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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마검 포르테(Forte) (21) - 남겨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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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도 과장도 쏙 빼놓고, 현자는 오직 자기 혼자 힘만으로도 대륙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국가쯤은 전복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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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팡이로 땅을 한 번 내려쳐 시야 내의 모든 토지를 모래사장으로 바꿀 수 있었고, 집채만큼이나 거대한 나무를 키워낼 수도 있었으며, 암석과 식물 조작 능력을 활용해 강력한 골렘 군단을 양성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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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자의 동료인 용사와 성녀는, 비록 방향성은 다를지언정 그런 현자와 동격의 강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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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현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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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을 온존한 채로 마왕과 무사히 조우 할 수만 있다면, 승산은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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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우습게 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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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하나하나가 국가 수준의 전력인 그들 세 명이 마왕 하나에게 동시에 덤비고도 승리를 확신하는 게 아니라 승산이 있긴 있다고 여긴 시점에서, 현자의 판단은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겁쟁이라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신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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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자는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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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신중해야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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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자식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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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가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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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투지를 불태우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몸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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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중에 그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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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된 그 순간 마왕이 발한 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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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을 단숨에 베어낼 것만 같았던 그 참격의 잔상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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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마왕의 검을 제때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단숨에 전멸당하고 말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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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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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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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과 용사의 검이 맞부딪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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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정제되고 압축되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마왕의 오러가 화려하게 흩날리는 용사의 꽃보라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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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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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에 처한 것은 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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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엇갈릴 때마다 용사의 몸을 지키던 꽃잎들이 수십 장씩 소멸하고, 용사의 몸에도 자잘한 상처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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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한 빈틈을 노리듯 마왕의 일섬이 발해지자, 용사의 몸통 한가운데에 대각선이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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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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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배에서 선혈과 함께 내장이 흘러나오기 전에, 성녀의 축복이 그 상처를 억지로 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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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그대로 검에서 오러를 뿜어 용사와 성녀를 동시에 베어내려 했지만, 현자가 만들어낸 골렘들이 그런 마왕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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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기사보다도 강력한 골렘들 수십 체를 제물로 바쳐 벌어낸 시간은 겨우 1초 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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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다시 태세를 바로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그 때문에 현자의 전력이 크게 깎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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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딱히 아쉬워하는 기색도,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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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생겨난 수백을 넘는 창들이 용사 일행을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현자가 만들어낸 바위의 벽과 성녀의 축복이 그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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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마왕의 발밑을 질척한 늪으로 뒤바꿔 그의 발을 묶으려 했지만, 마왕은 제 마력으로 지면 전체를 코팅해 현자의 간섭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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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일행은 지금 마왕과 맞서 제법 좋은 싸움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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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력을 소모 시키고 있고, 갑옷에 상처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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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흩날리는 꽃보라가, 성스러운 광휘가, 쇄도하는 인형의 군세가 이를 가능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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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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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마력이 바닥나는 것보다, 용사 일행의 마력이 바닥나는 게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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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쓰러지는 것보다, 용사 일행이 쓰러지는 게 더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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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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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디검은 갑옷을 덜그럭거리며, 마왕이 검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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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량을 지닌 어둠 그 자체가, 검은 갑옷을 입고 인간 흉내를 내는 듯한 외형을 지닌 마왕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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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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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에게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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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작업을 하면서 일일이 일희일비하는 일이 없듯이, 그저 마왕에게 있어선 이 싸움 자체가 ‘처리해야 할 작업’에 불과하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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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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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마왕의 눈에 자신과 동료들은 그저 서류상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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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는 부족해, 애초에 전력 계산 자체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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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위계 하나 차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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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과 그렇지 않은 이의 아득한 경계가, 용사 일행과 마왕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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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머릿속이 필사적으로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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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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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나란히 도망치려고 해봐야 그대로 등을 베일 뿐이고, 누구 하나가 미끼가 된다고 한들 유의미한 시간을 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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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단기전으로 몰아붙인다?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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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일행은 지금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으로 마왕을 몰아붙이고 있다. 