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99 lines
16 KiB
Markdown
299 lines
16 KiB
Markdown
|
||
크륀벨이 창을 내질렀다.
|
||
|
||
단순한 문장이지만 크륀벨이란 이름에 담긴 무게를 감안하면 이 문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크륀벨은 한 자루의 창으로 초월에 오른 무인이다. 소드마스터가 검을 휘둘렀다, 라는 문장이 가진 무게감만큼이나 ‘크륀벨이 창을 내질렀다’라는 문장이 가진 무게는 무거웠다.
|
||
|
||
그가 발을 내려찍을 적 폭풍이 몰아쳤고, 팔을 앞으로 뻗을 적 폭풍이 창대에 휘감겼으며, 그 창이 일직선으로 허공을 꿰뚫은 순간.
|
||
|
||
창끝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
|
||
|
||
충각(衝角).
|
||
|
||
크륀벨이 가진 최강의 일격. 설령 그 창날에 더는 심상이 담기지 않으며, 그가 더는 초월자가 아니게 됐다 한들 그 기술만큼은 빛바래지 않았다. 단지 그 기술을 견딜 무기가 없었기에 쓰지 못했을 뿐이다.
|
||
|
||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르다.
|
||
|
||
그의 손에는 십자별 창이 들려있다.
|
||
|
||
제국의 명장들이 단조했고 크륀벨이 이뤄낸 위업이 깃든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창. 제 주인의 손에 들린 창은 크륀벨의 기술을 온전히 견뎌냈다. 십자별의 형상을 띤 창날은 제 주인을 위해 반짝였다.
|
||
|
||
그리하여 완성된 기술은 이해를 거부한다. 으레 초월자들이 타인의 이해를 거부하듯, 크륀벨이 펼친 기술도 마찬가지다. 1초를 잘게 쪼개, 찰나의 시간을 쪼개며 내지른 쾌속의 찌르기는 한순간이지만 투구기사의 반응속도를 상회했다.
|
||
|
||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
||
|
||
땅을 헤집고, 가로막는 것들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며 폭풍은 다가온다.
|
||
|
||
뒤늦게 투구기사가 반응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옆에 있던 창대를 움켜쥐고 폭풍을 향해 휘둘렀지만, 창대는 박살 났고 폭풍에 휩쓸린 투구기사는 옆으로 내던져졌다.
|
||
|
||
마치, 내 앞에서 비키라는 것처럼.
|
||
|
||
애초에 폭풍이 노리는 것은 투구기사가 아니었다. 그 뒤에 서 있던 나진이었다. 투구기사가 위력을 조금이나마 줄였다고 한들, 크륀벨이 펼친 충각은 초월자의 일격에 비견될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나진이 받아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
||
|
||
까득.
|
||
|
||
하지만 나진의 눈동자, 그 눈동자와 반응속도만큼은 초월자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다.
|
||
|
||
하물며 저 충각이란 기술은 투구기사를 통해 몇 번이고 본 기술이다. 쳐내거나 회피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받아내는 것이라면 아슬아슬하게······.
|
||
|
||
‘아.’
|
||
|
||
그러나 자신의 검기와 폭풍이 맞부딪친 순간,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나진은 깨닫게 됐다. 착각이었다.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
투웅.
|
||
|
||
나진의 발이 공중에 떴다. 폭풍이 검기에 닿은 순간 나진의 검기가 실낱처럼 풀어 흩어졌다. 검을 쥔 손가락이 부러졌다. 기술을 받아내기 위해 검면을 지탱했던 팔이 ‘우득’ 소리를 내며 비틀렸다.
|
||
|
||
드드드드드드드득!
|
||
|
||
갈려 나간다. 검기가, 나진의 몸이, 폭풍의 경로에 있는 것들이 전부. 폭풍에 휩쓸려 뒤로 내던져지며 나진은 보았다. 폭풍이 지나간 곳에는 곱게 갈린 먼지만이 흩날리고 있는 것을. 그리고, 견디지 못한다면 자신도 저것과 똑같은 꼴이 될 거란 사실을.
|
||
|
||
까득, 나진이 이를 악물고 검을 놓지 않았다. 심장이 요란스레 박동하며 쉴 새 없이 검에 검기를 불어넣었다. 이 검기가 완전히 흩어진다면 검이 부러지고 제 몸이 꿰뚫릴 게 분명했다.
|
||
|
||
‘버텨라, 버텨라, 버텨라······.’
