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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혀있던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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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쉬다가라며 황실에서 직접 마련해준 접견실은, 사람 몇 명이 앉아있기엔 지나치게 넓고 화려했지만 접견실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을 감안해보면 썩 그렇지만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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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초월자를 품기엔 그 크기가 너무나도 협소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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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린 순간 카론은 헛웃음을 흘리며 ‘드디어 행차하셨군.’ 하고 중얼거렸고, 유엘은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선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노인이 서 있었다. 그렇다. 노인(老人)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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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이 노인을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옛 지혜를 가진 현명한 이들이라 여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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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과 마법사들의 세계에서 노인이란 단지 세월의 흐름에 패배한 패배자들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공경의 대상이 아닌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 그야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 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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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에서 자유로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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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최전성기로 고정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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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도 대폭 연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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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들의 세계에서 노인이란 단지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채 늙어버린 패배자를 가리키는 단어일 뿐. 그러나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란 게 존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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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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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곳에 서 있는 노인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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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머리는 새하얗게 셌다. 유엘의 백발이 아름다운 비단결이라면, 노인의 머리칼은 황야에 굴러다니는 모래알처럼 버석거렸다. 어디 머리칼뿐일까. 노인의 얼굴과 피부에 가득한 주름은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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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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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등은 굽지 않았다. 어깨는 안으로 말리지 않았으며 눈동자 역시 탁해지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에 휩쓸린 것이 아닌, 흐름 속에서 우직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인(巨人)이다. 나진은 노인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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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체격이 건장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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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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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소드 마스터, 게르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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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주겠나. 유엘. 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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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호명에 카론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즐길 만큼 즐겼으며, 대화도 나눌 만큼 나눴다. 유엘 역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게르드를 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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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제국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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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는 제국의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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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들이 같은 선에 서 있다곤 하나 제국의 중심에서만큼은 게르드를 가장 높게 쳐주는 것이 그들 사이의 관례였다. 반대로 검의 교단이나 성혈 교단의 본교회에선 각각 카론과 유엘이 존중받는 것이 관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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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들 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합의한 것. 그 규칙에 따라 유엘과 카론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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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겁주지는 마쇼. 게르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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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카론이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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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유엘과 카론이 떠나자 게르드는 가벼이 손을 휘둘렀다. 그것만으로 방안에서 진동하던 술 냄새는 증발했다. 한순간에 공기가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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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너무 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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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가 그리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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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게르드가 들어 올린 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쿠웅, 하고 둔중한 소리가 메아리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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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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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견실의 풍경 위로 무언가 덧칠됐다. 나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마치 완성된 그림의 위에 물감을 흩뿌리듯, 접견실의 풍경 위로 새로운 풍경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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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혀있음에도 바람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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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치는 바람에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진의 머리칼이 요란스레 흔들렸다. 밀려드는 바람 직후에는 한 번의 번쩍임. 천천히 나진이 눈을 뜨자 그곳은 더 이상 사방이 막혀있는 접견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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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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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저 너머까지 펼쳐진 초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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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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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하고 울려 퍼진 발걸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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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접견실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마나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접견실 바깥에 서 있던 이들이 마나에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혼절해 고꾸라지는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그 마나에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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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카론과 처형인 유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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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두 사람의 검이 동시에 뽑혀 나왔다. 판단이 아닌 무의식적인 반응. 검을 뽑아 들었던 두 사람은 이곳이 영향범위 바깥이란 걸 눈치채곤 짧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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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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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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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영역이라고 너무 막 나가는구만. 하여간 성격 더러운 노친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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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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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엘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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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중추에서 검의 영역을 펼치는 것은 엄연한 불법. 제국제일각께서 초법권을 지니고 있다 한들, 이는 권력남용입니다. 때에 따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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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누가 제국제일각에게 책임을 묻냐는 게 문제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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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태양께선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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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태양이 허락했기에 움직였겠지. 저 노인은 그런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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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도 불쾌해 보이는 기색으로 카론은 칼끝을 털었다. 칼날의 끝에 맺혀있던 풍경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유엘 역시 비슷한 동작으로 풍경을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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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저 공간이 두 사람마저 집어삼키려 했다면, 유엘과 카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이는 명백한 도발이자 선제공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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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간은 저 문의 안으로 한정돼 있다. 여전히 불쾌한 건 변함없지만, 정식으로 항의할 만한 명분은 딱히 없었다. 카론은 길게 숨을 내뱉고선 납검했다. 게르드가 저런 일을 벌인 이유야 하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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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보려 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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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도 당했던 일이다. 저 노인은 재능있는 이를 마주한다면, 그 바닥을 긁어 제 두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니 겁 좀 적당히 주라고 경고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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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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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쯧, 하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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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검에 대한 숭고한 태도는 존경할 만했지만, 그 인성만큼은 썩 존경하고 싶지 않았다. 제국과 검밖에 모르는 정신병자. 자신이 언젠가 내렸던 평가가 정확함을 다시 확인한 카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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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내가 가장 정상인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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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라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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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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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말없이 유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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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은 피에 미친 살인귀. 다른 한 명은 제국하고 검밖에 모르는 정신병자. 그들과 한데 묶이자니 새삼스레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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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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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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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은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말고, 카론은 문득 뒤를 흘겨보며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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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밑천을 털어보려 한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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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비공식적인 제자. 몇 번 검을 가르치며 보았던 나진을 떠올리며 카론은 코웃음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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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쉽지 않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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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송이가 어디 그리 쉽게 털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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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하게 봤다간 도리어 한 방 먹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론은 자리를 떴다. 자신의 도움은 딱히 필요 없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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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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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빡이면 보이는 것은 드넓은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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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마저 조금 전과는 달랐다. 환상이 아니란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고도의 환각 마법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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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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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술수를 부렸다면 멀린이 간파했을 것이다. 그럼 남은 건 하나였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초월자들의 전유물. 검의 영역, 혹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 일찍이 카론이 말해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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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심상을 세상에 덧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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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바로 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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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이 세계의 주인이 서 있다. 게르드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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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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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 일을 워낙 많이 겪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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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곧장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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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모르게 짓눌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나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바로 섰다. 출입구는? 탈출할 방법은? 