여력을 남겨서 길항인 게 아니라,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길항이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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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을 바꾸는 건 어떨까? 이 가짜 몸을 제물로 바치는 건? 협상으로 블러프를 시도하는 건? 차라리 항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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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선택지와 수단이 현자의 뇌리에서 조합되고, 그 즉시 현자 본인에게 반박당해 폐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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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방법을 강구하는 도중에도 전황은 점점 나빠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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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현자가 절망에 빠진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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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위대하신 당신께, 저 자신을 봉헌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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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뒤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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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마력이 가득 메우고 있던 공간의 점유율을, 성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찬란한 광채가 강탈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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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와 현자의 힘을 증폭하던 빛이 몇 배로 강해지고, 그들의 몸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지만, 용사와 현자는 기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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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몸이 발끝부터 빛으로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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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신에게 막대한 힘을 빌리는 대가로서, 성녀의 존재 그 자체가 제물로 바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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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롭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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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길 만큼은 비겁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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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극히도 인간적이던 여인이, 어쩌면 죽는 것보다도 더 심한 결말을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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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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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현자는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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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던 방법을 성녀가 스스로 선택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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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선택에 슬퍼하는 것만큼이나, 그로 인해 생겨난 승산에 기뻐하는 자신이 역겨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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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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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와 함께 용사가 앞으로 뛰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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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신이 망설이는 것이 성녀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넘쳐흐르는 눈물조차 나중으로 미룬 채 마왕에게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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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에 사용할 최소한의 꽃잎조차 모조리 공격으로 돌린 결과 용사의 몸 곳곳이 베이고 터지고 으깨지지만, 성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압도적인 빛이 용사를 죽음에서 삶으로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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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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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주문으로 팔다리가 날아가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마왕의 품속으로 달려들어 갑옷 한복판에 모든 마력을 주입한 지팡이를 꽂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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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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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릭, 끼리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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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갑옷 안쪽에서 자라난 나무뿌리가, 마왕의 움직임을 막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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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몸을 이루고 있는 어둠이 힘을 내뿜을 때마다 뿌리들이 부러지고 말라붙지만, 그 근원이 되는 지팡이만큼은 결코 부러지지도, 말라붙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마왕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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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이이이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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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꽃보라가 끝없이 마왕의 몸을 후려치며, 그 갑옷을 갉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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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마왕의 몸이 점점 너덜너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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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면서, 현자는 속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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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조금만 더 빨리, 제발,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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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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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쓰러지는 것보다 먼저, 용사와 현자에게 힘을 주던 그 막대한 광휘가 모습을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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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왕의 검이 용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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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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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여지가 없는 치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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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없어진 이상,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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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에 현자는 포기했으나, 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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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제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는 대신에, 오히려 마왕의 손을 붙잡고 그 검을 더욱 깊게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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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깊게, 마왕이 그 검을 빼내지 못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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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의도를 깨닫고, 현자의 눈이 크게 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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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용사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체력도 마력도 바닥까지 소비한 몸뚱이는 외침 하나 자아낼 힘조차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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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와 현자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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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남길 마지막 인사라는 듯이 힘껏 웃음을 만들어 보인 용사는, 그대로 마왕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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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오러가 용사와 마왕의 몸을 감싸며, 이윽고 한 송이의 꽃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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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듯이 만개하는, 최후의 꽃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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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흩날리던 꽃잎마저도 사라진 뒤, 현자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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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있었던 장소. 너풀거리듯 남겨진 그녀의 의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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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있었던 장소. 푸른 꽃잎에 감싸인 채 바닥을 구르는 흑색의 투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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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있었던 장소. 마왕군과 함께 서로 공멸한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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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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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에 잠긴 폐허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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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시간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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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위한 자네들의 헌신과 공헌에, 진실된 감사의 말을 표하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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