|
||
|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줄다리기에서 승리한 것은 나진의 검기다. 폭풍이 흩어지며 마지막으로 나진을 떠밀었다. 콰앙, 소리를 내며 나진이 바위에 처박혔다.
|
||
|
||
후두두둑.
|
||
|
||
무너진 돌무더기가 나진의 머리를 두들겼다. 팔은 부러졌고, 눈과 코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컥, 하고 막힌 숨을 토해내자 검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
||
|
||
속이 엉망이 된 모양이군.
|
||
|
||
숨을 쉬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고작 일격. 일격에 나진의 몸은 걸레짝이 됐다.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푸른 머리칼이 나진의 앞에서 흔들렸다. 나진의 길잡이, 멀린이었다.
|
||
|
||
까득.
|
||
|
||
그녀는 제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멀린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으며, 하늘을 향해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눈치. 나진은 그 모습에 쓰게 웃었다.
|
||
|
||
‘멀린.’
|
||
|
||
-아.
|
||
|
||
나진과 멀린의 눈동자가 마주했다. 그제야 흔들리던 멀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
||
|
||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 멀쩡합니다.’
|
||
|
||
-너, 너 진짜······.
|
||
|
||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시려고?’
|
||
|
||
-내가 진짜 미치겠다, 응? 미치겠어 진짜.
|
||
|
||
멀린이 신음했다. 그녀가 간신히 숨을 가다듬으며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진의 선택을 존중해 참견을 안 하고 있다곤 하지만, 가슴을 졸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
||
|
||
함께 사경을 넘나들었던 아서 때와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나진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비틀거리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
||
|
||
‘그래도,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
||
|
||
-뭐?
|
||
|
||
‘알 것 같다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
||
|
||
나진은 잠시 눈을 감고 조금 전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나진의 머릿속에서 크륀벨의 동작 하나하나가 분해되고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
||
|
||
투구기사가 선보인 충각.
|
||
|
||
그리고, 크륀벨이 내지른 충각.
|
||
|
||
둘 사이의 차이점을 나진은 불현듯 깨닫는다. 나진이 투구기사에게 배운 충각의 원리와 동작, 그리고 그것들을 크륀벨이 어떻게 변형해 사용했는지 나진은 제 머릿속에서 정리해 나갔다.
|
||
|
||
제 아무리 초월자의 기술이라 한들······ 같은 기술을 반복해서 눈에 담다 보면, 하물며 몸으로 직접 흉내를 내본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진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
이제야 좀 알 것 같았으니까.
|
||
|
||
2.
|
||
|
||
크륀벨의 창을 받아내며 투구기사는 크륀벨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더 빨리 반응했어야 했는데. 그는 나진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렸다. 분명 저 바위였는데.
|
||
|
||
쿨럭, 컥······.
|
||
|
||
그곳에는 피를 게워 내고 있는 나진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진은 만신창이였다.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 투구기사는 신음하며 나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진을 데리고 도망칠 작정이었다.
|
||
|
||
그러나, 나진은 그 손을 붙잡지 않았다.
|
||
|
||
“비키십시오.”
|
||
|
||
그렇게 말했을 뿐.
|
||
|
||
커헉, 퉷.
|
||
|
||
피를 게워 내며 나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킬 때마다 으득, 드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나진은 발을 내려찍어 뼈를 맞췄다. 어깨를 맞추고 손가락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
||
|
||
아니, 저걸 뼈를 맞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조립하는 것에 가까웠다. 가공할 재생력에 의지해 나진은 제 몸을 조립하고 있었다.
|
||
|
||
“비켜요. 앞 가리지 말고.”
|
||
|
||
“뭐?”
|
||
|
||
“상대가 안 보이지 않습니까.”
|
||
|
||
머리에 피가 오른 나진은 예의 따위 집어 치운 채 투구기사에게 손짓했다. 내 앞에서 비키라는 손짓이었다.
|
||
|
||
“너, 그 몸으로 다시 싸우겠단 거냐?”
|
||
|
||
“못 할 건 또 뭡니까. 저쪽은 머리 없이도 싸우는데.”
|
||
|
||
“무모하다.”
|
||
|
||
“원래 무모함과 위업은 한 끗 차이인 법입니다.”
|
||
|
||
“너 지금······.”
