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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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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머리칼을 정돈하며 나진에게 질문했다. 나진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 잠깐의 침묵. 나진은 디에타를 말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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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에요? 그렇게 빤히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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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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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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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온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디에타가 늘 병문안을 와줬으니, 한 번쯤은 제가 찾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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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 다 신경 쓰시네. 몸은 좀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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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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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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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포션을 음료수처럼 마시다 보니 금방 낫더군요. 지금은 멀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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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최소 반년은 휴식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는데···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순식간에 털고 일어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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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특이체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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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완쾌했단 사실에 기쁨이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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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쉬움이 다시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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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쓰게 웃으며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이 완쾌했단 소식은 그가 어딘가로 또 훌쩍 떠날 시기가 다가왔단 뜻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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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았으면 떠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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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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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긴 합니다. 언젠가 말해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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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먼 곳으로 떠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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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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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멀리 떠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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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창밖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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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침묵 후 나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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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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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상관없는데 보는 눈이 많지 않을까요? 이야기하기 어려울 텐데. 당신 이제 정말 유명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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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별로 없는 장소가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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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없는 장소? 디에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디에타게 힌트를 주듯 나진이 창밖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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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곳. 석양이 잘 보이는 곳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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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떠올린 디에타가 아, 하고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 무렵 나진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잠시 집무실 바깥으로 나가 파시온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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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서 어이없다는 듯 웃는 파시온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러든지.’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디에타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린 순간, 나진이 성큼 디에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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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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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에게 두 팔을 쭉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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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팔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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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이동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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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빡이던 디에타는 나진이 내민 팔을 보곤 웃었다. 이윽고 그녀가 나진에게 안겼다. 디에타를 가볍게 들어 올린 나진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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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그리고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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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의 턱을 밟고 나진이 도약했다. 근래 들려오는 명성이 허풍이 아님을 증명하듯, 나진의 움직임은 가볍고 빨랐다. 사람 한명을 안고 있음에도 그 발걸음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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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하고 불어온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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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대상이 납치당했는데, 우리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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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쫓아도 못 잡지 않습니까. 로마노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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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맞는 말이군.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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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녀석이 작정하고 누군갈 납치하려 들면 그걸 누가 막을 수 있나 싶긴 합니다. 로마노프 경께서는 가능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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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이 자리에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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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우스와 파시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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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군. 청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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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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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시야.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언젠가 나진이 디에타의 호위를 맡았을 무렵, 그녀를 데리고 왔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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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소에 다시 한번, 그것도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도착한 지금 디에타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불과 몇개월 만에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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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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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진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것이 편안할 지경이었다. 달밤을 배경 삼아 도주할 무렵, 며칠씩이나 나진의 등과 품에 신세를 졌었으니까. 오랜만에 다시 맛본 나진의 품은 여전히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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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조금 더 안겨있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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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남긴 채 디에타는 나진의 품에서 내렸다. 그녀는 옷을 정돈하며 언덕 아래를 바라봤다. 한눈에 들어오는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의 풍경.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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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벌써 1년이 다 돼가네요. 당신과 처음 만난 게 봄이었죠? 겨울도 끝나가는 게 슬슬 봄이 올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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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눈이 내리는 것도 보고 싶었는데, 캄브리아에는 눈이 내리지 않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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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따뜻하니까요. 남부 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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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눈 내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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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죠. 많이.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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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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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별장에서 창밖으로 바라봤던 눈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았다. 눈이 내리면 눈싸움이니 썰매니 하는 놀잇거리들을 떠올리는 어린아이들과 달리, 디에타는 앙상한 가시나무만을 바라봐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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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당신은··· 아직 눈을 본 적이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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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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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지하도시 출신이었고, 지하도시를 벗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새삼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단 사실이 나진은 종종 어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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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놓고 보면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밀도 있는 삶을 사는 나진에게 하루는 길고 시간은 느리다. 하지만 지나간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시간은 너무나도 짧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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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면서도 빠르고. 길면서도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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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인 시간의 흐름에서 나진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많다. 그들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나진에게 떠오르는 것은 멀린과 디에타였다. 지하도시를 떠난 이후 만나게 된 귀한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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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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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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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번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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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진에게 있어 디에타가 가지는 존재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래서일까? 그녀에게만큼은 먼저 말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그 길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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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조만간 외륙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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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도 다녀왔잖아요? 용을 잡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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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잠깐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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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소드시커의 경지에 올랐으며, 용을 토벌했고, 별을 손에 넣었다. 