운 손님이 그녀의 성역에 발을 디뎠다. 성역에 발을 디딘 존재는 멀린과 같은 영역에 별을 걸어둔 성좌이자, 마지막까지 원탁을 떠나지 않은 기사다.

가장 오래된 기사.

외팔의 베디비어.

아서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박살 난 원탁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는 기사.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믿을만한 기사를 바라보며 멀린은 미소 지었다.

“급히 할 말이 있어서.”

“엑스칼리버와 관련된 일입니까? 그거라면 저도 좀 알아본 게 있습니다.”

베디비어가 호숫가 근처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내륙 쪽에는 개입이 어려워 알아낸 정보가 한정적이긴 합니다만, 우선 성혈(星血) 교단 쪽에선 알고 있는 정보가 없는 것 같더군요.”

“교단이?”

“예. 성혈 교단의 처형인이 엑스칼리버를 뽑는,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쪽 교단의 주신이 직접 부정했으니··· 아마 맞을 겁니다.”

그 외에도 다른 쪽으로 접촉을 해봤지만.

그리 중얼거리던 베디비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한정적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희도 교단이나 하나 만들 걸 그랬군요.”

별의 땅도, 별의 전장도, 하물며 캄란의 인근도 아닌 내륙. 인간들이 살아가는 그 땅에 이미 승천한 성좌들이 개입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몇몇 성좌들은 개입을 위해 교단을 만들었으며, 또 몇몇 성좌들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무력 집단을 만들어 내륙에 배치하곤 했다. 하지만, 멀린과 베디비어를 비롯한 원탁과 관련된 기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 만든 게 아니라 못 만든 거지.”

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지평선의 너머를 향했다. 그곳에서 꿈틀거리는 용의 움직임에 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드리워져 있던 별의 그물이 용을 옭아매 땅에 처박았다.

쿠웅······.

지평선의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에서 시선을 돌린 멀린이 말을 계속했다.

“저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을 견제하는 것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내륙 쪽까지 어떻게 신경을 써?”

“그런 것 치곤 요즘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던데요.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면서.”

“···그건, 이상 현상이었으니까.”

멀린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베디비어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당신이 알아낸 정보는 뭡니까?”

“엑스칼리버의 주인을 찾았어.”

“그렇군요. 주인을 찾··· 예? 뭐라고 했습니까?”

베디비어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구입니까? 제국의 소드마스터? 검의 교단의 검성? 그도 아니라면 그들의 제자?”

“다 아니야. 나도 처음 보는 애송이였어.”

이제 막 스물이 된 듯한.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어린 애송이.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애송이가 검을 뽑았노라고 멀린은 이야기했다.

“하여간 싹수없는 애송이였단 말야? 이렇게 눈 부릅뜨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는데······.”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베디비어는 문득 멀린의 얼굴을 흘겨봤다. 위화감이 든 까닭이었다.

‘투덜대는 목소리이긴 한데···.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마치, 흥미롭다는 듯이. 베디비어가 바라본 멀린의 입꼬리 역시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다, 라고 베디비어는 속으로 생각했다.

본래대로라면 새로운 후보자의 등장을 누구보다도 꺼릴 게 바로 멀린이었으니까.

그녀는 아서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배반의 기사의 예언을 직접 들은 인물이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기에 멀린은 엑스칼리버를 뽑을지도 모를 후보자들을 꺼려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웃고 있다. 머나먼 과거, 왕과 함께 여행했던 그때처럼 멀린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베디비어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지만······.

“똑같이 말했어.”

머지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서하고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더라고, 글쎄.”

이야기를 듣던 자신 또한 어느새 멀린 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엑스칼리버를 뽑은 소년’의 이야기는 베디비어가 듣기에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과거 왕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릴 만큼.

“그건 대단하군요. 분명 아직 별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애송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별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없어. 진짜로, 그냥 평범한 애송이야.”