|
||
|
||
더 말하려던 투구기사는 나진이 검을 늘어트린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진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나진의 검기는 조금 전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
||
|
||
“이제야 좀 알 것 같단 말입니다.”
|
||
|
||
나진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
|
||
“그러니까, 비키십시오.”
|
||
|
||
백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투구기사를 빤히 바라봤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에선 여전히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진은 시선으로 말했다.
|
||
|
||
방해하지 말라고.
|
||
|
||
아직 결투는 끝나지 않았으며, 내겐 상대가 보인 최선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
||
|
||
“허.”
|
||
|
||
투구기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
||
|
||
“미친놈이로군.”
|
||
|
||
“이제 아셨습니까?”
|
||
|
||
입가를 틀어 올린 채 나진이 투구기사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그 걸음을 투구기사는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초월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애송이가 내뿜는 기세에 밀렸다. 그 사실을 투구기사는 인정해야만 했다.
|
||
|
||
탁.
|
||
|
||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채 나진이 크륀벨을 노려봤다. 크륀벨 역시 여전히 나진을 보고 있었다. 그 창끝은 투구기사가 아닌 나진을 향해 있었으며, 크륀벨 또한 이 결투의 결판을 짓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
||
|
||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
||
|
||
당신이 망자든, 망성이든, 추락한 별이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적어도 나와 검을 맞부딪치는 동안 당신은 기사다. 당신이 그러려 하지 않아도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
||
|
||
나진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
|
||
그리곤, 소리쳤다.
|
||
|
||
“크륀벨——!”
|
||
|
||
상대를 호명하며 나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
||
|
||
들어 올린 검 끝은 크륀벨의 심장을 겨눴다.
|
||
|
||
“오십시오.”
|
||
|
||
나진이 미소 지었다.
|
||
|
||
입꼬리를 틀어 올린 채, 핏발이 선 눈동자로 오직 크륀벨만을 바라보며 소년은 선언했다. 와라. 당신이 가진 최강의 일격으로.
|
||
|
||
“이번에는 정면에서 박살 내드릴테니.”
|
||
|
||
나진의 선언을 크륀벨이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진의 동작에 담긴 의미와, 그 목소리의 열기만큼은 크륀벨에게 닿았다. 크륀벨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
||
|
||
완벽한 자세. 강렬한 기백. 일대를 찍어 누르는 압박감.
|
||
|
||
그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도 나진은 결코 자신(自身)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자세를 잡았다. 자신보다 강한 적에게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은 오만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다.
|
||
|
||
하지만, 본래 무모함과 위업은 한 끗 차이다.
|
||
|
||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은 채 도전하는 이들만이 초월에 오른다. 나진은 결코 물러서지 않은 채 눈앞의 적에게 도전했다.
|
||
|
||
나진이 가진 첫 번째 별, 도전의 별이 빛났다.
|
||
|
||
도전(挑戰)이란 정면에서 상대를 맞서는 것.
|
||
|
||
새로운 위업을 써 내리려는 제 주인을 위해 별은 기꺼이 빛을 흩뿌렸다. 나진의 검기에 별이 깃들었다.
|
||
|
||
3.
|
||
|
||
충각(衝角).
|
||
|
||
금빛 뿔 기사단의 대표 격인 기술.
|
||
|
||
이는 머나먼 옛적 바다를 항해했던 그들의 선조에게서 유래 된 기술이다. 그들의 선조는 바람을 벗 삼아 망망대해를 가로질렀다. 그들의 뱃머리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빛 뿔의 유래이기도 했다.
|
||
|
||
나아가라. 나아가라. 나아가라.
|
||
|
||
바다를 가로질러, 빙하를 꿰뚫고, 가로막은 것들을 뿔로 들이받아 부수며 앞으로 나아가리라.
|
||
|
||
뱃머리에 매단 금빛 뿔은 그들이 최초로 손에 쥔 창이었고, 무기였으며,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꿰뚫을 수단이었다. 뱃머리로 냅다 들이받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에 그들은 충각(衝角)이란 이름을 붙였다.
|
||
|
||
그것이 금빛 뿔의 유래이자.
|
||
|
||
충각이란 기술의 시작점이다.
|
||
|
||
수많은 세월이 흘러 그 이야기와 금빛 뿔의 유래는 잊혀졌고, 그들의 의지를 이은 금빛 뿔 기사단조차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
||
|
||
쿠웅.
|
||
|
||
이곳에 역사의 산증인이 있다.