그 말은 즉 캄브리아에서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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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를 떠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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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곧 나진이 다음 무대로 떠날 시간이 왔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디에타가 잠깐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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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렇겠죠. 당신의 목표는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거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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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선 별들의 전장에 가야겠죠. 더 많은 별을 얻으려면 그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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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말했고 나진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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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나진의 목표를 안다. 언젠가 나진이 캄브리아를 떠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날이 다가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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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으로 떠나면 대륙에는 자주 오진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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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까요. 물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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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外陸), 바깥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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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나진이 말하는 ‘별들의 전장’이란 장소는 단순한 거리뿐만이 아닌 개념적으로도 먼 곳이다. 피안과 차안. 저승과 이승. 온갖 종교와 서적에서 별들의 전장은 그야말로 별세계처럼 묘사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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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인간은 발을 디딜 수 없는 곳. 강자라 불리는 소드시커들 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곳. 저 밤하늘에 빛나는 초월자들이 거하는 전장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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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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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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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더 많이 다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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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죠,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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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긴 한데, 당연하게도 안 듣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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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침묵함으로써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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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남자한테 빠졌는지.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생각이었다. 디에타는 나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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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이제는 백금색에 가까운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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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는 디에타를 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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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동자는 언제나 먼 곳만을 향한다. 멀고도 험하며 까마득하게 높은 곳. 그곳에 닿기 위해 나진은 앞만을 보고 달린다. 그 모습이 멋있긴 하지만 디에타는 가끔 섭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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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게 있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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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옆을 돌아봐 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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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봐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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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야 당신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멋대로 두근거리고, 기대하고, 설레는 나만 바보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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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관계는 당연하게도 한쪽을 지치게 만드는 법이다. 이쪽은 설레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겠는데, 상대방은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사실에 디에타는 서운함을 느끼는 동시에 아이 같은 자기 모습에 부끄러움 역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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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섭섭해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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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약속하지 않았나? 서로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자고. 정상에서 만나자고. 그리 말해놓고선, 정작 상대가 목표만 보고 달려간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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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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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적이고 철저하며 이성적이다. 감정적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인물. 평소의 디에타는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진의 앞에만 서면 디에타는 바보가 되어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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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하기야 하지만, 그 속내를 드러낼 생각은 없다. 모처럼 나진이 신청한 데이트다. 이 좋은 시간을 그따위 감정에 사로잡혀 허비하기엔 아까웠다. 디에타는 살짝 웃어 보이며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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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가 대화를 이어 나가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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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했었죠. 전 아직 눈을 본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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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바라보던 나진이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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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가 하늘의 별이 아닌 디에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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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눈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그럽니다. 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다는 푸르른 바다도 본 적이 없습니다. 뭡니까 그게? 책으로는 읽었지만 솔직히 믿기진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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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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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바다, 설산······ 그 외에도 수많고 또 수많은 것들.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지하도시를 나와 겪은 모든 게 제게는 낯선 것들 투성이죠. 그래서 하루하루가 새롭기도 하고, 어떨 땐 두렵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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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요?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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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르는 걸 알아가는 즐거움이 두려움보다 클 뿐이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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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못 믿겠다는 눈치로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은 피식, 웃으며 언덕 위에 놓인 울타리에 기대어 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나진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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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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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하려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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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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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늘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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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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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역시 내 처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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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고 나진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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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 첫 번째 친구인 걸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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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회백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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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나진이 보인 웃음은, 디에타는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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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솔직히 말하자면 디에타와 이야기 나누는 게 제법 즐겁습니다.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활짝 웃어 주는데,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기 참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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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고, 장난스럽고, 또 편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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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딱 나진 나이대의 소년이 지어 보일 법한 미소. 그 자연스러운 미소를 마주한 순간 디에타는 무심코 제 입술을 살짝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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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습니다. 당신이랑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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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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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륙으로 떠나는 게 조금은 아쉽다고 느끼는데, 아마도 디에타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외륙을 가면 자주 이야기 나누진 못할 테니까요. 아, 이거 아예 안 찾아 오겠단 소린 아닙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대륙으로 돌아올 생각인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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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말을 늘어놓았다. 늘어놓았지만, 그 목소리는 중간부터 디에타에겐 닿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디에타 때문인 것 같긴 합니다’라는 문장이 결정타였다. 그 뒤에 이어진 나진의 목소리가 디에타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로 들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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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있으면 즐겁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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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외륙으로 떠나기가 아쉬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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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자주 볼 수 없으니까?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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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들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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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디에타가 떨리는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디에타의 눈동자가 마치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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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친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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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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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나진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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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성큼, 한걸음 나진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 서로의 눈동자가 눈동자를 비추는 거리에 멈춰 선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입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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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한 말,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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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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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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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느 부분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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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습니다. 다음 부분.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지 뭐에요? 