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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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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검성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 말의 뜻을 나진이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나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숨을 쉬는 것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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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역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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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에게 붙잡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면 움직일 수 있기야 하겠지만, 나진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떴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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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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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꼬리를 따라 고인 핏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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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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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들판에 닿을 때마다 튀어 올랐다.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나진은 검성을 보았다. 검의 정점에 오른 사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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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눈동자에 힘을 주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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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늘어진 시간 선상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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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나진은 정확하게 볼 수 없었다. 하늘로 향해있던 칼끝이, 어느샌가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실을 나진이 인지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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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투두두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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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던 빗방울이 갈라졌다. 무언가에 부딪쳐 빗방울이 비산했다. 빗줄기를 가르며 무언가 다가온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 갈라지는 빗줄기.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던 소나기를 밀어버리며 그것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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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과 나진 사이에 놓인 거리는 수십 미터가 넘어가거늘,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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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검성의 영역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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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칼을 휘두르면 베이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렇기에, 검성이 휘두른 칼끝에서 터져 나온 빛무리는 거침없이 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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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눈에는 한 번의 번뜩임으로 인식될 현상. 그러나 나진의 눈동자에는 보였다. 마치 단두대처럼 일자로 내려쳐지는 거대한 빛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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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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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삭음이 울린 것은 한 박자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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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울려 퍼진 절삭음과 함께 나진의 코앞에서 그것은 멈춰 섰다. 그것은 거대한 칼날이다. 저 하늘에 닿을듯한 거대한 빛무리가 바로 검성의 검기(劍氣)임을 나진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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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노을빛 눈동자에 검성의 검기가 맺혔다. 정점에 오른 이가 펼친 일격을 나진은 목도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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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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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검기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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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는 흩어졌으나, 검기가 끌고 온 바람이 뒤늦게 나진을 덮쳤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진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옷자락이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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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두두두두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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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에 갈라졌던 빗방울이 바람에 떠밀려 나진의 몸을 두들겼다. 제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 사이로, 나진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눈을 감고 제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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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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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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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뇌리에 검성이 펼친 일격이 하나의 획으로 새겨졌다. 눈을 감았음에도 그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검성이 휘두른 검(劍)은 하나의 구분 선으로 나진의 뇌리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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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凡人)과 초인(超人)을 구분하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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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만 소드 마스터와,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들로 양분하는 거대한 벽. 검성이 보여준 일격은 그런 구분 선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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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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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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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이 검을 뽑아 든 순간 느꼈던, 목덜미에 칼날이 닿아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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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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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나진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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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 전체가 검성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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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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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눈을 뜬 나진이 제 발치를 바라봤다. 일자로 깊게 파인 땅. 땅에 그어진 한줄기의 획(劃)은 저 멀리 서 있는 검성에게까지 이어져 있었다. 찰나의 순간 땅을 가르고, 빗방울을 갈라내며 쏘아진 한줄기의 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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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음에도 이해할 수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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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었기에 이질적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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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이었기에 거대한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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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거대한 벽을 마주한 이들은, 벽의 앞에서 좌절하거나 평생을 다 바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경지의 앞에서 공포와 허무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검사들에 국한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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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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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에게 도발을 갈기고, 엑스칼리버를 뽑아냈으며, 제 목숨을 걸고 도박수를 몇번이고 던져대는 별종 중의 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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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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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벽을 마주한 순간 나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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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이 아니다. 지금 나진이 느끼는 것은 경외감이요, 희열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닿아야 할 정점을 마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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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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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콱하고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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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자신이 닿아야 할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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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는 것이 아닌, 짓밟고 넘어서야 할 경지다. 나진이 목표로 삼은 곳은 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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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표를 곱씹으며 나진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검성과 시선을 마주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검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진의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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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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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했던 대로, 네게 검을 가르쳐주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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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이 끝난 후 검성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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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할일이 많아 그리 자주 찾아오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자네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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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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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봐주는 존재가 중위 사제에서 교단의 주인으로 바뀌었을 뿐, 나진에겐 익숙한 제안이었다. 일전에 볼크만도 같은 제안을 건넨 적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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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세간에 공개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자네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 같은 데다가··· 내게는 적이 조금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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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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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자를 들였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분명 성혈 교단의 처형인이 수소문해 널 찾아올 거다. 반드시 그렇겠지. 그녀는 그런 인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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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 교단의 처형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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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여섯 개의 별을 가진 소드 마스터, 유엘 라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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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그렇게 불리는 소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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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엘 라지안에 대한 정보는 나진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배경과 간략한 정보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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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사람을 많이 죽여서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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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 소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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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 교단의 처형인은 검사들에게 존경이 아닌 경멸과 두려움의 대상이란 글귀를 읽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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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를 베고 싶어 하거든. 내가 제자를 두었다고 한다면, 분명 관심을 가지겠지. 그녀가 아니더라도 온 세상의 이목이 자네에게 집중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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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이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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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나?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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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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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정중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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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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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의 말대로 검의 교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하기야, 나도 그리 추천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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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주인 아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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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은 좋은 곳이다. 좋은 곳이지만, 다양한 경험을 쌓기에 좋은 곳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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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은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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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험 같으니, 교단은 자네의 성향에 어울리진 않지. 강요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난 방랑 검객을 추천하는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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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낀 채 카론은 비가 내리는 들판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들판의 너머를 보고 있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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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한 자루만을 쥐고 세상을 방랑한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숱한 이들과 교류한다. 그 과정에서 검(劍)은 완성되는 법이지. 나 또한 그러했고, 최초의 검성께서도 그리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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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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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가는 곳을 따라 걷는다. 