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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지의 지배자, 약쟁이 하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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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재에 대해 나진은 잘 알지 못한다. 그야 약쟁이는 성별, 나이, 신상, 외모,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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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가 누군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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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진이 약쟁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약쟁이가 연금술사라는 것. 그리고 이반과 견줄만한 강자라는 사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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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정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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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몇 가지 정보면 충분했다. 그건 눈앞의 여자와 약쟁이를 연관 짓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보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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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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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과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이 나진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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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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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외치며 나진이 자세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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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여자는 히죽였다. 입꼬리를 쭉, 치켜올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반개한 눈동자로 나진을 노려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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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좋아. 눈치도 빠르고. 그런데 정작 내린 결론은 별로 마음에 안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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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진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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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은 손가락을 쭉 뻗어 나진이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칼날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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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도망쳐? 확신하는 눈치던데, 네 말마따나 내가 약쟁이 하칸이라면 넌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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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과 호르세와 견주는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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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를 마주했다면 도망치는 게 옳지 않냐고 그녀는 반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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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조직 보스가 영역에 들어오면 일단 조지고 보라는 게 이반이 정한 규칙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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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그 이반은 자리를 비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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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비운 걸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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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세가 믿고 있었던 뒷배. 그것이 약쟁이 하칸이었던 걸까. 조금 전 호르세의 간부가 터져 죽었던 걸 떠올려 보면 협력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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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어쨌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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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이반이 맡긴 검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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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규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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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성실한 꼬맹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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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인 하칸이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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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르르르, 또다시 울려 퍼지는 소음. 약에 취한 듯 고개를 축 늘어트린 채 하칸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소음에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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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제 주인인 하칸을 보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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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하칸이 쭉 뻗은 손가락의 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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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나진. 이윽고 그들이 나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약에 취한 수십의 중독자들. 눈과 귀에서 피가 흐르는 그들을 노려보며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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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이 자리를 뜨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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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순히 이반이 내세운 규칙 때문만이 아니다. 직감한 까닭이다. 저 약쟁이 하칸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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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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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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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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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을 둘러싼 채 자신을 밀어내는 중독자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스물을 넘어간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그 정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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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뒤에 더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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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첫 번째 행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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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의 뒤에서 더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디 그뿐인가. 도시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와, 조금 전 들었던 폭발 소리를 감안하면 그 수는 백을 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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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과 오펜은 자리를 비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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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원들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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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상대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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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라면 최악인 상황이다. 죽음의 위기라면 위기일 상황이었으며, 제 손에 들린 것이라곤 한 자루의 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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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범한 검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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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던져주고 간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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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진이 평소에 쓰던 검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명검이었으며, 나진이 이반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냈음을 의미하는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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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굴러가던 나진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 눈동자가 향한 곳은 중독자들의 너머에 서 있는 하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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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들은 하칸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이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하칸이다. 이반은 언제나 말했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조져야 할 것은 지휘권자이자 책임자라고. 노을빛으로 물든 나진의 눈동자가 번들거리기를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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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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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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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의 가속.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나진이 길을 가로막은 중독자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겅. 매끄러운 궤적을 그린 검날을 따라 핏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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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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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잘라낸 순간 중독자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부풀기 시작하는 몸. 나진은 망설임 없이 목이 잘린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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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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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 몇이 폭발에 휘말렸다. 팔이 뜯어지고, 다리가 한 짝 날아갔음에도 그들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 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나진은 조금이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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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동화 속 언데드들을 보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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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건가 죽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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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찌르는 시체 썩은 내와 부패한 인간들. 저들 중 몇은 시체였다. 하지만 모두가 시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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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생각하는 대신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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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범위는 세걸음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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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타이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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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련으로부터 2초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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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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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목을 잘라 확실히 죽였을 때는 터졌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도 터지지 않는단 보장은 없다. 그러니 최소 세걸음의 간격은 유지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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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의 판단. 