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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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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Blame History

매립지의 지배자, 약쟁이 하칸.

그 존재에 대해 나진은 잘 알지 못한다. 그야 약쟁이는 성별, 나이, 신상, 외모,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니까.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즉 나진이 약쟁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약쟁이가 연금술사라는 것. 그리고 이반과 견줄만한 강자라는 사실 뿐이다.

‘적은 정보지만···.

그 몇 가지 정보면 충분했다. 그건 눈앞의 여자와 약쟁이를 연관 짓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보였으니.

“약쟁이.”

제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과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이 나진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약쟁이 하칸.”

그렇게 외치며 나진이 자세를 다잡았다.

그 모습에 여자는 히죽였다. 입꼬리를 쭉, 치켜올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반개한 눈동자로 나진을 노려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감이 좋아. 눈치도 빠르고. 그런데 정작 내린 결론은 별로 마음에 안 드네.”

그녀는 나진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하칸은 손가락을 쭉 뻗어 나진이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칼날을 가리켰다.

“안 도망쳐? 확신하는 눈치던데, 네 말마따나 내가 약쟁이 하칸이라면 넌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이반과 호르세와 견주는 강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를 마주했다면 도망치는 게 옳지 않냐고 그녀는 반문하고 있었다.

“타 조직 보스가 영역에 들어오면 일단 조지고 보라는 게 이반이 정한 규칙이라서.”

“정작 그 이반은 자리를 비웠는데?”

자리를 비운 걸 알고 있었나.

호르세가 믿고 있었던 뒷배. 그것이 약쟁이 하칸이었던 걸까. 조금 전 호르세의 간부가 터져 죽었던 걸 떠올려 보면 협력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것 같긴 한데.

···그거야 어쨌든 간.

나진은 이반이 맡긴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규칙은 규칙이죠.”

“쓸데없이 성실한 꼬맹이네.”

어깨를 으쓱인 하칸이 손가락을 튕겼다.

찌르르르르, 또다시 울려 퍼지는 소음. 약에 취한 듯 고개를 축 늘어트린 채 하칸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소음에 반응했다.

그들은 제 주인인 하칸을 보았고.

이어서 하칸이 쭉 뻗은 손가락의 끝을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나진. 이윽고 그들이 나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약에 취한 수십의 중독자들. 눈과 귀에서 피가 흐르는 그들을 노려보며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진이 이 자리를 뜨지 않은 것.

그것은 단순히 이반이 내세운 규칙 때문만이 아니다. 직감한 까닭이다. 저 약쟁이 하칸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을.

수가 많다.

나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약쟁이 하칸을 둘러싼 채 자신을 밀어내는 중독자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스물을 넘어간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그 정도인데···.

‘저 뒤에 더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첫 번째 행렬일 뿐이다.

하칸의 뒤에서 더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디 그뿐인가. 도시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와, 조금 전 들었던 폭발 소리를 감안하면 그 수는 백을 넘을지도 모른다.

이반과 오펜은 자리를 비웠고.

조직원들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하물며 상대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다.

최악이라면 최악인 상황이다. 죽음의 위기라면 위기일 상황이었으며, 제 손에 들린 것이라곤 한 자루의 검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검은 아니지.

이반이 던져주고 간 검.

그것은 나진이 평소에 쓰던 검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명검이었으며, 나진이 이반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냈음을 의미하는 검이었다.

빠르게 굴러가던 나진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 눈동자가 향한 곳은 중독자들의 너머에 서 있는 하칸이다.

중독자들은 하칸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이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하칸이다. 이반은 언제나 말했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조져야 할 것은 지휘권자이자 책임자라고. 노을빛으로 물든 나진의 눈동자가 번들거리기를 잠시.

쾅!

나진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한순간의 가속.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나진이 길을 가로막은 중독자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겅. 매끄러운 궤적을 그린 검날을 따라 핏물이 튀었다.

부르르.

