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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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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약쟁이 하칸, 본명은 하칸테 카나리엘.

그녀는 연금술사다. 그것도 골방에 처박혀 항아리 앞에서 국자나 저어대는 치유 학파 연금술사가 아닌 선혈 학파 소속의 연금술사.

선혈(鮮血) 학파.

피를 매개로 하는 연금술을 다루는 학파.

혹자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몸에 칼날보다 더 위험한 것이 흐르는 이들이라고.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었던 하칸은 소리 내 웃으며 이렇게 답했었다.

그거, 정확한 평가라고.

촥.

하칸이 제 피를 흩뿌렸다.

흩뿌린 피가 땅에 닿는 순간 기화했다. 증기로 변한 핏물이 골목길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이는 하칸이 조합해 낸 일종의 도핑제다.

근력과 반응속도를 포함한 신체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흥분 상태에 빠트리는 도핑제.

미리 중독자들의 몸에 투약해 둔 약물과 도핑 성분이 반응했다. 도핑 성분이 가득한 안개 속에서 호흡한 순간 중독자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아아아아아아악!

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빠른 속도로.

‘아껴두려 했는데.

안개 속에서 호흡하며 하칸이 몸을 풀었다.

그녀 자신에게야 부작용이 없는 도핑제이나, 그녀를 제외한 이들에게 이 도핑제는 양날의 독이나 다름없었다. 빨아들인 순간 극적인 강화와 고양감을 가져오지만······.

하칸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중독자들을 흘겨봤다.

그들의 몸에서 뿌득, 뿌드득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소리. 그것이 이 도핑제의 부작용이었다. 강화와 동시에 육체가 망가지기 시작하니까. 아마 몇분만 지나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겠지.

쉽게 말하자면 단기 결전용이란 뜻이다.

본래는 이반에게 쓰려고 아껴뒀던 것이나, 소년이 빛을 보인 이상 이 자리에서 묻어버려야 했다. 저 소년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쾅.

골목길의 벽을 박차고 달려든 나진이 검을 휘둘렀다. 백색의 광채를 끌며 휘둘러진 검날이 한 번에 셋의 몸을 갈랐다. 도핑의 효과로 육체 능력이 강화됐음에도 중독자들은 나진의 검에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들이 약의 힘을 빌려 빨라진 만큼, 나진 역시 마나의 도움을 받아 가속하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가속된 몸이 어색한지 나진은 중간중간 검에 휘둘리듯 움직였지만, 무서운 속도로 중독자들을 도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벽과 벽을 박차며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모습은 묘기를 부리는듯했다.

후두둑.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잘린 팔과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것들이 폭발하려는 순간, 나진은 그들의 몸을 엎어치듯 내던지고 발로 걷어찼다. 그 모든 움직임이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나진이 땅을 박찰 때 더는 탁,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쾅, 하고 땅을 깨부수며 나진은 질주했다.

그어어어어어억!

이에 중독자들은 몇이 베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나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자신을 향해 뛰어오르는 중독자 무리를 흘겨보던 나진이 처음으로 뒤로 도약했다.

하지만, 후퇴를 위한 도약은 아니다.

뒤로 크게 도약한 나진이 착지와 동시에 쿠웅, 하고 발을 땅에 깊게 파묻었다. 등 뒤로 검을 늘어트리곤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후우···.”

나진이 뒤로 물러서며 만든 것은 도움닫기를 위한 공간이다. 그를 알지 못한 중독자들이 나진을 향해 한걸음 내디딘 순간.

콰앙!

나진이 땅을 박찼다.

눈으로 좇는 것조차 어려운 순간적인 가속. 백색의 검기가 마치 유성처럼 꼬리를 물며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그리곤, 베야 할 것의 앞에 도달한 순간 나진이 검을 휘두르며 허리를 비틀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해선 안될 수평 베기.

그러나, 나진의 칼날은 벽에 닿은 순간 튕겨 나가지 않고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조금의 걸림도 없이 벽을 가르며 칼날이 튀어나왔다. 검기의 절삭력은 더는 나진을 지형에 구애받지 않게 만들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길게 휘둘러진 검이 나진의 앞길을 가로막는 중독자들을 모조리 잘라냈다. 몸이 잘려 허물어진 그들의 시체가 부르르 떨기도 채 전에, 나진이 땅을 박차고 다시 한번 질주했다.

콰아아아아앙!

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폭발의 여파마저 추진력 삼아 나진이 나아간 곳에는 하칸이 있다. 단숨에 지휘권자인 하칸을 노리는 것. 그것은 나진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최선이었지만, 나진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나진은 연금술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진은 선혈 학파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진은, 하칸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최소한의 정보를 통해 내린 결론.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을지언정 옳지는 않다. 하칸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나진은 보았다. 하칸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음을. 그것은 궁지에 몰린 자가 지을만한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냥꾼이 지을만한 웃음이었다.

······선혈 학파.

피를 매개 삼아 연금술을 부리는 이들.