정보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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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움직이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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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검을 낮게 끌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방법은 이반에게 가장 먼저 배운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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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무리 재능과 감각이 좋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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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엔 결국 칼침 맞고 뒤지는 건 똑같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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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써먹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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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인으로서 일하며 몸에 새긴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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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접근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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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끌며 휘두른 검이 중독자들의 발목을 쓸고 지나갔다. 스걱, 몇몇은 아예 발목이 잘려 나갔으며 또 몇몇은 발목이 깊게 파여 서 있을 수 없게 됐다. 중독자 넷이 넘어지며 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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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좁은 공간으로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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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이며 뒤는 뻥 뚫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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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정면에서만 오고 있으며, 넘어진 넷으로 하여금 뒷줄이 넘어오는데 시간이 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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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했다면 남은 거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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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 않냐? 이미 배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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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장 잘하는 걸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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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판단해 최선의 수를 꽂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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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엎어진 중독자들을 밟고 후열이 넘어오려 하는 순간, 나진의 검이 그들이 깔아뭉갠 중독자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검을 휘두른 직후 나진이 뒤로 크게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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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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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폭발에 휘말린 이들의 다리, 혹은 발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엎어진 이들의 몸이 쌓이며 또다시 길을 가로막는다. 고막을 울리는 굉음과 튀어 오르는 핏물. 그리고 인간이었던 것의 살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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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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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사람 죽는 것은 지겹게도 봐온 나진이 보기에도 비위가 상하는 장면이다. 나진은 제 얼굴에 튄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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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에서 나진의 검이 번뜩였다. 세걸음 간격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베거나, 걷어차며 나진은 하칸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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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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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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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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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내도 밀어내도 수로 찍어 누르고 들어온다.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던 나진은, 어느 순간부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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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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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다간 골목길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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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공간. 둘러싸일 수 있는 공간으로 밀려나게 되면 그걸로 끝이다. 나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반이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이반이라면, 조금 더 빠르고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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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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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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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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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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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빠르게 파고든 나진이 이반처럼 검을 휘둘렀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최적의 경로를 따라 몸은 움직였고, 검날은 번뜩였다. 나진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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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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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몸을 떠미는 기이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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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그리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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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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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타개하려면 그 움직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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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밀려드는 중독자 무리의 너머에 서 있는 하칸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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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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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건 달리 말해 자신을 제대로 된 적으로 인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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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을 다하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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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아닌 ‘그다음’을 보는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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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에 나진은 조금이지만 화가 났다. 자신을 의식하지도 않는 강자의 모습에 나진은 짜증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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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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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조금 전의 감각을 의식하며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최적의 경로를 그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흐름이 제 등을 떠미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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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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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뭔가가 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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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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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떠미는 흐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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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하던 몸이 제 속도로 돌아왔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그리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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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머릿속으로 그린 것은 ‘파고들어 검을 휘두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러나 가속이 풀린 나진의 몸은 검을 휘두른 순간 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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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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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쏟으며 몸을 떠는 시체. 폭발의 전조. 급히 나진이 몸을 뒤로 던졌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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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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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에 떠밀려 나진이 바닥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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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범위에선 벗어났지만, 아슬아슬했던 탓에 충격파에 휩쓸리고 말았다. 바닥을 구르며 일어선 나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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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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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하고 걸리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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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육체적인 걸림은 아니었다. 심리적인 요소에 가까운 것.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나진의 귓가에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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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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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대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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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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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반이 언제나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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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진이 체념하고, 무언갈 포기할 때 몇번이고 되새겼던 말들이다. 그것이 지금 나진의 발목을 움켜쥐는 족쇄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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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스스로가 발목에 채운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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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와 검기는 자신이 다뤄선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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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룰 방법이 보여도 손을 뻗어선 안 되는 것. 나진은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건 이반이 그어둔 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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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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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이반을 두려워하며 선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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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중에 제 행동을 제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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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앞을 향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것들. 그러나 선을 넘지 않고선 닿을 수 없는 것들. 지금 나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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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선을 넘어설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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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족쇄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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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채워둔 족쇄는 이미 나진의 일부와도 같았으므로. 