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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3) - 역할에 몰두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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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른 제국 수도, 칼라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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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머무는 금운궁에는 수백을 넘는 인력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은 최근 기이한 병증 하나를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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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하여 ‘이게 다 내 탓이오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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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의 주치의로서 옥체가 상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이 늙은이가 살아서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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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란 무릇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오는 것. 이게 다 시녀장인 저의 능력 부족입니다. 모든 직위와 재산을 금운궁에 반환하고 야인으로 돌아가려 하오니 부디 인허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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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검이 진정한 경지에 올랐더라면 전하를 괴롭히는 병마마저 베어낼 수 있었을 것을! 이러고도 전하의 호위이자 무술 스승이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부엌의 아낙네가 쓰는 식칼만도 못한 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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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지켜본 대악마가 평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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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얘들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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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진지하게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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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람이 살다 보면 잔병치레도 좀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겨우 그거 가지고 이리 호들갑을 떤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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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웃긴 건 황태자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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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주군이란 책임을 지는 자. 그대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는 더 큰 죄가 있으니, 더 이상 이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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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자꾸 그러면 나 돌려 까는 걸로 안다?’라는 협박에 부하들은 단숨에 입을 다물게 되었고, 황태자는 대략 3일쯤 누워있다가 멀쩡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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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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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태자의 첫 번째 분신, 베른이 파괴당할 때만 해도 루시드라는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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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의 파괴는 본체에게도 상당한 데미지를 안겨줄 테고, 그러면 그렇게 약해진 황태자를 꼬드겨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속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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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기대는 인간이 맞긴 한 건지 의문인 황태자 때문에 실패해 버렸지만, 이제 와선 그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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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몸살감기 정도로 이런 난리가 벌어지는데, 만약 이 인간이 각혈하면서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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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빼고 궁전이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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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원흉을 찾는다고 대대적인 조사 작업이 벌어졌을 테고, 자연스레 루시드라의 존재도 밝혀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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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과잉 충성 광신도들이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쫓아오는 광경을 떠올리며, 루시드라는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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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나. 혹시 악마도 감기에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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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아니거든. 그보다, 벌써 일어나도 괜찮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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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만전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사무 작업 정도는 문제없네. 당분간은 황태자 교육을 빼먹기로 했으니 그 시간에 밀린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분량이 너무 많아지면 감당이 안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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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댁 일하기 싫다며. 그러면 그냥 꾀병 계속 부리면서 쉬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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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의 말에, 황태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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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을 방불케 하는 이목구비에 그윽한 눈빛까지 곁들여지니, 대악마인 루시드라조차 가슴이 설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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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얼굴에 대놓고 ‘하이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라고 쓰여 있는데 설렐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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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그 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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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으로 일을 피해 봐야 그런 건 일시적이네. 장기적으로는 본인의 평판과 주변의 인망을 깎아 먹는 행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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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며 황태자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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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서 나는 일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일‘만’ 하는 게 싫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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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분신으로 다른 신분 만들어서 노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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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모험가의 생활은 실로 짜릿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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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너 연기 개 못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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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칫,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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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몸이 경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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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철벽같던 인간이 처음으로 드러낸 약점에, 악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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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핏하면 황태자 특유의 ‘높으신 분’ 시선이 튀어나오고, 가끔은 아예 말투까지 원래대로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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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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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민 모험가라고 컨셉 잡은 주제에 마법에 대해서는 왜 그리 쓸데없이 자세해? 보니까 네가 그 블랑카라는 애한테 알려준 지식들, 본래 평민들 사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보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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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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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지막에는 아예 대놓고 나 ‘분신’이오 하고 까발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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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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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화살이라도 맞은 듯이 죽어가는 소리를 낸 황태자는, 이내 애써 변명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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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일세. 거기서 그냥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건 너무 쓰레기 같은 행동 아닌가. 자칫하면 그녀가 평생 죄책감을 쥐고 살아갈 수도 있는데. 진짜 신분을 드러낼 수는 없어도, 그 몸이 가짜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그녀도 오해를 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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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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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잠시 콧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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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적어도 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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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루시드라가 보기엔 아무래도 그 블랑카라는 여자는 그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 같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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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상관없나? 내버려 두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오해가 깊어져서 골탕 먹는 건 이 인간이지 나는 아니잖아. 