지금 이 골목길에는 피가 가득했다. 수십의 중독자들이 흘린 피. 그들이 폭발하며 사방에 흩뿌린 피. 나진이 발을 내딛는 곳에도 피가 가득했으며, 나진이 쥔 검 역시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중독자들은 하칸의 피로 만든 안개와 약을 마셨기에, 그들이 흘린 피에는 하칸의 피가 섞여 있었고.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선혈 학파 연금술사 하칸테 카나리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촉매(觸媒)였다.

딱.

하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골목길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방에 깔린 핏물을 촉매 삼아 하칸이 사용한 연금술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폭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골목길이 뒤흔들렸다. 중독자들을 터뜨린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폭발이 골목길을 집어삼켰다. 충격파에 휩쓸린 벽이 무너지며 돌바위들이 쿵, 쿠웅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뜨거운 공기.

하칸은 손을 휘저어 시야를 확보했다.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것은 난장판이 된 골목길의 풍경과, 충격파에 떠밀려 골목길의 바깥에 내던져진 소년의 모습이다.

“허.”

하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한 폭발에 휩쓸렸음에도, 소년이 여전히 두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었기에.

검에 지탱한 채 나진은 서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팔을 끌어당겨 얼굴을 보호하기라도 한 듯, 한쪽 팔은 축 늘어져 있었지만 얼굴은 멀쩡했다. 노을빛으로 물든 눈동자는 여전히 하칸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눈동자였다.

그리고, 하칸이 본 적이 있는 눈동자였다.

17년 전 자신을 이 도시에 처박았던 아탕가의 기사가 딱 저 소년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에 하칸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어디.”

하칸이 손짓했다.

“얼마나 더 버티는지 볼까.”

네가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그 두 눈동자를 파버릴 테니까.

그만한 숫자의 중독자를 소모했음에도, 여전히 하칸에겐 많은 군세가 남아 있었다. 자그마치 17년을 준비한 계획이었으므로.

이젠 그녀의 뒤 뿐만이 아닌 시가지의 곳곳에서 나진을 향해 중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진은.

다만 검을 고쳐 쥘 뿐이었다. 나진의 검에서 솟구치는 검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소년을 끝장내고, 그 기분 나쁜 눈동자를 파버릴 생각에 미소 짓던 하칸은 어느 순간부터 웃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도대체?”

하칸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분명히 궁지에 몰아넣었다.

숨겨둔 수를 썼고, 체력을 소모시켰으며, 폭발에 휘말리게 해 팔 한쪽을 부러트렸다. 얼핏 보아도 소년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소년은 만신창이였다.

그런데, 어째서 더 빨라진 거지?

하칸은 눈앞을 보았다.

나진은 이제는 정면만이 아닌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독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악화된 전황. 부상을 입어 더욱 고되진 전투. 그러나 나진은 오히려 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속된 몸이 어색한지 종종 검에 휘둘리듯 움직이던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마나를 다루는데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나진은 오히려 속도를 더 올리고 있었다. 더 빨라진 움직임으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중독자들을 베어 넘기고 있다.

‘이반 그 자식, 대체 뭘 숨겨두고 있던 거야?

이건 이상하다. 너무나도 이상하다.

저 나이대에 저만한 움직임을, 하물며 검기까지 뽑아낼 수 있는 이가 있었던가? 검사들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하칸이 보기에도 이건 이상했다.

만신창이의 육체.

그런 육체에 반비례하듯 더욱 찬란히 빛나는 검기.

소년의 검에서 깃든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편린을 넘어서 완전한 검기의 형상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겠네.”

저놈,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더욱 빠르고 간결하며 효율적으로 변해가는 움직임. 소년은 중독자들을 베어 넘기며 길을 열고, 하칸이 피를 촉매 삼아 연금술을 쓰려는 순간 몸을 던져 범위에서 벗어났다.

촥!

즉각 칼을 거칠게 휘둘러 묻은 핏물을 떨쳐내는 소년의 모습에 하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연금술에 반응하는 소년의 모습은 놀랍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었으니까.

성장이 빠르다. 너무나도.

적응이 빠르다. 기괴할 정도로.

이러다간 따라잡히고 만다.

당장은 자신이 우위를 점하지만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소년이 자신을 따라잡고 말 거란 확신이 섰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함을 하칸은 알았다.

촤아아아아아아악!

소년이 휘두른 검을 따라 길이 열렸다.

서슬 퍼런 노을빛 눈동자가 얕게 어둠이 깔린 지하도시에서 흉흉히 빛났다. 우위를 점한 것은 분명 자신일 텐데 하칸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전황이 기울기 시작한다.

이대로 가다간······.

파삭.

그 순간이다. 자그마한 소음에 하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소년이 휘두르는 검이다. 하칸은 나진이 휘두르는 검을 보았다.

“아하.”

그 순간 하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보았기 때문이다. 나진이 휘두르는 검에 얕게 균열이 가 있는 모습을.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 균열이 번져감을 하칸은 똑똑히 보았다.

무리하게 다룬 검.

폭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검.

