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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에 서명을 한 서란은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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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인 교단이 악행을 저지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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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았으니까 묵인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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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양심에 따라서 처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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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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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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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이 등장했으니 새로운 교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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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은 대대적인 교리 개편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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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의 도움으로 예복을 입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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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새로 바뀐 교리는 어떤 내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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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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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님, 부디 말씀을 낮춰주시지요. 저희 섬기는 이들은 그저 신께서는 내려주시는 명령이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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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이후부터 어인 교단의 태도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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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공손해서 이게 남의 주머니에 맘대로 주괴 쑤셔넣던 그 어인족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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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익숙하지 않은 명령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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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바뀐 교리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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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를 저희가 감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신께서 내리신 음성을 경전에 받아 적을 뿐이지요. 이번에 거행하는 용신제 도중, 두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곧 저희 교단의 새로운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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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관을 머리에 쓴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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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모자 대신 신발을 머리에 얹고 다니라고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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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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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당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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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용 옥경을 목에 건 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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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버리고 사막에 가서 살라고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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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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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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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모신 신에게 이 정도로 순종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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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악신이라도 섬기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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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딱 잘못하면 멸종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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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관점에서는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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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주의 설명을 들어보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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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에게는 이게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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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 중 일부는 무리를 지어서 포식자를 쫓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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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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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있어서 분열이란 곧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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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용을 만나고 어인족은 번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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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구원자에게 기꺼이 종족 전체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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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허락받았고, 어인 교단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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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책임감 있는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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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을 핍박하지도, 교단을 악용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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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량함 덕분에 서쪽 바다는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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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도 용신의 뜻에 충실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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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섬기기 좋은 신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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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악행을 일삼는 악신이었다고 해도 어인 교단은 절대적으로 복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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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이 심해에 얌전히 머무른 것은 신이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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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께서 육지를 가리킨다면 종족 전체가 기꺼이 창칼을 앞세우고 진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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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을 펼치며 어인들을 참살한다고 해도 그들은 신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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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인족의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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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질린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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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계약서는 도대체 뭐였지? 품위 유지 조항이니 계약 조건 변경 절차니 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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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란 그저 형식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께서 스스로 내리신 결정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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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변온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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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는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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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어인족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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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을 정의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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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을 만나고 신앙을 가진 이후부터 그들은 온전히 신의 소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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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어인족의 행보도 새로운 신에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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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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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군림할 것 같았던 용신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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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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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잃은 교단은 수십 년 동안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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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혼란한 곳만 골라다니는 요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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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듣고 해저 도시로 찾아온 만영충은 즉시 어인족의 탈을 뒤집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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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무질서에 기름을 끼얹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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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가는 오늘도 즐겁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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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은 떠났다! 우리 어인족을 버리고 홀로 승천해버린 것이다! 선행을 베푸는 것, 성실하게 일하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신을 섬기는 것! 용신이 우리에게 전해준 모든 가르침은 무가치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잔혹한 추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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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 속에서 신실한 노인 한 명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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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을 리 없어! 나는 용신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 그 분은 말 한마디 없이 신도들을 내던질 분이 아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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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가가 노인을 지목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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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소리! 용신은 벌써 하늘로 떠났다! 우리들을 버리고! 우리 어인족은 더 이상 신을 모실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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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 당한 군중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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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명히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다! 도저히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던 피치 못할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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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이유는 무슨! 그냥 우리를 버린 거야! 아니면 용이 지상에서 죽기라도 했을까봐!? 도대체 누가 용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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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가 열렬히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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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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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굽은 노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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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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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차 꺼져가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어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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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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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까 저축도 전부 부질 없는 짓이야! 어차피 어인 교단은 끝났어! 차라리 이 돈으로 인생 최후의 노름을 즐기는 게 남는 거야! 당장 도박장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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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여인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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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참에 확 가출해 버려야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자유롭게 놀 거야! 정말 좋은 생각이야, 오늘 바로 짐 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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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도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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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약쟁이가 될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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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도가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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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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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랑 이인조 사기꾼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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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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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노인은 사회를 물들인 어둠에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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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그래서는 안된다... 자고로 신앙을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다... 내가 정말 재미있고 교훈적인 경전을 읽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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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대장 소년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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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할아범. 요즘에 그런 지루한 얘기를 도대체 누가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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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물들어 가는 어인족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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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의 탈을 쓴 선동가, 만영충은 희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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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강대한 어인족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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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골목길에서 어떤 어인이 튀어나와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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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공식 발표 떴다! 오후에 용신제를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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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란 용신을 기리는 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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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들은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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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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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물든 어인족의 마음이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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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장 간다던 사내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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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용신님이야! 믿고 있었습니다! 도박은 무슨 도박이냐, 이 돈으로 자식들 공부나 시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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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결심했던 여인도 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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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사를 어서 부모님께 전해 드려야겠어! 아버지 어머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오늘부터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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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자가 될 뻔한 꿈나무들이 노인을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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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제발 교훈적인 경전 말씀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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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저도 독실한 신자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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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벌써부터 신앙심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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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노인은 굽은 허리를 똑바로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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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같은 근육과 듬직한 체격이 풍족한 신앙을 빨아들이며 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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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회춘한 노인이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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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답지 않은 훌륭한 신실함! 좋다, 소년 소녀들이여, 나를 따라와라! 함께 신앙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찬미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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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을 하던 만영충은 당황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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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왜 그러십니까?! 고작 용신이 돌아왔을 뿐입니다! 다시 우리를 버리고 떠나면 어쩌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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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일제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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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이 돌아오신 게 기쁘지 않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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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지? 돌아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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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인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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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영충은 뒤집어 쓴 변장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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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들켜 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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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쪽같이 숨긴 선동가의 정체가 탄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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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일이 해저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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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만에 치러진 용신제는 정말 성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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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호관을 쓴 담청과 서란은 높은 가마에 앉은 채로 쭉 뻗은 대로를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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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예쁜 조개와 소라고둥, 발광 산호를 뿌리며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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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새로운 신을 환영하며 소리치던 인파는 거대한 제단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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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꾼들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서란과 담청이 앉은 가마를 제단의 가장 높은 위치에 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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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가마가 안착한 순간 수백 명의 악단이 일제히 악기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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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의 하이라이트, 공개 문답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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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중간에 무릎을 꿇은 교주가 큰 소리로 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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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 대지모신님! 대지모신님, 용신님! 이 미천한 이가 종족을 대표하여 존귀한 두 분께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겨 그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어인 교단은 앞으로 어떤 가치를 쫓아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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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의 운명이 걸린 무거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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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오랜 고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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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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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본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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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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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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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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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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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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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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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도리를 따르라는 가르침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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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도구로써 다루는 포악한 명령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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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 바라신다면 어인 교단은 기꺼이 흑도 백도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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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색은, 망설임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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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이 절망에 잠긴 순간, 서란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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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철학이나 신앙과는 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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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스로가 원하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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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짧은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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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이 신자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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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우리가 추구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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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어인족을 새롭게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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