“그런데 그 풍경을 보고도 견뎌냈다라··· 우리의 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멀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베디비어는 미소 지었다.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그래서 말인데.”

멀린이 히죽였다. 아서의 옆에서 기막힌 계획을 세웠던 책략가이자, 길잡이로서의 웃음. 오랜만에 보는 멀린의 웃음에 기뻐할 만도 하지만, 베디비어는 기뻐하기보단 등골이 싸해짐을 느꼈다.

멀린이 저리 웃을 때는 언제나 사고를 치곤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잘 풀리긴 했지만, 그 과정이 몹시나 힘겨웠음을 베디비어는 기억해 냈다.

“잠깐···.”

베디비어가 말을 틀어막는 것보다 먼저.

멀린이 짓궂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직접 데리고 오려고. 이곳으로.”

“···예?”

“그 애송이가 있는 곳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잖아. 최소한 별들의 전장까지는 와야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시련도 내리고 할 텐데······.”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

중간에 따른 연놈들이 낚아챌지 어떻게 알고.

“그러니까, 내 의식체를 저 아래로 옮길 거야.”

“잠시,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그게 무슨···.”

“엑스칼리버를 매개로 그 애송이한테 내 의식체를 옮기면, 그 애송이하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을 수 있겠지.”

그건 달리 말하자면.

“직접 인도할 거야. 각오를 다졌다고, 가장 높은 곳을 향하겠다고 그 애송이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어. 그럼 걸어야 할 길은 하나지.”

멀린이 그 소년의 길잡이가 되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우리가 모셨던 왕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

왕도(王道).

혹은, 영웅의 길.

“그 길을 걷게 만들 거야.”

그리 이야기하는 멀린을 베디비어는 말 없이 흘겨봤다. 의식체를 옮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디비어는 알고 있었다.

성좌의 권능은 별자리가 걸려있는 곳.

즉, 성역(星域)으로부터 나온다.

성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의식체를 옮긴다는 건, 성좌로서 가진 권능을 비롯한 격과 무력을 모두 놓아둔 채 떠난다는 것과 같았다. 목소리를 통해서만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확실히 내륙에 개입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긴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며 위험한 일이다. 의식체를 담은 소년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다면, 멀린의 의식체마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니까.

신중히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베디비어는 조언하려 했지만, 멀린의 얼굴을 본 순간 베디비어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이미 결정한 이의 얼굴이었으니까.

“···더 말해도 안 들을 것 같군요.”

베디비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를 부른 이유도 잘 알겠습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당신이 하던 일을 대신 맡아달라, 그거 아닙니까.”

“어려울 것 없어. 용이 꿈틀댈 때마다 한 번씩 눌러주면 돼. 별도 남겨두고 갈 테니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가장 어려운 일 같습니다만.”

졸지에 짬처리를 맡게 된 베디비어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늘어났지만, 이내 베디비어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는 못합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인간에게는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수백 년간 이 자리를 지켜왔던 별자리들에겐 찰나에 불과한 순간일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멀린이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몸이 별빛이 되어 흩어졌다.

멀린이 사라진 호숫가.

홀로 남은 베디비어는 제 갑옷을 매만졌다. 그곳에 새겨진 것은 원탁의 문양이다. 원탁이 주인을 잃고 박살난지가 어언 수백년이다. 그 수백년간 외로이 원탁을 지키던 기사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수백 년을 기다려 왔는데, 십수 년을 기다리는 게 뭐 대수일까.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지만 베디비어 또한 호기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소년.

그 소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보며, 베디비어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손에 붙잡히는 것은 아서에게 하사받은 무기인 새하얀 창이다. 창을 움켜쥔 채 베디비어는 성역을 떠났다.

그 소년이 이곳에 도달하는 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자신은 자리를 지켜야 할 테니.

봉인의 틈새로 빠져나오려는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베디비어는 움직였다.

손등의 별자리가 점멸하기를 잠시.

나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제 손등을 바라봤다. 점멸했던 별자리는 자신이 언제 빛났다는 양, 또다시 사라진 상태였다.

