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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갱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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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지하도시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었으며, 이반이 열어준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달리며 나진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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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멍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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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어떤 결심으로, 어떤 생각으로 이 길을 열어주었는지 나진은 모르지 않았다. 나진도 알고 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반이 죽는단 사실을. 이반 또한 어쩔 수 없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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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반은 나진을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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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반이 죽음을 각오했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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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들어올렸던 이반의 얼굴에 머물렀던 고뇌가, 흔들리던 이반의 칼끝이, 자신을 갱도 안쪽으로 떠밀고 입구를 막아섰던 이반의 모습이 나진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나진은 이를 좀 더 세게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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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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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거냐고. 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거냐고. 그 이유를 나진으로선 알지 못했다. 그간의 정으로 이반이 자신을 보내줄 리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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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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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무게를 소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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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마지막까지 무엇으로 남고자 했는지 어린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선택을 한 순간 이반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났음을 소년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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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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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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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탕가의 기사 이반이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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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눈동자로 꿈을 이야기한 어느 기사의 모습은 나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이 지닌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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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벼워질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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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잊어버릴 수도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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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심장을 짓누르는 무게감을 느끼며 나진은 달렸다. 갱도는 어둡고 차가웠으며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광석등의 불빛조차 사라진 어두컴컴한 갱도를 나진은 하염없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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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용병과 별을 쫓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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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의 무게를 짊어진 채 소년은 높은 곳을 바라봤다. 여전히 별은 보이지 않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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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년은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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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밤하늘에 자신만의 별을 새기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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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자신의 별을 걸어두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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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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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쫓아온 추격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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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오랫동안 방치된 낡은 갱도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 그곳으로 소년이 도망쳤단 사실을 짐작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갱도로 들어가 소년을 죽이는 간단한 일뿐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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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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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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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의 입구를 지키고 선 이가 있었으며, 그 존재가 내뿜는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므로. 저 갱도로 들어서기 위해선 저자를 쓰러트려야 함을 추격자들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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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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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들이 하나둘 검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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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자로 알고 있었던 전(前) 기사를 향해 그들은 검을 겨누었으나, 그들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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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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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명예를 잃고 지하도시에 떨어진 반쪽짜리 기사가 아니다. 비록 명예를 잃었을지언정 그는 마지막까지 긍지를 지켰고, 먼 훗날 빛날 별을 위해 제 목숨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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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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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사이고자 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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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하지만, 미련하기에 또한 숭고하다. 그 숭고함을 감히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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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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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뜨지 않는 지하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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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광석등만이 낮게 깔린 죄인들의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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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쫓는 기사, 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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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검에 검기가 휘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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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푸르게 빛나는 검기. 그것은 흔한 색의 검기이며 특별한 것도 없는 검기다. 나진이 쥔 별의 검처럼 지하도시를 환히 밝히지도 못하며, 나진의 검기처럼 별빛을 닮지도 않는 흔해 빠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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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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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쥔 검은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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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으로는 한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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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검을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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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갈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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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반은 저 자신에게 떳떳하게 외칠 수 있었다. 자신이 기사임을. 아탕가의 기사이자 별을 쫓는 기사임을 자랑스레 외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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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에 이반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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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이반을 향해 추격자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추격자들은 열이 넘어가며, 그들이 든 검은 날카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반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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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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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탕가의 긍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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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종자가 이 도시를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신이 소년에게서 빼앗은 만큼의 시간을 돌려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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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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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도 긍지도 모르는 이에게 길을 열어줄 만큼, 나의 긍지는 가볍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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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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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기사 베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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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솟구쳤던 곳에 뒤늦게 도착한 베를로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베를로가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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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낭자한 핏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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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려 나간 팔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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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널브러진 암부들의 시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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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수를 세봐도 스물이 넘어갔다. 이 도시에 투입됐던 암부의 태반이 이 자리에서 명을 달리했다. 크나큰 손실이었으나, 목적만 이룬다면 이 정도 손실은 감수할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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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목적 또한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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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별의 검을 뽑은 소년의 시체는 없었으니까. 베를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이 참상을 만들어 낸 범인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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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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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제 오랜 후배의 모습에 베를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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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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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미련한 짓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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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건넨 호의를 짓밟은 이반에게 베를로는 분노를 느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표정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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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자네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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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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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싸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교단 전체와 싸우기라도 할 셈이야? 