목을 잘라낸 순간 중독자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부풀기 시작하는 몸. 나진은 망설임 없이 목이 잘린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콰아아앙!

중독자 몇이 폭발에 휘말렸다. 팔이 뜯어지고, 다리가 한 짝 날아갔음에도 그들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 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나진은 조금이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동화 속 언데드들을 보는 것 같은데···.

살아있는건가 죽은건가.

코를 찌르는 시체 썩은 내와 부패한 인간들. 저들 중 몇은 시체였다. 하지만 모두가 시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나진은 생각하는 대신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했다.

‘폭발의 범위는 세걸음 남짓.

폭발하는 타이밍은?

경련으로부터 2초 이내.

폭발의 조건은?

일단 목을 잘라 확실히 죽였을 때는 터졌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도 터지지 않는단 보장은 없다. 그러니 최소 세걸음의 간격은 유지해야 하리라.

상황의 판단. 정보의 정리.

남은 것은 움직이는 것뿐.

나진이 검을 낮게 끌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방법은 이반에게 가장 먼저 배운 것이기도 했다.

「네가 아무리 재능과 감각이 좋다고 해도.」

「마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엔 결국 칼침 맞고 뒤지는 건 똑같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몇 번이고 써먹었던 것들.

처형인으로서 일하며 몸에 새긴 전술.

「하나, 접근 차단.」

낮게 끌며 휘두른 검이 중독자들의 발목을 쓸고 지나갔다. 스걱, 몇몇은 아예 발목이 잘려 나갔으며 또 몇몇은 발목이 깊게 파여 서 있을 수 없게 됐다. 중독자 넷이 넘어지며 길이 막혔다.

「둘, 좁은 공간으로 유도.」

좁은 골목길이며 뒤는 뻥 뚫려있다.

적은 정면에서만 오고 있으며, 넘어진 넷으로 하여금 뒷줄이 넘어오는데 시간이 지체됐다.

「거기까지 했다면 남은 거야 뭐.」

「알고 있지 않냐? 이미 배웠잖아.」

네가 가장 잘하는 걸 해라.

그때그때 판단해 최선의 수를 꽂아라.

바닥에 엎어진 중독자들을 밟고 후열이 넘어오려 하는 순간, 나진의 검이 그들이 깔아뭉갠 중독자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검을 휘두른 직후 나진이 뒤로 크게 도약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가까이에서 폭발에 휘말린 이들의 다리, 혹은 발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엎어진 이들의 몸이 쌓이며 또다시 길을 가로막는다. 고막을 울리는 굉음과 튀어 오르는 핏물. 그리고 인간이었던 것의 살점들.

눈 뜨고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 죽는 것은 지겹게도 봐온 나진이 보기에도 비위가 상하는 장면이다. 나진은 제 얼굴에 튄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땅을 박찼다.

좁은 골목길에서 나진의 검이 번뜩였다. 세걸음 간격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베거나, 걷어차며 나진은 하칸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다.

그러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온다. 계속해서.

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

밀어내도 밀어내도 수로 찍어 누르고 들어온다.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던 나진은, 어느 순간부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대로 가다간 골목길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넓은 공간. 둘러싸일 수 있는 공간으로 밀려나게 되면 그걸로 끝이다. 나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반이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이반이라면, 조금 더 빠르고 확실하게······.

그러니까.

탁.

이렇게.

스걱.

한순간 빠르게 파고든 나진이 이반처럼 검을 휘둘렀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최적의 경로를 따라 몸은 움직였고, 검날은 번뜩였다. 나진이 눈을 크게 떴다.

‘또 이거다.

무언가 몸을 떠미는 기이한 감각.

그것은 나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그리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상황을 타개하려면 그 움직임이 필요했다.

나진은 밀려드는 중독자 무리의 너머에 서 있는 하칸을 노려봤다.

“······.”

그녀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건 달리 말해 자신을 제대로 된 적으로 인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며.

자신이 아닌 ‘그다음’을 보는 눈동자.