‘대체 뭐지?

나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 손등을 문지르고 있을 무렵이다.

-그렇게 문질러도 안보일 걸. 다른 별자리들도 못 보게 숨겨둔 거니까.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흠칫, 어깨를 떤 나진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봤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 돌려도 안보이니까 힘 빼지 말고.

히죽이는 목소리.

바로 조금 전까지 듣고 있었던 목소리였기에, 나진은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멀린?”

-꽤 당황한 눈치네?

“이게 뭐예요?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데.”

-뭐긴 뭐야.

코웃음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했잖아. 지켜보겠다고.

나진이 눈을 깜빡였고,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그리고, 네가 아서와 경쟁할 거라면··· 최소한 조건이라도 같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공평한 경쟁이 될 테니까.

아서왕과 같은 조건.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나진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 전에, 멀린이 답했다.

-네게도 길잡이는 있어야지.

영웅이 걸어야 할 길을 가리키는 이.

나진은 그제야 멀린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아서의 여정에는 언제나 조언자 겸 길잡이가 함께했었다. 숱한 기사들이 아서의 뒤를 따라왔지만, 아서의 옆자리만큼은 언제나 한 사람의 것이었다.

길잡이, 멀린.

언제나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길잡이.

동화 속에서 멀린을 소개하는 문장이었다. 다만 나진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제 길잡이가 되어주시겠다고요?”

-그럴 생각인데?

“저 싫어하는 거 아니셨어요?”

-응. 싫어하는데.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고,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넌 내가 내린 시련을 깨트림으로써 자격을 증명했어.

멀린이 담담히 말했다.

-자격을 지닌 이에게 마땅한 기회가 있어야지.

「자격을 지닌 이에게 마땅한 기회를.」

아서 일대기에서 본 적이 있는 문장이었다.

나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고 말고를 떠나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막막했으니까.

당장은 지하도시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나진은 바깥세상에 대해 무지(無知)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으니, 당연히 어디로 향해야 할지 역시 알지 못했다.

“그건 좀 고맙네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 당연한 거니까.

“그럼 당장 조언 좀 구합시다.”

도와준다는 걸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라. 이반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나진은 짧게 숨을 내뱉곤 말했다.

“하나, 지금 저는 쫓기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아마도 죽을 거고요. 움직이면서 자세한 건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은 그냥 들어주세요.”

나진이 손을 뻗어 뒤에 있는 도시를 가리켰다.

“둘, 최대한 저 도시에선 멀어지는 게 좋습니다. 추격자들을 보내온 게 저 도시고, 제 생김새와 특징은 이미 다 노출된 것 같으니까요.”

-···뭐 범죄라도 저질렀어?

“글쎄요. 태어나면서부터 범죄자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운데.”

그것도 나중에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당장 어디로든 도망쳐야 할 상황입니다. 괜찮은 길 있습니까?”


멀린이 안내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를 한참.

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와서야 나진은 숨을 돌렸다. 도시와의 거리도 제법 됐고, 드높게 솟은 나무들이 몸을 가려줘서 숨기에도 적당했다. 잠깐동안 안내를 받은것뿐이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길잡이로서의 멀린은 제법 뛰어남을.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고, 잠시 숨을 돌리기에 최적인 장소를 멀린은 순식간에 찾아냈다.

‘편하긴 하네.

사람, 아니 성좌를 도구처럼 부리고 있긴 하지만 나진은 그닥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건 또 뭐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진은 고개를 들어 우거진 나무를 바라봤다.

‘나무라는 게 이렇게 생겼었구나.

지하도시에도 나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큰 나무는 본 적이 없었다. 제 키의 서너배는 돼 보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진이 새삼 감탄했다. 하여간에 모든 게 새로웠다.

-그래서.

나진이 어느 정도 숨을 돌린 것을 확인한 멀린이 입을 열었다.

-죄인이니 추격자니 하는 건 뭔 소린데?

