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나진.” 디에타가 머리칼을 정돈하며 나진에게 질문했다. 나진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 잠깐의 침묵. 나진은 디에타를 말없이 바라봤다. “뭐, 뭐에요? 그렇게 빤히 보고.” “잠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뭘요?” “사실 온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디에타가 늘 병문안을 와줬으니, 한 번쯤은 제가 찾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들렸습니다.” “별걸 다 신경 쓰시네. 몸은 좀 괜찮아요?” “덕분에.” 나진이 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고급 포션을 음료수처럼 마시다 보니 금방 낫더군요. 지금은 멀쩡합니다.” “의사들은 최소 반년은 휴식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는데···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순식간에 털고 일어나는군요?” “제가 좀 특이체질이라.” 나진이 완쾌했단 사실에 기쁨이 절반. 그리고, 아쉬움이 다시 절반. 디에타는 쓰게 웃으며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이 완쾌했단 소식은 그가 어딘가로 또 훌쩍 떠날 시기가 다가왔단 뜻이기도 했으니까. “다 나았으면 떠나겠네요?” 아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것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긴 합니다. 언젠가 말해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으니까요.” “어디 먼 곳으로 떠나나 봐요?”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얼마나 멀리 떠나길래?” 나진이 창밖을 바라봤다. 잠깐의 침묵 후 나진이 입을 열었다.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저야 상관없는데 보는 눈이 많지 않을까요? 이야기하기 어려울 텐데. 당신 이제 정말 유명인이잖아요.” “사람이 별로 없는 장소가 있잖습니까.” 사람이 없는 장소? 디에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디에타게 힌트를 주듯 나진이 창밖을 가리켰다. “전망 좋은 곳. 석양이 잘 보이는 곳이요.” 정답을 떠올린 디에타가 아, 하고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 무렵 나진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잠시 집무실 바깥으로 나가 파시온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문밖에서 어이없다는 듯 웃는 파시온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러든지.’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디에타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린 순간, 나진이 성큼 디에타에게 다가왔다. “그럼 가죠.” 나진이 디에타에게 두 팔을 쭉 내밀었다. “어··· 그 팔은 뭘까요?” “훌륭한 이동 수단?” 눈을 깜빡이던 디에타는 나진이 내민 팔을 보곤 웃었다. 이윽고 그녀가 나진에게 안겼다. 디에타를 가볍게 들어 올린 나진이 땅을 박찼다. 휙, 그리고 탁. 창문의 턱을 밟고 나진이 도약했다. 근래 들려오는 명성이 허풍이 아님을 증명하듯, 나진의 움직임은 가볍고 빨랐다. 사람 한명을 안고 있음에도 그 발걸음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덜컹, 하고 불어온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호위 대상이 납치당했는데, 우리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선배.” “죽어라 쫓아도 못 잡지 않습니까. 로마노프 경.” “그것도 맞는 말이군. 슬프게도.” “사실 저 녀석이 작정하고 누군갈 납치하려 들면 그걸 누가 막을 수 있나 싶긴 합니다. 로마노프 경께서는 가능하십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이 자리에 없었겠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우스와 파시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청춘이군. 청춘이야.” 2. 탁 트인 시야.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언젠가 나진이 디에타의 호위를 맡았을 무렵, 그녀를 데리고 왔던 장소였다. 그 장소에 다시 한번, 그것도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도착한 지금 디에타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불과 몇개월 만에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서. ‘그때만 해도 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진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것이 편안할 지경이었다. 달밤을 배경 삼아 도주할 무렵, 며칠씩이나 나진의 등과 품에 신세를 졌었으니까. 오랜만에 다시 맛본 나진의 품은 여전히 아늑했다. 기왕이면 조금 더 안겨있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남긴 채 디에타는 나진의 품에서 내렸다. 그녀는 옷을 정돈하며 언덕 아래를 바라봤다. 한눈에 들어오는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의 풍경.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벌써 1년이 다 돼가네요. 당신과 처음 만난 게 봄이었죠? 겨울도 끝나가는 게 슬슬 봄이 올 것 같네요.” “기왕이면 눈이 내리는 것도 보고 싶었는데, 캄브리아에는 눈이 내리지 않나 봅니다.” “여긴 따뜻하니까요. 남부 쪽이고.” “디에타는 눈 내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있죠. 많이.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아르베니아 공작가. 차디찬 별장에서 창밖으로 바라봤던 눈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았다. 눈이 내리면 눈싸움이니 썰매니 하는 놀잇거리들을 떠올리는 어린아이들과 달리, 디에타는 앙상한 가시나무만을 바라봐야 했으니까. “그러는 당신은··· 아직 눈을 본 적이 없겠군요?” “아쉽게도 그렇네요.” 