그 사실에 나진은 조금이지만 화가 났다. 자신을 의식하지도 않는 강자의 모습에 나진은 짜증이 치밀었다.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자고.

나진은 조금 전의 감각을 의식하며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최적의 경로를 그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흐름이 제 등을 떠미는 순간.

덜컥.

속에서 뭔가가 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났다.

“······!”

등을 떠미는 흐름이 사라졌다.

가속하던 몸이 제 속도로 돌아왔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그리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다.

나진이 머릿속으로 그린 것은 ‘파고들어 검을 휘두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러나 가속이 풀린 나진의 몸은 검을 휘두른 순간 굳고 말았다.

부르르르르.

피를 쏟으며 몸을 떠는 시체. 폭발의 전조. 급히 나진이 몸을 뒤로 던졌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콰아아아앙!

폭발에 떠밀려 나진이 바닥을 굴렀다.

간신히 범위에선 벗어났지만, 아슬아슬했던 탓에 충격파에 휩쓸리고 말았다. 바닥을 구르며 일어선 나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뭐가 문제였지?

덜컥, 하고 걸리는 감각.

그것은 육체적인 걸림은 아니었다. 심리적인 요소에 가까운 것.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나진의 귓가에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선을 넘지 마라.

주어진 대로 살아라.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지 말아라.

그것은 이반이 언제나 했던 말.

또한 나진이 체념하고, 무언갈 포기할 때 몇번이고 되새겼던 말들이다. 그것이 지금 나진의 발목을 움켜쥐는 족쇄가 돼 있었다.

······나진 스스로가 발목에 채운 족쇄.

마나와 검기는 자신이 다뤄선 안 되는 것.

다룰 방법이 보여도 손을 뻗어선 안 되는 것. 나진은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건 이반이 그어둔 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이었으니.

선을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나진은 이반을 두려워하며 선을 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제 행동을 제한해왔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앞을 향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것들. 그러나 선을 넘지 않고선 닿을 수 없는 것들. 지금 나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다.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선을 넘어설 용기.

하지만 족쇄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채워둔 족쇄는 이미 나진의 일부와도 같았으므로. 나진은 어깨에 새긴 흉터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뒤로 물러선 나진이 숨을 토해냈다.

“······.”

물러선 나진은 문득 제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이반이 남기고 간 검.

“···하.”

무심코 나진은 웃음을 흘렸다.

뭘 망설이고 있었던 걸까.

이 검을 받았다는 것이 곧 허락일 텐데.

'선을 넘어도 된다는 허락.'

나진이 발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발로 나진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그어두었던 선을 콱 짓밟았다. 제 발에 채워둔 족쇄를 박살 내며 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나진의 몸이 가속했다.

키잉.

흐름이 나진의 몸을 떠밀었다.

더는 덜컥, 하고 무언가 걸리지 않았다. 몸이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그린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이 완전히 겹쳐졌다.

스걱.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빨려 들어간 검이 길을 열었다. 쓰러지는 시체들이 몸을 떨며 폭발하려 하지만, 그들이 몸을 떠는 전조를 보였을 때 나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진은 도약했다.

쾅, 하고 좁은 골목길의 벽을 박차며 나진은 뛰어올랐다. 인간의 각력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 마나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움직임이다.

착지하며 검을 휘두르고, 중독자들이 몸을 떠는 순간 나진은 벽을 박차고 다시 도약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나진은 밀려드는 중독자들을 베어 넘기며 약쟁이를 향해 근접했다.

콰직.

나진이 벽을 박차고 높게 뛰었다.

높게 뛴 나진은 하늘과 일자가 되게끔 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이반의 검례(劍禮)를 흉내 내듯이.

선을 넘어선 소년은 손을 뻗는다.

소년이 손을 뻗은 곳에는 빛이 있다.

무의식중에 잡아선 안 된다고 여기며, 눈에 보였음에도 붙잡지 않았던 것.

콱.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쥔 순간, 검을 움켜쥔 나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나진의 몸을 떠밀던 흐름이 나진의 손가락을 타고 칼에 깃들었다.

