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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하인 세드릭(Cedric) (2) - 맑은 눈
하인용 분신을 만들어 내겠다고 했을 때, 루시드라가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만든 분신은 황태자일 때의 기억이 꿈처럼 애매하게 느껴지는 데다가, 성격도 직종에 맞게 본체와는 차이가 생긴다며?”
“그렇다만, 그게 뭔가 문제라도 있나?”
“네 목적은 악랄한 영애를 개심시켜 유능한 통치자의 싹으로 키우는 거잖아. 근데 주인에게 복종하는 ‘하인’의 정체성으로 그게 가능해? 주인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려도 따라야 할 텐데?”
정 개심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가정 교사 같은 게 좋지 않냐는 루시드라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인들이 왜 주인의 말에 무조건 따른다고 생각하지?”
“그야, 하인이니까?”
“여기 금운궁의 하인들은 안 그러네만?”
“뭐?”
루시드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세상에 어디 권위라고는 없는 몰락 귀족 밑의 빠질 대로 빠진 하인들도 아니고, 무려 제국의 황태자를 모시는 하인들이 명령 불복종을 일삼는단 말인가?
“하인들의 일일 노동시간이 너무 긴 걸 보고 좀 줄이라고 지시했었지. 일손이 부족한 거라면 그만큼 사람을 충원해도 된다고 말하면서. 그랬더니 제발 자기들 일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단체 하소연이 들어왔네. 치열한 교섭 끝에 본래 목표였던 6시간 3교대 근무 적용에 실패하고, 겨우 9시간 2교대 근무 정도로 타협해야만 했네.”
“…….”
“근무 시간에 매번 풀코스 먹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대충 햄버거나 샌드위치 좀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주방장이 사자후를 내뿜은 경우도 있었지. 요리사의 자존심을 걸고 나한테 그런 걸 먹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길래, 요리 대결까지 해서 승부를 겨뤄야 했네. 결국 세 끼 식사 중 점심만 내 마음대로 하기로 협상을 끝냈지.”
“…….”
“원래 하인들은 주인 상대로 자기 주장할 거 다 하면서 산다네. 그러니 ‘세드릭’ 역시 그러지 말라는 법 없지.”
“어….”
“기본적으로는 여기 하인들을 베이스로 삼되, 어느 정도 융통성도 있어야겠지. 마침 렌야라는 좋은 견본이 있었으니 활용해 볼까 하네.”
루시드라는 입을 벙긋거렸다.
뭔가 할 말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알론드는 그런 그녀를 방치했다.
이 카테고리:대악마(전직 서큐버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녔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담담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가느다란 실 다발로 변했고, 그 실 다발들은 황태자의 의지에 호응해 자기들끼리 엮이며 수많은 기관들을 구현해 냈다.
뼈, 근육, 신경 따위의 구성 요소가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는 모습을 보며, 루시드라는 어처구니없음을 느꼈다.
본래 그녀가 건네준 분신 마법은 그냥 뿅 하면 틱 하고 튀어나오는 구조였다.
본체를 견본 삼아 그 특징을 그대로 카피해서 찍어낼 뿐이다 보니, 사용자 입장에서는 굳이 분신의 세세한 형질 따위를 머릿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 황태자는 그런 분신의 생성 과정을 일일이 수동으로 돌리는 중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과정에서 동시에 정신이나 영혼 등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함께 짜 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혼에 관여하는 대악마로서, 루시드라는 그 결과물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강아지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렌야처럼 살살 알랑거리는 말투를 사용하는데, 정작 본인이 아니다 싶은 건 단호히 No라고 외치고, 그런 주제에 능력은 업계 최고인 금운궁 하인들에게 맞춰져 있어서 유능하기는 또 끝내주게 유능한…
‘…어라? 이거 그냥 맑은 눈의 광인 아닌가?’
문뜩 깨달은 사실에, 루시드라는 전율했다.
하지만 굳이 황태자를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고생하는 건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클라우디아는 눈을 껌뻑였다.
허나 아무리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해도, 그녀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도무지 바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깨갱거리는 그녀의 종복.