나진은 지하도시 출신이었고, 지하도시를 벗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새삼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단 사실이 나진은 종종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루하루를 놓고 보면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밀도 있는 삶을 사는 나진에게 하루는 길고 시간은 느리다. 하지만 지나간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시간은 너무나도 짧게만 느껴진다. 느리면서도 빠르고. 길면서도 짧은 시간. 제멋대로인 시간의 흐름에서 나진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많다. 그들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나진에게 떠오르는 것은 멀린과 디에타였다. 지하도시를 떠난 이후 만나게 된 귀한 인연들. “디에타.” “네, 나진.” 자신의 첫 번째 친구. 친구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진에게 있어 디에타가 가지는 존재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래서일까? 그녀에게만큼은 먼저 말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그 길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전 조만간 외륙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저번에도 다녀왔잖아요? 용을 잡기 전에······.” “그때는 잠깐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나진은 소드시커의 경지에 올랐으며, 용을 토벌했고, 별을 손에 넣었다. 그 말은 즉 캄브리아에서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이었으며······. “캄브리아를 떠날 겁니다.” 그건 곧 나진이 다음 무대로 떠날 시간이 왔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디에타가 잠깐 숨을 삼켰다. “하긴, 그렇겠죠. 당신의 목표는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거는 거고······.” “그러기 위해선 별들의 전장에 가야겠죠. 더 많은 별을 얻으려면 그래야 하니까.” 디에타가 말했고 나진이 이어받았다. 디에타는 나진의 목표를 안다. 언젠가 나진이 캄브리아를 떠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날이 다가왔지만. “외륙으로 떠나면 대륙에는 자주 오진 못할 겁니다.” “머니까요. 물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외륙(外陸), 바깥의 땅. 그중에서도 나진이 말하는 ‘별들의 전장’이란 장소는 단순한 거리뿐만이 아닌 개념적으로도 먼 곳이다. 피안과 차안. 저승과 이승. 온갖 종교와 서적에서 별들의 전장은 그야말로 별세계처럼 묘사되곤 한다. 일반적인 인간은 발을 디딜 수 없는 곳. 강자라 불리는 소드시커들 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곳. 저 밤하늘에 빛나는 초월자들이 거하는 전장은 그런 곳이다. “위험하겠네요.” “그럴 겁니다.” “지금보다 더 많이 다칠 거고요?” “그렇겠죠, 분명.”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긴 한데, 당연하게도 안 듣겠죠?” 나진은 침묵함으로써 답했다. 디에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남자한테 빠졌는지.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생각이었다. 디에타는 나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노을빛, 이제는 백금색에 가까운 눈동자. 그 눈동자는 디에타를 보고 있지 않다. 저 눈동자는 언제나 먼 곳만을 향한다. 멀고도 험하며 까마득하게 높은 곳. 그곳에 닿기 위해 나진은 앞만을 보고 달린다. 그 모습이 멋있긴 하지만 디에타는 가끔 섭섭하기도 했다. 나진에게 있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조금만 옆을 돌아봐 주면 좋을 텐데. 나를 좀 봐주면 좋을 텐데. 이래서야 당신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멋대로 두근거리고, 기대하고, 설레는 나만 바보 같지 않은가. 일방적인 관계는 당연하게도 한쪽을 지치게 만드는 법이다. 이쪽은 설레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겠는데, 상대방은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사실에 디에타는 서운함을 느끼는 동시에 아이 같은 자기 모습에 부끄러움 역시 느꼈다. ‘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섭섭해한다니.’ 그날 약속하지 않았나? 서로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자고. 정상에서 만나자고. 그리 말해놓고선, 정작 상대가 목표만 보고 달려간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낀다니.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계산적이고 철저하며 이성적이다. 감정적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인물. 평소의 디에타는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진의 앞에만 서면 디에타는 바보가 되어버리곤 했다. 서운하기야 하지만, 그 속내를 드러낼 생각은 없다. 모처럼 나진이 신청한 데이트다. 이 좋은 시간을 그따위 감정에 사로잡혀 허비하기엔 아까웠다. 디에타는 살짝 웃어 보이며 나진을 바라봤다. 그렇게 그녀가 대화를 이어 나가려던 찰나. “아까 말했었죠. 전 아직 눈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늘을 바라보던 나진이 시선을 내렸다. 그 눈동자가 하늘의 별이 아닌 디에타를 향했다. “사실 눈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그럽니다. 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다는 푸르른 바다도 본 적이 없습니다. 뭡니까 그게? 책으로는 읽었지만 솔직히 믿기진 않더군요.” 나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눈, 바다, 설산······ 그 외에도 수많고 또 수많은 것들.