번쩍.

나진의 검이 세차게 점멸했다.

검에 맺힌 것은 순백의 빛.

아직은 자신만의 색(色)을 가지지 못했으며, 검날을 완전히 두르지도 못했지만··· 검에 깃든 백색의 광채는 분명한 검기의 편린이다.

나진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끌어냈다.

무의식도, 우연도, 본능에 따른 움직임도 아닌 오직 자신의 의지로 피워낸 빛.

광석등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소년의 검에 깃든 백색의 검기가 찬란히 빛났다.

약쟁이 하칸은 조소했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소년도 결국 중독자들의 무리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움직임이 제법 그럴싸하긴 했지만 자신의 군세를 뚫기엔 역부족으로 보였으니까.

조금 저항하다 쓰러지겠지.

소문에 의하면 이반이 아끼던 애송이라던데, 시체를 가져다주면 분명 좋아하리라.

‘계획에는 차질이 없어.

매립지로 떨어지고 버려지는 시체들을 끌어모아 살아 움직이는 폭탄을 만들어 냈다. 오랜 시간에 거쳐 호르세의 영역을 집어삼키고, 호르세를 중독시켜 자신의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끝끝내 호르세를 미끼 삼아 이반과 오펜을 꾀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주 오랜 세월 준비한 계획이다. 하지만 하칸은 고작 그 정도 함정으로 이반을 끝장낼 수 있으리라 여기진 않았다. 이반은 하칸을 알지 못하지만, 하칸은 이반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탕가의 기사, 이반.

아탕가에 속한 기사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또 끈질긴 존재인지 하칸은 안다. 반드시 함정을 뚫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그러니 그 전에 점령을 마친다.

이반의 거처가 있는 중심지를 점령하고 이반에게 소모전을 강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자신의 승리다. 지하도시 아트만의 모든 구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둘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오랜 세월 준비한 것.

그 계획을 이룰 수만 있다면······.

“······.”

하칸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지하 도시의 천장을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공방에서 쫓겨나 지하도시로 떨어졌지만··· 한때는 천재라 불렸으며, 차기 공방주로 거론됐던 그녀다.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 또한 영광스러웠던 나날을 잊지 못한다.

약쟁이 하칸은 연금공방의 연금술사로서 다시 한번 빛나기를 원한다. 도시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과정일 뿐 그녀의 종착지는 아니다. 그녀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머지않았다.

버려진 것들, 쓰레기 같은 것들만이 가득한 이 도시를 벗어날 날이 머지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다.

탁.

골목길의 벽을 박차고 나진이 뛰어올랐다. 윗동네로 향하는 통로를 바라보던 하칸의 시야는 나진으로 하여금 가로막혔다. 그 사실에 그녀가 불쾌감을 느낄 틈도 없이.

번쩍.

나진의 검이 빛났다.

버려진 것들이 가득한 곳에서,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에서, 쓰레기들만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소년이 쥔 검은 순백의 광채를 흩뿌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빛을 마주한 순간 하칸이 눈을 크게 떴다. 빛나는 것. 자신의 계획에 변수로서 작용할 만한 것들. 그런 것들을 모조리 배제했다고 생각했거늘, 이곳에 아직 하나의 빛이 남아 있었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저런 걸 숨겨뒀을 줄이야.

이반에게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하며 하칸은 헛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의 소년은 별 볼 것 없는 쓰레기.

그러나, 지금 빛을 피워낸 소년은 분명한 변수.

약쟁이 하칸은 더는 하늘을, 계획의 다음을 바라보지 않았다. 제 눈앞의 소년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녀는 단검으로 제 팔뚝을 그었다. 팔뚝을 따라 바닥에 떨어진 핏물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한순간에 골목길을 채운 독한 향기.

그것은 하칸이 숨겨둔 수를 꺼내 들었음을, 그리고 눈앞의 소년을 자신의 적수로 인정했음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