응, 문제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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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악마다운 결론을 내린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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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노출이 심하고 기묘한 광택이 있는 복장에서, 하얀 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라는 모습으로 변화한 그녀는, 마치 상품을 소개하는 영업 사원 같은 태도로 황태자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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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저와 새로운 계약을 나누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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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가 바뀌었군. 뭘 제안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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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 보다 ‘몰두’할 수 있는 마법이지요. 본체와 분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혼선을 막아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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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의 붉은 눈동자가 요염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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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와 분신의 혼선을 막아준다, 라는 표현은 언뜻 좋아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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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본체와 분신이 제각각 별개의 자아를 지닌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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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분신은 본체가 원하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니 분신이 본체에게 반역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어쨌든 분신 역시 황태자의 혼 일부를 지닌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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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수면을 취하고 있을 때처럼 무방비한 순간, ‘분신’ 쪽을 꼬드겨 계약을 체결한다면 여러모로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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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거라면 이미 만들었으니 딱히 필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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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의 악마 미소에 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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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를 방치한 채, 황태자는 태연스레 자기가 만든 마법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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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마법에 살짝 추가 개조를 더 했지. 관리자 계정과 하위 계정…이라고 하면 다소 이해가 어렵겠군. 풀어서 말하자면 본체와 분신의 의식을 구분 짓고, 분신 쪽의 정보는 본체 쪽에서 열람 가능하지만, 본체의 정보는 분신 쪽으로 넘어가지 않게 만들었네. 동시에 본체 쪽에선 분신에게 간섭할 수 있지만, 분신은 본체에 ‘요청’이 가능할 뿐 직접적인 간섭은 불가능하지. 기억 열람에도 제한이 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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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눈을 껌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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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뻑이다가, 이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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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대체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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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요 며칠 누워서 계속 쉬고만 있었잖은가. 틈틈이 해봤네. 재활 운동으론 적당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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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운동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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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들은 내용만 해도 개조가 아니라 아예 재창조 수준으로 마법을 바꿔 놓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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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돼? 그리 쉽게 고칠만한 마법이 아니라고! 그보다 그 정체성 문제라든가, 자아 혼란이라든가, 그런 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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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용 말투도 때려치운 루시드라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황태자는 진중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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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연기에 몰입한 배우는 자기가 배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하지. 허나, 그 배우의 의식 깊은 곳에는 여전히 배우 본인의 자아가 살아 있네. 그걸 응용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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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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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사고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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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악마가 아니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악마용 분신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개조까지 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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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구조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르니, 일반인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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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 분신은 어떻게 할 건데? 베른을 부활이라도 시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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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블랑카에게 슬쩍 다가가 안부 인사 정도는 건네볼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리수 같더군. 블랑카는 몰라도, 다른 모험가들은 베른이 정말 죽은 걸로 알고 있는 상황 아닌가, 심지어 죽은 곳이 리치의 던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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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의 던전에서 죽은 걸로 알려진 모험가가, 리치 토벌의 주역을 남몰래 만나러 간다? 의심받기 좋아도 너무 좋은 상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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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카의 성장과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는 황태자는, 괜히 자기 때문에 그녀가 불필요한 구설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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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새로운 분신이네. 이번에는 뭘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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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카 왕국 쪽을 좀 더 파고들어 볼 생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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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베른의 시점으로 보았던 비르카 왕국은 실로 개판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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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토 내에서 고블린 로드니, 리치니 하는 위험 요소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방치하고 있는 왕족과 귀족들의 행태는 통치자로서 신종 자살 방법이 아닌지 의심되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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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렌야가 떠들던 소문 중에 재미있는 게 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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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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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카 왕국 내에서도 손꼽히게 강대한 힘과 권력을 보유한 가문이 있는데, 그 가문의 아가씨는 성격이 매우 나빠서 그녀의 밑에 있는 하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바뀌기 일쑤라더군. 본래 그 정도 권위를 갖춘 가문이라면 하인 역시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이들로 채우는 법인데, 그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탓에 적당히 사람을 채워 넣을 정도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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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광이 심하고 성격 더러운 철부지, 아니면 사람 괴롭히는 게 천성인 악녀. 뭐 어느 쪽이든 멀쩡한 계집은 아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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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그 집에 하인으로 잠입해 볼 생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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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인 댁이, 남의 나라 귀족 가문 하인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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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역할 연기란 그런 법이지. 게다가 신분이 불분명한 인물이 갑작스레 귀족 근처에 접근하는 방법은 제한되어 있거든. 이 정도면 실로 적당한 기회라 할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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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라며 황태자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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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카와 어울리면서 깨달았네. 나는 생각보다 인재를 키워내는 게 꽤 취향에 맞는 모양이야. 성격 더러운 귀족 영애를 명군의 재목으로 바꿔낼 수 있다면, 이는 비르카 왕국의 정상화에도 한몫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사익과 공익이 일치 되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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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우면 제국 황태자 입장에선 좋은 일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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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지나치게 단락적인 생각일세. 대륙에 언데드 군세가 출현하거나, 고블린 왕국 같은 게 세워지면 우리로서도 귀찮은 일이거든. 옆집에 불씨가 있으면 일단 끄고 봐야지, 괜히 방치했다가 우리 집에 옮겨붙으면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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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참 잘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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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냥을 담아 대답한 뒤, 루시드라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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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름은 정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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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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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드릭(Ced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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