이 무슨 미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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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로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일이 꼬였다. 대사제 오를랑께서 맡긴 임무. 이 임무의 책임자는 자신이었고, 이래서야 처벌을 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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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라도 추격을 계속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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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질적으로 검을 뽑아내며 베를로가 한 걸음 내디딘 순간이다. 침묵한 채 미동도 하지 않던 이반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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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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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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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넘는 암부를 한꺼번에 상대하며 그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길게 베인 어깨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뱉는 숨은 거칠고 호흡 또한 일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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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대로 지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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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반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이반이 쥔 검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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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이 그게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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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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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이 그게 뭐냐고 물었소. 명예도 긍지도 버리고 기사단을 떠나길래···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붙잡았나 싶었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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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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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은 게 아니라 목줄을 붙잡힌 것 같은데? 여기 널린 시체들이랑 선배가 다를 게 뭐요? 내 눈에는 똑같은 교단의 사냥개로밖에 안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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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조롱이자 비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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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로의 눈에 핏발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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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그냥 넘어갈 순 없군. 이는 교단에 대한 모욕이다. 그 말을 철회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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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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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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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단을 떠나더니 기사로서의 마음가짐도 잊어버린 모양이요. 잊어버렸다면 이 못난 후배가 직접 알려드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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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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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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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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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은 결투로 씻어내는 것. 명예와 긍지는 검으로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사의 계율(戒律)이다. 교단의 더러운 사냥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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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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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히 선을 넘은 도발.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폭언에 베를로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검기를 뽑아냈다. 이반의 것과 같은 싯푸른 검기. 그러나, 이반의 것처럼 빛나지는 않는 검기가 베를로의 검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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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감은 채 베를로가 이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이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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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밀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지만 방심해선 안 됨을 베를로는 알았다. 궁지에 몰렸다 한들 이반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 눈빛에서 베를로는 섬뜩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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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각오한 자가 내뿜는 기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검을 놓지 않기를 맹세한 이의 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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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검기의 편린이 튀어 오르고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어느 기사가 흘리는 피였고, 또한 기사의 삶이었다. 검을 맞부딪치며 이반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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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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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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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시간은 번 거다. 빌어먹을 종자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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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셔야 할 기사를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게 만드는 종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딨을까. 하여간 빌어먹을 애송이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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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이반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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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그는 기사일 수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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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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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이 떨어지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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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르게 떨어지는 절벽에 말뚝을 박아 넣으며 나진은 땅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미끄러운 절벽과 물방울에 손이 미끄러져도 몸에 묶어둔 밧줄과, 몸의 반동을 이용해 나진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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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된 전투에 지친 몸이었지만 나진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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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절벽에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물길이 나진의 눈에도 보였다. 마지막까지 나진은 신중히 절벽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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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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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착지한 나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말뚝을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손바닥을 펼쳐보니 살갗이 다 벗겨져 있었다.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붕대로 묶은 나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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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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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듯이, 다만 한 방향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를 나진은 말없이 바라봤다. 자신이 태어났고 유년기를 보냈던 지하도시. 그곳에서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곱씹으며 나진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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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야 할 곳은 흐르는 물길이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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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달리기 시작한 이상 멈춰설 수도, 돌아설 수도 없었다. 흐르는 물길이 어디로 향할지는 나진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 별이 있으리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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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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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곳은 길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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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끝났고 벽이 나진을 가로막았지만,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오펜은 말했었다. 길의 끝에서 숨을 참고 잠수하라고.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하기에 나진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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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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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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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물길에 제 몸을 맡겼다. 거친 물살이 나진을 휩쓸었다. 휩쓸리는 물살 속에서 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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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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휩쓸리다 못해 몸이 가라앉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했을 때 나진은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의 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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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에 무언가 비춰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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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반짝이는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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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향해 나진이 움직였다. 가라앉는 것만 같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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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허억···!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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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 위로 고개를 든 나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나진은 천천히 강가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몇번이고 강가에 튀어나온 돌뿌리를 붙잡기를 실패하고, 몇번이고 돌뿌리에 몸을 긁히고 나서야 나진은 간신히 물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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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쑤셨다. 차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나진은 물에 젖은 채로 강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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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들판에 누워 숨을 몰아쉬던 나진은 깨달았다. 조금 전 수면에 비춰 보이던 빛이 무엇이었는지. 몇번이고 눈을 깜빡인 나진은 18년 생에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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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게 펼쳐진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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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수많고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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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에서 읽었던 어떤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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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올려다본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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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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