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지하도시를 나와 겪은 모든 게 제게는 낯선 것들 투성이죠. 그래서 하루하루가 새롭기도 하고, 어떨 땐 두렵기도 합니다.” “두려워요? 당신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르는 걸 알아가는 즐거움이 두려움보다 클 뿐이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영 못 믿겠다는 눈치로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은 피식, 웃으며 언덕 위에 놓인 울타리에 기대어 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나진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그래서.” 언젠가 하려던 말. 나진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았다. “당신에겐 늘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네?” “당신 역시 내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하고 나진이 웃었다. “당신이 내 첫 번째 친구인 걸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진의 회백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나진이 보인 웃음은, 디에타는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예, 솔직히 말하자면 디에타와 이야기 나누는 게 제법 즐겁습니다.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활짝 웃어 주는데,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기 참 어려운데······.” 짓궂고, 장난스럽고, 또 편안한. 그러니까 딱 나진 나이대의 소년이 지어 보일 법한 미소. 그 자연스러운 미소를 마주한 순간 디에타는 무심코 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즐겁습니다. 당신이랑 있으면.” “······.” “외륙으로 떠나는 게 조금은 아쉽다고 느끼는데, 아마도 디에타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외륙을 가면 자주 이야기 나누진 못할 테니까요. 아, 이거 아예 안 찾아 오겠단 소린 아닙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대륙으로 돌아올 생각인데, 그때······.” 나진이 말을 늘어놓았다. 늘어놓았지만, 그 목소리는 중간부터 디에타에겐 닿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디에타 때문인 것 같긴 합니다’라는 문장이 결정타였다. 그 뒤에 이어진 나진의 목소리가 디에타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로 들릴 지경이었다. 나랑 있으면 즐겁다고. 나 때문에 외륙으로 떠나기가 아쉬워진다고. 그러니까, 그··· 자주 볼 수 없으니까? 나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디에타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디에타가 떨리는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디에타의 눈동자가 마치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친구로······.” “나진.” 디에타가 나진의 말을 끊었다. 그리곤 성큼, 한걸음 나진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 서로의 눈동자가 눈동자를 비추는 거리에 멈춰 선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입술을 움직였다. “방금 한 말,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동자였다. 3. “예? 어느 부분 말입니까.” “즐겁습니다. 다음 부분.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지 뭐에요? 제대로 못 들었으니 다시 한번만······.” 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불었던가?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시 한 번 말해줬다. “즐겁습니다. 당신이랑 있으면.” 쿵, 디에타의 심장이 요란스레 뛰었다. 디에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 치며 디에타는 제 입가를 손으로 급히 가렸는데, 입을 가리는 게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디에타는 생각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으니까. 아무리 입가에 힘을 줘도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아마 기분 나쁘게 히죽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저 사람, 방금 뭔 말을 했는지 자각이 없는 건가? 이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어, 그럼 나도 해버릴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가? 이성이 마비될 정도의 치명타. 제대로 판단이 내려지질 않았다. 디에타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만약, 평소의 디에타가 지금의 그녀를 본다면 ‘미친년아 정신 차려’ 하고 울부짖을 상황이지만······. ‘진, 진짜 지금 해버려? 그냥 확 질러?’ 당연하게도, 지금의 디에타에겐 들리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게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나진이 누구던가? 이쪽에서 좋아한다고 티를 팍팍 내도 눈 한번을 깜빡이지 않는 목석같은 남자다. 가끔,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뿐 제대로 된 감정표현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물론 안다. 저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아직 나진은 연애 감정이 뭔지 모르고, 정말 순수한 의미로, 친구 대 친구로서 즐겁다고 말했을 거다. 그 사실을 디에타라고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한들 진정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나진을 팔을 뻗어 제지하며 디에타는 고개를 돌렸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잠, 잠시만요.” 