그리고 방안에서 갑작스레 머리 둘 달린 거대 늑대가 덤벼들었는데, 놀라기는커녕 가볍게 주의나 주고 마는 하인.
얼어붙은 클라우디아를 방치한 채로, 세드릭은 담담히 테이블을 방 안에 설치하고 그 위에 음식과 식기, 냅킨 따위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주방장님처럼 정식 코스 요리를 대접하기에는 저의 실력이 일천하여, 비교적 단순한 요리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가감 없는 평가 부탁드립니다.”
의자를 가볍게 뒤로 빼내며, 앉으라는 듯이 권유하는 세드릭.
그제야 헛, 하고 정신을 차린 클라우디아는 이내 매서운 눈으로 세드릭을 노려보았지만, 세드릭은 강아지처럼 크고 맑은 눈망울로 그녀를 마주할 뿐이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너….”
클라우디아는 이를 갈면서도, 순순히 세드릭이 권유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쌍두랑을 제압한 거냐고 묻기에는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렸기도 했고, ‘왜 내 생각대로 당황하지 않는 거냐’라고 하는 것도 뭔가 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준비된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세드릭 본인이 ‘단순하다’라고 평가한 만큼, 테이블 위에는 그리 많은 음식이 올라가 있지 않았다.
샛노란 색감이 인상적인 오믈렛이 하나, 언뜻 스테이크처럼 보이지만 질감이 다른 고깃덩어리가 둘, 스프와 샐러드가 각각 한 접시.
클라우디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오믈렛을 가볍게 떠올렸다.
‘쌀?’
단순한 오믈렛치고는 묘하게 부풀어 올라 있다 싶었더니만, 아무래도 안쪽에 야채나 고기와 볶은 밥을 집어넣은 요리인 듯했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제대로 먹을 생각 따윈 없었다.
대충 입에 대는 시늉만 한 뒤, 이딴 쓰레기를 나에게 먹이려고 한 거냐며 세드릭의 얼굴에 접시를 내던질 계획이었으니까.
우물.
“…?”
클라우디아의 머릿속이 순간 공백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재차 숟가락을 움직여, 오믈렛, 아니 오므라이스라고 불러야 할 물건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많이. 위쪽에 묻은 빨간 소스까지 같이.
그리고 다시 한번 우물.
밥알은 고슬고슬하여 씹을 때마다 고소한 맛이 배어 나왔고, 잘게 다져 절묘하게 볶아낸 채소들은 단맛을 자아냈으며, 소금기가 밴 닭고기는 씹는 맛이 있었다. 여기에 이 모든 걸 하나로 감싸는 달걀의 부드러움과 촉촉함까지.
클라우디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왜, 왜, 맛있지?’
머리로는 당장 먹는 걸 멈추고 접시를 내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손과 입은 그녀의 의지를 무시한 채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의 사술이 아닐까 의심될 수준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른 접시에 담긴 두 고깃덩어리 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심상치 않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던 그것에 나이프를 가져가 대니, 거의 힘을 줄 것도 없이 가볍게 썰어 낼 수 있었다.
적당한 크기로 썬 그것을 포크로 찍어, 한 입.
“…!!”
입안에서 홍수가 터져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육즙과 그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잘게 다진 고기, 그리고 무언가 다른 재료들의 혼합. 그 위로 묵직하게 혀를 감도는 소스의 강렬함.
샐러드와 스프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익숙한 맛이었지만, 그마저도 다른 두 음식과 함께 먹으니 맛이 몇 배로 늘어나는 듯했다.
클라우디아는 무언으로 계속해서 식기를 움직였고, 이내 그릇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만약 이 모습을 다른 하인들이 보았더라면 경악했을 것이다.
세드릭이 준비한 음식들의 양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많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클라우디아는 본래 입이 짧은 데다가 성격이 신경질적이라 걸핏하면 음식을 남기고 상을 뒤엎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클라우디아 자신도 본인의 행동이 납득이 가질 않는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눈으로 세드릭을 쏘아보았다.