아마도 지금의 나진으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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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생각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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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제일각은 황제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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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뜻에 반하는 행위는 결코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국의 황제가 앞에서는 그리 수긍하고, 뒤에선 이런 일을 벌일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술수를 쓸 필요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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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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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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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게르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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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마주한 채 게르드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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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선 말씀하셨다. 제국이 너를 지켜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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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그리 말씀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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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인은 제국의 첫 번째 기둥이다. 황제께서 이르신 제국에는 본인 역시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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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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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옳은 말도 아니었다. 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의 소드 마스터 앞에서 세게 나가봐야 좋을 건 없지만 고개 숙이고 있기에도 좀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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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했습니까? 아직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요. 너무 빠르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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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것보단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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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서 무얼 보시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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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숨기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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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나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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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황제께 모든 것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는 직감한다. 네가 무언갈 숨기고 있단 사실을. 나는 그것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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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네 밑천을 털어보겠단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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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인물을 보고 있자니, 나진은 왜인지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왜 만나는 사람마다 내 밑천을 못 털어먹어서 안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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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천재란, 타인의 시기와 질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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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도 그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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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다르지······ 질투는 아니었잖아. 그건 확인해야만 했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잖아···! 아니, 너 이렇게 섭섭하게 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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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에요.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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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섭섭한 목소리로 투덜대는 가운데 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숨기고 있는 것?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결코 보여줄 순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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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하는 상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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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기에 일단 유엘보다는 정상 같았다. 나진이 천천히 입안에서 단어를 하나씩 골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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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숨기고 살아갑니다. 전력이란, 숨기고 있기에 가치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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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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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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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 있단 사실은 부정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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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해 봐야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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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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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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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 네가 외친 맹세는 진실했다. 훗날 네 신념이 꺾이는 일은 있더라도, 당장 너는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겠지. 맹세를 입에 담을 때 네가 보인 기세, 기개, 영혼의 울림. 나는 그것을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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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적인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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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의 눈동자는 온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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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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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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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살기가 나진을 덮쳤다. 유엘의 살기처럼 무의식적인, 무차별적인 살기가 아니었다. 한 명을 겨냥하고 짓눌러 뭉개려는 거대한 살기. 나진의 눈에 핏발이 바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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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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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양 살기를 거둔 게르드가 칼을 쥔 나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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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쥐는 자세. 한순간 움직인 네 손. 뒤로 물러서며 뻗은 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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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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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왼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으나 게르드가 가리킨 것은 나진의 오른손이었다. 그리고, 나진의 오른손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당장에라도 허공에서 무언갈 뽑아 들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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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의심을 더해주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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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흔들리는 초원에 바로 선 노인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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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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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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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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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을 들은 순간 나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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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누구든 자신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럴만한 업적을 세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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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은 실수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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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주워 담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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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숨을 가다듬고 손을 내렸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가. 나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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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제일각, 게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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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인은 어떠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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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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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이 신봉하는 가치는 검과 제국뿐이야. 제 연인도, 자식도, 삶도, 모두 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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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카론에게 들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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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에서 보았던 게르드에 대한 기록. 검과 제국만을 신봉하는 인간. 그러니까,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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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劍)에 삶을 바친 이. 검사(劍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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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준 삼아 나진은 머릿속에서 문장들을 짜 맞췄다. 예로부터 강자를 상대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하는 것은 나진의 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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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흥미. 신념. 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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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이용해 상황을 넘어갈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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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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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문했다. 질문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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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나, 저는 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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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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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검사가 검을 놔두고 입을 통해 떠들어댔습니까? 물어볼 게 있다면 검으로 물어라. 그것이 검사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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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의 눈매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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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그 입가가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나진은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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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저 사이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으나, 저도 경도 검사라는 사실만큼은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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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검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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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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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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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국제일각이 아닌 한 자루의 검으로 초월의 경지에 오른, 검사 게르드 경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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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대답에, 게르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진이 결투를 청한 것은 제국의 안위를 위해 변수를 파악하려 하는 제국제일각이 아니다. 단지 흥미본위로 나진에게 접근한, 재능있는 인물과 검을 맞대고 싶어 하는 검사 게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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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밑바닥을 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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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디 검으로 물어봐라. 그게 검사의 도리 아니겠는가? 눈앞의 소년은 그리 이야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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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도를 게르드는 이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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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기에 어이가 없었고, 어이가 없었기에 흥미로웠으며, 흥미로웠기에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투를 걸어온다고? 내게? 초월의 경지에 오르고 결투를 받아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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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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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함께 게르드의 무표정이 깨졌다. 노인이 쓰고 있던 가면은 박살 났다. 가면에 가려져 있던 것은 검을 위해 제 삶을 내던진 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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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을 마주한 채 나진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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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지 짓밟는 결투가 되어서야 저도 밑천을 보여드릴 순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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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내게 손대중을 둘 것을 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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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의 전유물만을 다루지 않아 주신다면야, 그걸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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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드는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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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꾀가 많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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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하다고 표현해 주심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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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노인은 웃고 있었지만, 그가 검을 뽑아 든 순간 나진은 온몸의 감각이 바짝 곤두섬을 느꼈다. 섬뜩했다. 섬짓했다. 직감이 비명을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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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밑천을 털 생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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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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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털릴 각오는 해놨겠지, 제국의 소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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