디에타가 심호흡했다. 길고 또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디에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신 차려라, 디에타. 천천히 관계를 쌓아가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진을 자빠트리자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자신답지 않다. 금화를 삼키는 뱀은 훌륭한 상인이다. 훌륭한 상인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법. 무려 3분가량이나 심호흡을 마친 디에타가 고개를 들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저랑 있는 게 기쁘다니, 부끄러운 말을 하네요? 그래도 나쁘진 않은걸요’ 같은 말로 받아칠 작정으로 디에타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랑, 그, 그러니까.” 달싹였지만. “그으······.” 나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디에타의 머리는 새하얗게 표백됐다. 뭘 말하려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금화를 삼키는 뱀은, 나진의 앞에만 서면 평범한 소녀가 되어버리곤 만다. 상대의 호감을 사는 화려한 언변도, 계획도, 모략도, 연기도, 몸짓도, 이 남자의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 그녀를 치장하는 모든 게 벗겨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어쩔 줄 몰라 말을 버벅대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디에타라는 한 명의 소녀뿐이다. 그 사실이 디에타는 부끄러우면서도. 또,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 새하얗게 표백된 머리. 말을 짜내지 못하고 달싹이기만 하는 입술. 평소라면 여기에서 멈췄을 것이다. 당황해하면서 고개를 휙 돌리거나, 부끄러움이 앞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피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진이 처음 보는 미소를 지어서? 부끄럽지만 기분 좋은 진심을 들려줘서? 상대가 진심으로 맞부딪쳐 오는데, 나만 거짓을 입에 담기는 싫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멀리 떠나 자주 못 보게 된단 사실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어서? 지금의 관계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욕심이 나서? 어느 것 하나 콕 집을 수 없다. 단지, 그 모든 이유가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디에타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진.” “예, 디에타. 왜 그럽니까?” 모든 말은 계획적으로 한다.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이 말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또 어떻게 도움이 되고 피해가 될지를 계산하며 단어를 고른다. 그것이 평소의 디에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저 떠오르는 단어를 입에 담을 뿐이다. “아까 말했죠.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친구로 남아줬음 좋을 것 같다고.”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디에타는 나진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디에타는 모른다.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 “그거 말인데요. 친구도 좋긴 한데 음······.” 디에타는 안다. 지금의 자신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굳이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는 사실 역시 그녀는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답이다. 리스크만 한가득하다. 급하게 내지르지 않아도 될 거래다. 만약 이런 거래를 하는 상인이 있다면 ‘삼류가 따로 없네요’ 하고 디에타는 비웃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럼 또 어때?’ 디에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또 어때? 충동적으로 질러버리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다고. 계획적인 건 ‘금화를 삼키는 뱀’이면 충분하다. 디에타는 나진의 앞에서만큼은 소녀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건 안 되겠네요.” 소녀가 짓궂게 웃었다. “제가 바라는 건 친구 이상의 관계니까요.”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갈 소년. 앞으로 수많은 것들을 겪고, 수많은 이들을 마주할 소년. 저 소년에게 디에타는 자신이 ‘한때의 추억’으로 기억되길 원치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도 마모되지 않을 강렬한 기억이 되길 그녀는 욕망했다. 디에타는 평소보다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평소보다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멈출 거면 지금이라고, 아직은 수습할 수 있다고, 시끄럽게도 소리 질러 대는 제 이성을 무시한 채 디에타는 나진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다시 한 걸음 더. 탁. 나진의 눈동자에 자신만이 담길 거리까지 그녀는 다가갔다. 그리곤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나진.” 연애와 관련해선 문외한인 이 소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디에타는 도망칠 구석을 남기지 않은 채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담백하면서도 정직한 공격. 검술로 비유하면 아탕가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