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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 본명은 하칸테 카나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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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연금술사다. 그것도 골방에 처박혀 항아리 앞에서 국자나 저어대는 치유 학파 연금술사가 아닌 선혈 학파 소속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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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혈(鮮血)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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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매개로 하는 연금술을 다루는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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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몸에 칼날보다 더 위험한 것이 흐르는 이들이라고.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었던 하칸은 소리 내 웃으며 이렇게 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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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정확한 평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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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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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제 피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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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뿌린 피가 땅에 닿는 순간 기화했다. 증기로 변한 핏물이 골목길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이는 하칸이 조합해 낸 일종의 도핑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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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과 반응속도를 포함한 신체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흥분 상태에 빠트리는 도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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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중독자들의 몸에 투약해 둔 약물과 도핑 성분이 반응했다. 도핑 성분이 가득한 안개 속에서 호흡한 순간 중독자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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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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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빠른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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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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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호흡하며 하칸이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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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자신에게야 부작용이 없는 도핑제이나, 그녀를 제외한 이들에게 이 도핑제는 양날의 독이나 다름없었다. 빨아들인 순간 극적인 강화와 고양감을 가져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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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중독자들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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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몸에서 뿌득, 뿌드득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소리. 그것이 이 도핑제의 부작용이었다. 강화와 동시에 육체가 망가지기 시작하니까. 아마 몇분만 지나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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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자면 단기 결전용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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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이반에게 쓰려고 아껴뒀던 것이나, 소년이 빛을 보인 이상 이 자리에서 묻어버려야 했다. 저 소년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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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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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의 벽을 박차고 달려든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백색의 광채를 끌며 휘둘러진 검날이 한 번에 셋의 몸을 갈랐다. 도핑의 효과로 육체 능력이 강화됐음에도 중독자들은 나진의 검에 반응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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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약의 힘을 빌려 빨라진 만큼, 나진 역시 마나의 도움을 받아 가속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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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가속된 몸이 어색한지 나진은 중간중간 검에 휘둘리듯 움직였지만, 무서운 속도로 중독자들을 도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벽과 벽을 박차며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모습은 묘기를 부리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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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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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잘린 팔과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것들이 폭발하려는 순간, 나진은 그들의 몸을 엎어치듯 내던지고 발로 걷어찼다. 그 모든 움직임이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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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찰 때 더는 탁,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쾅, 하고 땅을 깨부수며 나진은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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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어어어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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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중독자들은 몇이 베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나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자신을 향해 뛰어오르는 중독자 무리를 흘겨보던 나진이 처음으로 뒤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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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후퇴를 위한 도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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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크게 도약한 나진이 착지와 동시에 쿠웅, 하고 발을 땅에 깊게 파묻었다. 등 뒤로 검을 늘어트리곤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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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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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뒤로 물러서며 만든 것은 도움닫기를 위한 공간이다. 그를 알지 못한 중독자들이 나진을 향해 한걸음 내디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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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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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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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좇는 것조차 어려운 순간적인 가속. 백색의 검기가 마치 유성처럼 꼬리를 물며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그리곤, 베야 할 것의 앞에 도달한 순간 나진이 검을 휘두르며 허리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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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에서 해선 안될 수평 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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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진의 칼날은 벽에 닿은 순간 튕겨 나가지 않고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조금의 걸림도 없이 벽을 가르며 칼날이 튀어나왔다. 검기의 절삭력은 더는 나진을 지형에 구애받지 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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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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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휘둘러진 검이 나진의 앞길을 가로막는 중독자들을 모조리 잘라냈다. 몸이 잘려 허물어진 그들의 시체가 부르르 떨기도 채 전에, 나진이 땅을 박차고 다시 한번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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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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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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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여파마저 추진력 삼아 나진이 나아간 곳에는 하칸이 있다. 단숨에 지휘권자인 하칸을 노리는 것. 그것은 나진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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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었지만, 나진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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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연금술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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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선혈 학파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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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하칸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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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정보를 통해 내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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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을지언정 옳지는 않다. 하칸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나진은 보았다. 하칸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음을. 그것은 궁지에 몰린 자가 지을만한 웃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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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 반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냥꾼이 지을만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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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혈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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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매개 삼아 연금술을 부리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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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골목길에는 피가 가득했다. 수십의 중독자들이 흘린 피. 그들이 폭발하며 사방에 흩뿌린 피. 나진이 발을 내딛는 곳에도 피가 가득했으며, 나진이 쥔 검 역시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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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들은 하칸의 피로 만든 안개와 약을 마셨기에, 그들이 흘린 피에는 하칸의 피가 섞여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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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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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혈 학파 연금술사 하칸테 카나리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촉매(觸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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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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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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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골목길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방에 깔린 핏물을 촉매 삼아 하칸이 사용한 연금술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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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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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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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음과 함께 골목길이 뒤흔들렸다. 중독자들을 터뜨린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폭발이 골목길을 집어삼켰다. 