|
||
|
||
그의 이름은 크륀벨이다. 그의 호(號)는 침묵의 기사이며, 그의 별에 붙은 이름은 호각성(號角星)이었고, 그의 소속은 금빛 뿔 기사단이다.
|
||
|
||
크륀벨은 십자별의 창을 움켜쥐었다.
|
||
|
||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금빛 뿔 기사단을 동경했다. 제국의 깃발을 내걸고 질주하는 그들의 함성에 매료됐으며, 단장이 들고 있던 십자별 창에 마음을 빼앗겼다.
|
||
|
||
크륀벨은 자신을 단련했고, 기사가 됐으며, 금빛 뿔 기사단에 입단했다. 수많은 위업을 세우고 기사단장에게 인정받아 그의 부관이 됐다. 본래 단장만이 쥘 수 있는 십자별의 창을, 기사단장은 기꺼이 크륀벨에게 하사했다.
|
||
|
||
기사단장은 자신은 창보다 검을 더 잘 다룬다며 변명하긴 했지만, 그가 창을 넘긴 의미를 크륀벨은 모르지 않았다.
|
||
|
||
다음 기사단장은 너다, 크륀벨.
|
||
|
||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
|
||
|
||
정말이지 영광스러운 나날이었다. 크륀벨은 뿔피리를 불며 진군했다. 제 단장을 따라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
||
|
||
그러나 끝은 다가오는 법이다.
|
||
|
||
「죽음이 어째서 고결해야 하나요?」
|
||
|
||
여인이 미소 지었다.
|
||
|
||
「삶은 하나의 희극,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두 광대극에 불과하답니다. 그리고 소인은, 본인은, 본녀는, 저는, 나는, 죽음이 어째서 고결하고 정적이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
|
||
여인이 광소했다.
|
||
|
||
「어째서 웃지 않나요? 어째서, 춤추지 않나요?」
|
||
|
||
여인이, 손짓했다.
|
||
|
||
「웃어요. 노래합시다. 춤춥시다. 떠듭시다. 악기를 켜세요. 요란하게! 삶은 희극, 죽음조차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이 지옥아래 환락(歡樂)만이 유일한 가치이리라!」
|
||
|
||
광대들이 춤추었다. 웃음소리가, 노랫소리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악기들의 소리가······.
|
||
|
||
투욱.
|
||
|
||
크륀벨의 목이 떨어졌다. 목이 떨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저따위 광대놀음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떨어진 목을 절단면에 붙인 채 그는 질주했다.
|
||
|
||
금빛 뿔 기사단은 멈추지 않는다. 진군하라. 나아가라. 적을 꿰뚫어라. 우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
||
|
||
몇 번이고 머리가 떨어졌다. 머리가 짓뭉개지고, 몸이 불타고, 육신이 가루가 되도록 그는 진군했다. 제 몸에 드리우려는 실들을 끊어내며 그는 포효했다. 광대들의 웃음소리와 악기 소리를 떨쳐내고자 호각성은 뿔피리를 불었다.
|
||
|
||
뿔피리를 불어라. 나아가라. 적을 꿰뚫어라······.
|
||
|
||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는 잊어버렸다. 스스로를 잊어 그는 망자가 됐다. 빛나던 여섯 개의 별은 추락해 검게 물들었다.
|
||
|
||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소리친다.
|
||
|
||
‘뿔피리를 불어라. 나아가라. 적을 꿰뚫어라.’
|
||
|
||
호각성이 뿔피리를 불었다.
|
||
|
||
침묵의 기사가 땅을 내려찍었다.
|
||
|
||
크륀벨이 창을 뻗었다.
|
||
|
||
충각(衝角).
|
||
|
||
창을 내지르는 순간만큼은 그는 기사였다. 그 창날이 향하는 자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크륀벨은 기사일 수 있었다. 무릇 결투의 의미란 맞부딪치는 상대가 결정짓는 것이었으므로.
|
||
|
||
밀어닥치는 폭풍에 나진은 정면으로 달려든다.
|
||
|
||
그 눈동자는 폭풍의 궤도를 읽는다. 두 다리는 땅을 박차며 앞으로 질주한다. 들어 올린 검은 새하얗게 번뜩이며 크륀벨의 창을 빛나게 만들었다.
|
||
|
||
겨루어보자.
|
||
|
||
나의 검이 당신의 폭풍을 가를지, 당신의 폭풍이 나를 꿰뚫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