나진은 어깨에 새긴 흉터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뒤로 물러선 나진이 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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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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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선 나진은 문득 제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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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남기고 간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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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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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나진은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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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망설이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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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을 받았다는 것이 곧 허락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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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도 된다는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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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발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발로 나진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그어두었던 선을 콱 짓밟았다. 제 발에 채워둔 족쇄를 박살 내며 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나진의 몸이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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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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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이 나진의 몸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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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덜컥, 하고 무언가 걸리지 않았다. 몸이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그린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이 완전히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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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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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빨려 들어간 검이 길을 열었다. 쓰러지는 시체들이 몸을 떨며 폭발하려 하지만, 그들이 몸을 떠는 전조를 보였을 때 나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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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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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고 좁은 골목길의 벽을 박차며 나진은 뛰어올랐다. 인간의 각력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 마나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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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지하며 검을 휘두르고, 중독자들이 몸을 떠는 순간 나진은 벽을 박차고 다시 도약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나진은 밀려드는 중독자들을 베어 넘기며 약쟁이를 향해 근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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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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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벽을 박차고 높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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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게 뛴 나진은 하늘과 일자가 되게끔 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이반의 검례(劍禮)를 흉내 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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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선 소년은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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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손을 뻗은 곳에는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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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중에 잡아선 안 된다고 여기며, 눈에 보였음에도 붙잡지 않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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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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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쥔 순간, 검을 움켜쥔 나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나진의 몸을 떠밀던 흐름이 나진의 손가락을 타고 칼에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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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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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이 세차게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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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맺힌 것은 순백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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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자신만의 색(色)을 가지지 못했으며, 검날을 완전히 두르지도 못했지만··· 검에 깃든 백색의 광채는 분명한 검기의 편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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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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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도, 우연도, 본능에 따른 움직임도 아닌 오직 자신의 의지로 피워낸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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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등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소년의 검에 깃든 백색의 검기가 찬란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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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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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은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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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달려들던 소년도 결국 중독자들의 무리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움직임이 제법 그럴싸하긴 했지만 자신의 군세를 뚫기엔 역부족으로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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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저항하다 쓰러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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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의하면 이반이 아끼던 애송이라던데, 시체를 가져다주면 분명 좋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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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는 차질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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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지로 떨어지고 버려지는 시체들을 끌어모아 살아 움직이는 폭탄을 만들어 냈다. 오랜 시간에 거쳐 호르세의 영역을 집어삼키고, 호르세를 중독시켜 자신의 아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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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끝내 호르세를 미끼 삼아 이반과 오펜을 꾀어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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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 준비한 계획이다. 하지만 하칸은 고작 그 정도 함정으로 이반을 끝장낼 수 있으리라 여기진 않았다. 이반은 하칸을 알지 못하지만, 하칸은 이반을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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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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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에 속한 기사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또 끈질긴 존재인지 하칸은 안다. 반드시 함정을 뚫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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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 전에 점령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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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거처가 있는 중심지를 점령하고 이반에게 소모전을 강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자신의 승리다. 지하도시 아트만의 모든 구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둘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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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준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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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획을 이룰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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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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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칸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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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하 도시의 천장을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공방에서 쫓겨나 지하도시로 떨어졌지만··· 한때는 천재라 불렸으며, 차기 공방주로 거론됐던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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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 사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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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또한 영광스러웠던 나날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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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은 연금공방의 연금술사로서 다시 한번 빛나기를 원한다. 도시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과정일 뿐 그녀의 종착지는 아니다. 그녀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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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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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것들, 쓰레기 같은 것들만이 가득한 이 도시를 벗어날 날이 머지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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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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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의 벽을 박차고 나진이 뛰어올랐다. 윗동네로 향하는 통로를 바라보던 하칸의 시야는 나진으로 하여금 가로막혔다. 그 사실에 그녀가 불쾌감을 느낄 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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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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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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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것들이 가득한 곳에서,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에서, 쓰레기들만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소년이 쥔 검은 순백의 광채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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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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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마주한 순간 하칸이 눈을 크게 떴다. 빛나는 것. 자신의 계획에 변수로서 작용할 만한 것들. 그런 것들을 모조리 배제했다고 생각했거늘, 이곳에 아직 하나의 빛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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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생각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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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걸 숨겨뒀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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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에게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하며 하칸은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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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의 소년은 별 볼 것 없는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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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빛을 피워낸 소년은 분명한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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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 하칸은 더는 하늘을, 계획의 다음을 바라보지 않았다. 제 눈앞의 소년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녀는 단검으로 제 팔뚝을 그었다. 팔뚝을 따라 바닥에 떨어진 핏물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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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골목길을 채운 독한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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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칸이 숨겨둔 수를 꺼내 들었음을, 그리고 눈앞의 소년을 자신의 적수로 인정했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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