제대로 못 들었으니 다시 한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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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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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그렇게 세게 불었던가?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시 한 번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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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습니다. 당신이랑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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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디에타의 심장이 요란스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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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 치며 디에타는 제 입가를 손으로 급히 가렸는데, 입을 가리는 게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디에타는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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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으니까. 아무리 입가에 힘을 줘도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아마 기분 나쁘게 히죽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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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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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저 사람, 방금 뭔 말을 했는지 자각이 없는 건가? 이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어, 그럼 나도 해버릴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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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마비될 정도의 치명타. 제대로 판단이 내려지질 않았다. 디에타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만약, 평소의 디에타가 지금의 그녀를 본다면 ‘미친년아 정신 차려’ 하고 울부짖을 상황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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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진짜 지금 해버려? 그냥 확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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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지금의 디에타에겐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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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에게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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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누구던가? 이쪽에서 좋아한다고 티를 팍팍 내도 눈 한번을 깜빡이지 않는 목석같은 남자다. 가끔,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뿐 제대로 된 감정표현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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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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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다. 저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아직 나진은 연애 감정이 뭔지 모르고, 정말 순수한 의미로, 친구 대 친구로서 즐겁다고 말했을 거다. 그 사실을 디에타라고 모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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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고 있다 한들 진정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나진을 팔을 뻗어 제지하며 디에타는 고개를 돌렸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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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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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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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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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가다듬으며 디에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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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라, 디에타. 천천히 관계를 쌓아가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진을 자빠트리자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자신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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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은 훌륭한 상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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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상인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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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분가량이나 심호흡을 마친 디에타가 고개를 들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저랑 있는 게 기쁘다니, 부끄러운 말을 하네요? 그래도 나쁘진 않은걸요’ 같은 말로 받아칠 작정으로 디에타는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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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그,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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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싹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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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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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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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머리는 새하얗게 표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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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말하려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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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은, 나진의 앞에만 서면 평범한 소녀가 되어버리곤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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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호감을 사는 화려한 언변도, 계획도, 모략도, 연기도, 몸짓도, 이 남자의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 그녀를 치장하는 모든 게 벗겨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어쩔 줄 몰라 말을 버벅대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디에타라는 한 명의 소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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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이 디에타는 부끄러우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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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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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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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얗게 표백된 머리. 말을 짜내지 못하고 달싹이기만 하는 입술. 평소라면 여기에서 멈췄을 것이다. 당황해하면서 고개를 휙 돌리거나, 부끄러움이 앞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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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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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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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처음 보는 미소를 지어서? 부끄럽지만 기분 좋은 진심을 들려줘서? 상대가 진심으로 맞부딪쳐 오는데, 나만 거짓을 입에 담기는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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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라면 멀리 떠나 자주 못 보게 된단 사실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어서? 지금의 관계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욕심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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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 하나 콕 집을 수 없다. 단지, 그 모든 이유가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디에타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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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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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디에타. 왜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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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말은 계획적으로 한다.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이 말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또 어떻게 도움이 되고 피해가 될지를 계산하며 단어를 고른다. 그것이 평소의 디에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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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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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저 떠오르는 단어를 입에 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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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했죠.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친구로 남아줬음 좋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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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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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나진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디에타는 모른다.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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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인데요. 친구도 좋긴 한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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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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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자신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굳이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는 사실 역시 그녀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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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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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답이다. 리스크만 한가득하다. 급하게 내지르지 않아도 될 거래다. 만약 이런 거래를 하는 상인이 있다면 ‘삼류가 따로 없네요’ 하고 디에타는 비웃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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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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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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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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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또 어때? 충동적으로 질러버리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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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적인 건 ‘금화를 삼키는 뱀’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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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나진의 앞에서만큼은 소녀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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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건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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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짓궂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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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바라는 건 친구 이상의 관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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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무대로 나아갈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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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수많은 것들을 겪고, 수많은 이들을 마주할 소년. 저 소년에게 디에타는 자신이 ‘한때의 추억’으로 기억되길 원치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도 마모되지 않을 강렬한 기억이 되길 그녀는 욕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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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평소보다 한 걸음 더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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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한 마디 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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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거면 지금이라고, 아직은 수습할 수 있다고, 시끄럽게도 소리 질러 대는 제 이성을 무시한 채 디에타는 나진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다시 한 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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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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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에 자신만이 담길 거리까지 그녀는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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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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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좋아해요.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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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관련해선 문외한인 이 소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디에타는 도망칠 구석을 남기지 않은 채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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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면서도 정직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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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로 비유하면 아탕가의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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