충격파에 휩쓸린 벽이 무너지며 돌바위들이 쿵, 쿠웅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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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오르는 흙먼지와 뜨거운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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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은 손을 휘저어 시야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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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것은 난장판이 된 골목길의 풍경과, 충격파에 떠밀려 골목길의 바깥에 내던져진 소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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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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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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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한 폭발에 휩쓸렸음에도, 소년이 여전히 두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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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지탱한 채 나진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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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순간에 팔을 끌어당겨 얼굴을 보호하기라도 한 듯, 한쪽 팔은 축 늘어져 있었지만 얼굴은 멀쩡했다. 노을빛으로 물든 눈동자는 여전히 하칸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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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끼치는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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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칸이 본 적이 있는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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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자신을 이 도시에 처박았던 아탕가의 기사가 딱 저 소년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에 하칸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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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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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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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버티는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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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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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눈동자를 파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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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한 숫자의 중독자를 소모했음에도, 여전히 하칸에겐 많은 군세가 남아 있었다. 자그마치 17년을 준비한 계획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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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녀의 뒤 뿐만이 아닌 시가지의 곳곳에서 나진을 향해 중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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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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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검을 고쳐 쥘 뿐이었다. 나진의 검에서 솟구치는 검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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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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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끝장내고, 그 기분 나쁜 눈동자를 파버릴 생각에 미소 짓던 하칸은 어느 순간부터 웃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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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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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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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궁지에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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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둔 수를 썼고, 체력을 소모시켰으며, 폭발에 휘말리게 해 팔 한쪽을 부러트렸다. 얼핏 보아도 소년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소년은 만신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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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 더 빨라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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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은 눈앞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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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이제는 정면만이 아닌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독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악화된 전황. 부상을 입어 더욱 고되진 전투. 그러나 나진은 오히려 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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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된 몸이 어색한지 종종 검에 휘둘리듯 움직이던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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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순간에 마나를 다루는데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나진은 오히려 속도를 더 올리고 있었다. 더 빨라진 움직임으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중독자들을 베어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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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그 자식, 대체 뭘 숨겨두고 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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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상하다. 너무나도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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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이대에 저만한 움직임을, 하물며 검기까지 뽑아낼 수 있는 이가 있었던가? 검사들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하칸이 보기에도 이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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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의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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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육체에 반비례하듯 더욱 찬란히 빛나는 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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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검에서 깃든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편린을 넘어서 완전한 검기의 형상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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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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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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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빠르고 간결하며 효율적으로 변해가는 움직임. 소년은 중독자들을 베어 넘기며 길을 열고, 하칸이 피를 촉매 삼아 연금술을 쓰려는 순간 몸을 던져 범위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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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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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칼을 거칠게 휘둘러 묻은 핏물을 떨쳐내는 소년의 모습에 하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연금술에 반응하는 소년의 모습은 놀랍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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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 빠르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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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이 빠르다. 기괴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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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간 따라잡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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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자신이 우위를 점하지만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소년이 자신을 따라잡고 말 거란 확신이 섰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함을 하칸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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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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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휘두른 검을 따라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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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노을빛 눈동자가 얕게 어둠이 깔린 지하도시에서 흉흉히 빛났다. 우위를 점한 것은 분명 자신일 텐데 하칸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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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이 기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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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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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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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다. 자그마한 소음에 하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소년이 휘두르는 검이다. 하칸은 나진이 휘두르는 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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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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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하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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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기 때문이다. 나진이 휘두르는 검에 얕게 균열이 가 있는 모습을.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 균열이 번져감을 하칸은 똑똑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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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게 다룬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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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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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검에는 작은 흠집이 났고, 그 흠집으로 하여금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보통의 방법으로 검을 휘둘렀더라면 상관이 없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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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지금 검기를 뽑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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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불안정하고 거친 날것의 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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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검기가 검을 갉아먹고 있다. 검의 수명이 급속도로 소모되고 있다. 한번 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한 소년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성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진 본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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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성장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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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쥔 칼은 성장을 따라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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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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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나진의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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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부러진 순간 칼날에 깃들었던 백색의 광채가 흐트러졌다. 