그 결과 검에는 작은 흠집이 났고, 그 흠집으로 하여금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보통의 방법으로 검을 휘둘렀더라면 상관이 없었을 테지만······.

나진은 지금 검기를 뽑아내고 있다.

그것도 불안정하고 거친 날것의 검기를.

요동치는 검기가 검을 갉아먹고 있다. 검의 수명이 급속도로 소모되고 있다. 한번 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한 소년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성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진 본인일 뿐이다.

나진은 성장하나.

나진이 쥔 칼은 성장을 따라오지 못한다.

파캉!

끝내 나진의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검이 부러진 순간 칼날에 깃들었던 백색의 광채가 흐트러졌다. 빛나던 소년은 검과 함께 빛을 잃었다.

“죽여.”

하칸이 손짓했다.

빛을 잃은 소년을 향해 중독자들이 달려들었다. 소년의 노을빛 눈동자가 중독자들의 몸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검이 부러졌다.

부러진 검으론, 이길 수 없다.

나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굴렀다. 덮쳐드는 중독자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약쟁이 하칸은 이반의 영역 사방에 중독자들을 흩뿌려 놓았고, 어딜 가던 그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결국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필요했다. 무기가. 자신의 검기를 견뎌줄, 결코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무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현실적인 방안이다. 호겔 영감의 대장간으로 가는 것.

‘검이 완성됐다면 좋겠지만.

완성되지 못했더라도, 검 수십자루를 들고 부러트리면서 항전하다 보면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며, 무기 없이 저 중독자들을 모두 뚫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에야 고통도 느끼지 않은 채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이게 오래가진 않을 거란 사실을 나진은 직감했다.

온몸이 조금씩 쑤셔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패배하고, 패배란 곧 죽음이다.

이제야 막 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뜨겁게 달궈진 머릿속으로 나진은 타개책을 찾아 헤맸다.

‘······뽑아라, 검을.

그리고.

‘너는 뽑을 수 있다. 검을 뽑아라.

귀를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십삼 일 전부터 나진을 괴롭히던 목소리였다. 언제나 체념해 온 나진이지만, 그런 나진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갈망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있기는 하지.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검이.

자신의 검기를 견뎌줄 명검 중의 명검이.

‘하지만 그건···.

자신과 같은 지하도시의 쓰레기가 감히 손을 대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죽고 말테니까. 그건 결코 잡아선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하물며 뽑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지 않은가.

확실하지 않은 것에 걸어선 안 된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일 테지만.

나진은 어느새 자신이 광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검을 지키던 병사들은 도망이라도 쳤는지 보이지 않았고, 검을 가리던 천도 난리 통에 벗겨졌는지 성검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성검.

도신에 열세 개의 별을 새긴 별의 검.

엑스칼리버를 마주한 순간 나진의 눈동자가 백금색으로 물들었다. 별빛.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별빛을 마주한 순간 소년은 무심코 웃고 말았다. 그것은 비웃음이나, 조소가 아닌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토록 동경하던 별.

어두운 지하도시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별을 마주한 순간 소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걱정도, 고뇌도, 금기를 어겨선 안 된다는 생각도, 그 모든것이 말끔하게 날아갔다. 그렇게 비어버린 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순수한 열망이다.

“어차피 뒤지는 건데.”

이러나저러나 죽는다.

하지 않으면 중독자들에게 붙잡혀 죽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대로 밑바닥을 기다가, 밑바닥에서 죽을 거라면.

“하다못해 걸어보기라도 해야지.”

나진이 땅을 박찼다.

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한 소년은 더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현재를 바라보며 나진은 성검을 향해 달렸다.

검을 뽑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뽑을 수 있다.

아니.

확신이 있다.

검을 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진을 배신하지 않았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은 검을 뽑을 수 있다고. 언제나처럼 자신의 직감을 믿고선 나진이 바위에 박힌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진을 쫓아 광장에 도착한 하칸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엑스칼리버를 향해 손을 뻗는 소년의 모습에 하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궁지에 몰려 미쳐버린 건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곤 해도 설마 저걸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수백 년 동안 뽑히지 않은 저 성검을? 너무나도 오만한 소년의 모습에 하칸은 조소했다.

그러나.

소년의 손이 성검을 붙잡은 순간.

하칸은 더는 웃을 수 없게 됐다. 비웃음을 머금었던 입가가 벌어지고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구웅, 구우웅······.

장엄한 종소리가 메아리쳤다.

메아리치는 종소리와 함께 소년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장이 퍼져 나왔다. 파장에 닿은 중독자들이 떠밀려 엎어지고, 뒤흔들리는 땅에 하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칸은 보았다.

소년의 손에 붙잡힌 순간 빛나기 시작하는 성검을.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검명(劍鳴)을 울리기 시작하는 전설 속의 성검을.

엑스칼리버가.

수백 년 동안 바위에서 뽑히지 않았기에, 단지 전설로만 여겨졌던 검이 한 명의 소년에 의해 현실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카득!

바위에서 성검이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