“그게······.”

숨을 돌린 나진이 멀린의 물음에 답하려는 순간이다. 문득 나진이 말을 멈췄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이 조금 전과는 달랐으니까. 새까맸던 밤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하늘 색깔이 왜 저래요?”

-뭐? 하늘이 왜?

“색이 이상한데.”

-이상··· 하다고?

멀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에 보이는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나무의 높은 곳에 걸터앉은 채 나진이 하늘을 바라봤다.

탁 트인 시야.

하늘의 한구석이 지하도시에서 늘 봐왔던 광석등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검게 물들였던 어둠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노을빛이 대신했다. 이윽고 지평선 너머에서 둥그런 무언가가 빛을 끌며 치솟았다.

밝고 따스하게 빛나는 것.

그것의 정체를 한참이나 고민하던 나진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태양. 지하도시의 주민들이 광석등의 노을빛으로 흉내 내고자 했지만, 결코 흉내 내지 못했던 것.

“저게···.”

나진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게, 태양이구나.”

나진은 처음으로 일출을 목격했다.

떠오르는 태양. 하늘이 밝아지며 노을빛이 물러가고 하늘이 푸르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나진은 넋 놓고 바라봤다. 너무나도 신비로운 광경이었으므로.

-저게 태양이구나, 라니.

멀린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태양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하네.

“처음 봤어요. 오늘.”

-뭐?

나진이 쓰게 웃었다.

“태양을 보는 것도, 푸른 하늘을 보는 것도 오늘 처음이라고요. 제가 살던 곳에선 태양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어디 땅굴에서 살기라도 했어?

“비슷한 데서 살긴 했죠.”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나진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8년의 삶을 보내온 곳. 그곳에 대해 요약하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진이 말을 고르고 있을 무렵이다.

-설명하기 어려우면 움직이면서 해. 천천히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럴까요?”

-그래. 뭐,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말야.

멀린이 말했다.

-네가 원하는 조건이, 미리 정해둔 목적지랑 부합하는 것 같긴 하네.

이 도시에서 멀어져야 하며.

추격자들에게 도망쳐야 하고. 노출된 신분을 갈아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한 곳. 우연찮게도 멀린이 미리 점찍어 둔 목적지는 그 모든 것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Cambria).

그 도시를 알고 있어?

그 질문에 나진은 눈을 크게 떴다. 캄브리아, 그 지명은 나진 역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확하겐 동화책에서 본 거긴 하지만 말야.

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뽑는 서장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제1장의 무대가 바로 캄브리아였으니까.

‘아서와 멀린이 조우한 곳.

그리고, 아서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도시였다.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은······.

“두 마리의 용이 매장된 곳. 용의 무덤.”

-잘 알고 있네. 그걸 누가했는지도 알고 있지?

물론 알고 있다.

“당신하고, 아서왕이겠죠.”

아서왕과 멀린이 처음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계기다. 한 명의 검사와, 한 명의 마법사가 두 마리의 용을 떨어트렸다는 전설을 시작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됐으니까.

그럴 때는 아니지만, 나진은 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글줄로만 접해봤던 동화 속 이야기가 제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캄브리아로 향하기 전에, 딱 하나.

멀린이 말했다.

-네 실력 좀 확인하자. 네 수준을 알아야 견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실력이요?”

-뭐, 별건 없고. 마나는 다룰 줄 알아? 그것만 봐도 견적이 대충 잡힐 것 같긴 한데······.

나진이 잠깐 고민하다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지하도시를 빠져나오는데 제법 신세를 진 호겔 영감의 검이었다. 검을 쥔 채 나진이 검기를 뽑아냈다.

좌악.

검 위로 백색의 광채가, 이윽고 백색의 광채를 뒤따라 금빛의 입자가 피어올랐다.

“이거면 될까요? 당장 보여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일 것 같은데.”

-······.

“저기요?”

멀린은 말이 없었다.

마치, 말문이 틀어막히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