그리 이야기하는 카론의 말에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이 걷고자 하는 길도 그것과 비슷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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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나진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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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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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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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카론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진의 눈동자에 비춘 카론은 볼크만과는 달랐다. 재능을 가진 검사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듯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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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게 검을 가르쳐주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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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나진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기에 내게 검을 가르쳐주냐고. 그 질문에 검성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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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이에게 검을 가르치는 건, 검의 교단의 주인으로서의 덕목이다······ 그렇게 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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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은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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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다. 당장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군. 자세한 건 답해줄 수 없으니 이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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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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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카론의 말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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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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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귓가에 멀린의 숨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놀란 듯한 숨소리. 숨을 내뱉은 멀린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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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의외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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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비원이 뭔지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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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수가 없지. 아서와 연관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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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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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와는 달리, 장난기도 웃음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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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검성의 해방. 그게 검의 교단의 비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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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검성이라면, 아서왕이 활동했던 시대에 있던 영웅 아니에요? 이미 죽거나 성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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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죽었어. 정확하겐 못 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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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잡한 목소리. 멀린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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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은 캄란의 망령이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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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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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으로 돌아가는 마차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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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사제 볼크만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제 친우를 흘겨봤다. 검성, 카론. 그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채 제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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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눈에도 찬 모양이군? 그 청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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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내 눈에만 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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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크만의 질문에 검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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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드 마스터를 데려다 놓아도,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일 걸세. 그만큼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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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말하는 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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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단순히 재능에만 국한되지 않은 것이라는 걸 볼크만은 잘 알고 있었다. 숱한 천재들조차 눈에 차지 않는다며 가르치기를 거부한 카론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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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을 보고도 두려워하질 않더군. 주춤하는 모습도 없어. 마지막에 그 녀석이 보내던 눈빛을 자네도 봤나?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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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카론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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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닿아야 할 곳이 아닌, 넘어야 할 곳으로 날 보고 있었네. 상상이 가는가? 아직 소드 엑스퍼트에 불과한 무인이 소드 마스터의 검을 보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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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눈빛이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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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을 보면 그 속내가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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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방지게도 그 청년은 자신이 보인 검 앞에서 도전 의욕을 내보였다. 동경과 경외가 아닌 추월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이 어찌나 어처구니없는 놈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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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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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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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카론이 바라던 인간상이다. 자신을 동경하고 자신을 목표로 삼는 재미없는 놈들 따위, 카론은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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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넘어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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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높은 곳에 오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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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찾아 헤매는 것은 바로 그런 존재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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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놈에게 검을 제외한, 그 어느 것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일세. 자네도 협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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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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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그 삶에 간섭하지 않을 거란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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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다만 검을 가르쳐 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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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의 삶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 뒷배를 봐줄 생각도 없으며, 청년에게 닥쳐오는 위기에서 꺼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야 의미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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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의 힘으로 몇번이고 위기를 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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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넘어서고. 궁지를 돌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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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사투 끝에 살아남으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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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 개입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마음에 들었다 해서 뒤를 봐줄 생각은 없단 뜻이었다. 자신이 가르쳐주는 건 어디까지나 검술뿐, 그것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청년이 자신의 힘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부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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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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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그뿐일 그릇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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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는 누구나 비틀려 있다. 검성, 카론은 세 명의 소드 마스터 중 그중에서 가장 정상인의 축에 속하다곤 하나 그 역시 인간적으로 어느 부분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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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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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갈고 닦으며 카론은 제 목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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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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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들어보면 거창하나, 그 비원의 내용을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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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검성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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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교단의 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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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순화시켜 말하자면 ‘최초의 검성에게 안식을 준다’ 정도가 되겠지만 그게 거기서 거기 아닌가. 카론은 교단의 목적을 곱씹으며 나락의 땅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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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별을 가졌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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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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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멀고도 먼 나락의 땅 캄란의 모습은 눈을 감았음에도 선명히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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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의 땅, 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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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과거 아서에 의해 격리된 그 공간에는 저주받은 것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언젠가 봉인이 깨어질 날만을 기다리며 그들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별을 삼키는 용, 떨어진 것들의 마녀, 원탁의 배신자, 추락한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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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락의 검귀(劍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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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란의 결계가 흔들릴 때마다, 경계 너머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검사가 하나 있다. 그는 검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도륙 낸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을 든 귀신 같다 하여, 그는 검귀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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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누구도 나락의 검귀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저 저주받은 땅을 떠돌다 미쳐버린 검사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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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재의 정체를 아는 것은 극히 소수의 성좌와 검의 교단의 역대 검성들뿐이다. 카론은 캄란의 경계선에서 마주했던 검귀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질하던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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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의 검귀는 최초의 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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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마모되어 버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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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격리된 캄란에 홀로 남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저주받은 것들을 베어 넘기고 있는 검성. 이성을 잃은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과거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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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고결했던 그 존재를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교단의 비원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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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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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오늘 마주한 그 청년이 자신의 비원을 이뤄줄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리라. 언젠가 그 청년에게도 이 사실을 알릴 날이 오기를 카론은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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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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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의 검귀가 되어버린 초대 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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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가 베야 할 적이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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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나진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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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만이 벨 수 있는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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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는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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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은 엑스칼리버가 있어야만 벨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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