빛나던 소년은 검과 함께 빛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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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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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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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은 소년을 향해 중독자들이 달려들었다. 소년의 노을빛 눈동자가 중독자들의 몸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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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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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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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검으론,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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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굴렀다. 덮쳐드는 중독자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약쟁이 하칸은 이반의 영역 사방에 중독자들을 흩뿌려 놓았고, 어딜 가던 그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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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싸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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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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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했다. 무기가. 자신의 검기를 견뎌줄, 결코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무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현실적인 방안이다. 호겔 영감의 대장간으로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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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완성됐다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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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지 못했더라도, 검 수십자루를 들고 부러트리면서 항전하다 보면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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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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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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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며, 무기 없이 저 중독자들을 모두 뚫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에야 고통도 느끼지 않은 채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이게 오래가진 않을 거란 사실을 나진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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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조금씩 쑤셔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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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패배하고, 패배란 곧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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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막 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뜨겁게 달궈진 머릿속으로 나진은 타개책을 찾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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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라, 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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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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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뽑을 수 있다. 검을 뽑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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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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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십삼 일 전부터 나진을 괴롭히던 목소리였다. 언제나 체념해 온 나진이지만, 그런 나진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갈망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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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있기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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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부러지지 않을 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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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검기를 견뎌줄 명검 중의 명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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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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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같은 지하도시의 쓰레기가 감히 손을 대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죽고 말테니까. 그건 결코 잡아선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하물며 뽑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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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지 않은 것에 걸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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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선 안 되는 일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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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진은 어느새 자신이 광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검을 지키던 병사들은 도망이라도 쳤는지 보이지 않았고, 검을 가리던 천도 난리 통에 벗겨졌는지 성검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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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색으로 빛나는 성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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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에 열세 개의 별을 새긴 별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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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를 마주한 순간 나진의 눈동자가 백금색으로 물들었다. 별빛.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별빛을 마주한 순간 소년은 무심코 웃고 말았다. 그것은 비웃음이나, 조소가 아닌 순수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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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동경하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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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지하도시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별을 마주한 순간 소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걱정도, 고뇌도, 금기를 어겨선 안 된다는 생각도, 그 모든것이 말끔하게 날아갔다. 그렇게 비어버린 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순수한 열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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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뒤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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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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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으면 중독자들에게 붙잡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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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죽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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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밑바닥을 기다가, 밑바닥에서 죽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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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걸어보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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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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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한 소년은 더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현재를 바라보며 나진은 성검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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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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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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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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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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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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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진을 배신하지 않았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은 검을 뽑을 수 있다고. 언제나처럼 자신의 직감을 믿고선 나진이 바위에 박힌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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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쫓아 광장에 도착한 하칸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엑스칼리버를 향해 손을 뻗는 소년의 모습에 하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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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궁지에 몰려 미쳐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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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재능이 있다곤 해도 설마 저걸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수백 년 동안 뽑히지 않은 저 성검을? 너무나도 오만한 소년의 모습에 하칸은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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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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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손이 성검을 붙잡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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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은 더는 웃을 수 없게 됐다. 비웃음을 머금었던 입가가 벌어지고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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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웅, 구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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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종소리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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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치는 종소리와 함께 소년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장이 퍼져 나왔다. 파장에 닿은 중독자들이 떠밀려 엎어지고, 뒤흔들리는 땅에 하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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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칸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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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손에 붙잡힌 순간 빛나기 시작하는 성검을.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검명(劍鳴)을 울리기 시작하는 전설 속의 성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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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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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바위에서 뽑히지 않았기에, 단지 전설로만 여겨졌던 검이 한 명의 소년에 의해 현실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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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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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서 성검이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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