“너, 이거 뭐야?”
“오므라이스와 함박스테이크, 샐러드와 스프입니다!”
“메뉴를 물어본 게 아니잖아!! 대체 뭔, 무슨 술수를 부렸기에, 이런.”
“술수라, 하하하. 아가씨께서 그리도 격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지.
클라우디아의 황당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드릭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의심될 만큼 음식 맛이 마음에 드셨다는 뜻 아닙니까? 임시나마 주방을 맡은 이로서 이만한 영광은 달리 없을 겁니다!”
울컥, 하고 클라우디아의 속에서 뭔가가 솟구쳤다.
“일개 하인 따위가 감히 날 조롱해!?”
클라우디아는 거의 발작하듯이 손에 쥔 나이프를 세드릭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허나 세드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이프를 잡아챈 뒤,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 세드릭, 입의 무거움 하나만큼은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아가씨께서 식사에 정신없이 몰두하셨다는 사실은 제 마음 속에 평생 묻어두고 가겠습니다!”
“이, 이게 진짜!!”
그 뒤로는 거의 난장판이었다.
포크, 숟가락, 접시 따위가 허공을 마구 비행했지만, 세드릭은 회피는커녕 무슨 재주라도 부리듯이 그것을 능숙하게 받아내 차곡차곡 정리했다.
바닥에 소스나 음식물 잔해 따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절하는 모습에서는 일말의 광기마저 느껴졌다.
얼굴을 크게 일그러트린 클라우디아는 성큼성큼 세드릭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치려 했지만, 이마저도 세드릭은 간단히 회피했다.
클라우디아가 마구 손을 휘두르며 그를 붙잡으려 애를 써도 마찬가지였다.
“너, 가만히 안 있을래!?”
“음?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그야 니가 하인이니까!!”
클라우디아는 짜증과 함께 악을 질렀다.
그녀가 폭력을 사용하면 하인들은 거기에 얌전히 당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 당연한 ‘규칙’을 무시하는 눈앞의 남자가, 클라우디아는 너무도 불쾌했다.
“이런.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하군요.”
세드릭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본 클라우디아는 세드릭의 입에서 튀어나올 변명을 기대했지만, 정작 그가 내뱉은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제가 맺은 계약에 ‘주인이 부당한 이유로 때려도 얌전히 맞아줄 것’이란 내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는 아가씨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될 수 있으니, 부디 자제할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세드릭은 담담히 식기와 테이블 따위를 다시금 정리하더니, 방 밖으로 나서기 전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필요한 일이 있다면 다시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철컥.
문이 닫히고, 방에 정적이 찾아왔다.
클라우디아는 한참이나,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끼이잉….
끙끙 앓으면서도 주인의 눈치를 보는 혈마수(血魔獸)의 울음소리가, 아가씨의 방에 구슬피 울려 퍼졌다.
“세, 세드릭. 자네, 괜찮은가?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아가씨께서도 만족하신 듯했습니다!”
“후우, 정말 다행이로군. 빈 접시를 보니 아가씨께서 자네 음식들을 마음에 들어 하신 모양이야.”
“후작가의 풍부한 식량 창고 덕분입니다! 생각보다도 품질이 좋고 종류가 다양해서 감탄했습니다.”
“아무리 본가가 아닌 별장에 불과하다고 해도, 레드벨은 레드벨일세. 왕국 최고의 부를 지닌 가문인데 식재료가 최고가 아닐 수 있겠는가.”
“주방장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후후, 그래,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아가씨께서 앞으로도 이렇게 얌전히 식사를 해주실 수만 있다면, 자네의 요리를 메인으로 삼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저 스스로도 제 솜씨가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고는 자부하지만, 제가 할 줄 아는 메뉴는 가짓수가 그리 폭넓지 않습니다. 주방장님의 넓은 식견과는 비교하기 어려우니, 만약 일을 맡겨주신다면 부디 가르침도 함께 내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이제 보니 자네 혀가 아주 매끄럽군, 아가씨가 왜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 잘 알겠어!”
“하하하하!”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