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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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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캄브리아에서도 이름난 상인이다. 별난 구석도 있으며, 흥미 본위로 행동하는 일이 잦으나··· 그녀의 모든 관심사는 금화로 귀결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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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금화를 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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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흥미도, 취미도, 관심사도, 그 모든 건 결국 금화를 벌어들이기 위함이다. 오직 금화만을 위해 태어난 듯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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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녀를 가리켜 거상의 자질을 가졌다고 이야기하며, 또 누군가는 돈에 눈이 먼 장사치라 손가락질 한다. 수많은 이들이 디에타에 대해 저마다의 평가를 내리지만··· 그 평가에 공통점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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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아르베니아는 타고난 상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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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으로서 그녀가 지닌 재능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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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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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자신의 삶으로서 그 사실을 증명한 까닭이다. 5년. 그것이 디에타가 도시를 대표하는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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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에서 버려진 소녀가,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일궈낸 업적. 성공 신화라 부를만한 그 업적은 무엇으로도 무너트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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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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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업적을 세우기 위해, 그녀가 걸어왔던 길은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할 순 없다. 금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금화를 삼키는 뱀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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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만을 위해 살아가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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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탈을 쓴, 수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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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아르베니아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최소한 이 상인들의 거리에서 모르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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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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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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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나진은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과 달리 자신에게 말 거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야, 당장 제 옆에 후원자가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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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매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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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시선이 몹시도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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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견제의 시선이 아닌, 경멸 어린 시선이 종종 느껴졌다. 그건 나진에겐 익숙한 시선이었다. 지하도시에 찾아온 ‘윗동네’ 사람들이 나진에게 보내곤 하는 시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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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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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없이 디에타를 바라봤다. 오늘 하루는 디에타의 호위로서 동행하는 것이니, 평소와 달리 디에타는 나진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발랄하고 경쾌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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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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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디에타는 가벼운 걸음으로 상인들의 거리를 걸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그녀는 나진에게 미소 짓곤 했다. 마치, 자신에게 날아와 꽂히는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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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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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런 디에타의 웃음이 낯이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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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웃음을 어디서 봤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나진이 말없이 디에타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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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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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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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들려온 소리에 디에타도 나진도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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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에게만 허락된 의복을 차려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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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문양을 새긴 기사를 대동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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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귀족임을 나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도시를 오가며 종종 저런 인물들을 마주치곤 했으니까. 캄브리아가 비교적 신분의 구분이 느슨하고, 귀족들의 권위가 잘 먹히지 않는 도시긴 하나··· 최소한의 구분은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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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을 만났다고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지만, 그들과 엮이거나, 그들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을 나진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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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는 멀리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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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모험가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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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식을 차려야 하는 귀족들과 엮이는 건 모험가로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높은 곳을 향하는 야망가들은 귀족과 엮여 굵직한 의뢰들을 수행하긴 하나, 일이 수틀려 모가지 날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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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고귀한 그들에게 모험가란, 한번 쓰고 버리기 좋은 버림 말에 불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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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보통 귀족이 나타나면, 그 귀족이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기를 모험가들은 기다리는 편이다. 하지만 디에타는 달랐다. 그녀 역시 버려졌다고 한들 귀족가의 자제다. 그녀는 귀족이 자신을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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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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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귀족과 디에타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 걸어오던 귀족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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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가 좋긴 좋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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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보는듯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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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를 흘겨보며 귀족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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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에서 버려진 창녀가 귀족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다니. 수도에선 상상도 못할일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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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를 향한 명백한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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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 귀족 사이에 오갔다곤 상상할 수 없는 폭언이나, 정작 고개를 기울여 귀족과 눈을 마주치는 디에타의 얼굴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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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아시나요? 프라운켈 백작의 아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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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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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 들어온 귀족이 누구인지 어느 가문 출신인지 디에타는 전부 꿰고 있다. 눈앞의 젊은 귀족은 프라운켈 백작의 아들, 다노르 프라운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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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서열로 따지면 아르베니아 공작가에 명함도 못 내밀 만한 가문의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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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디에타는 귀족의 명함을 달고 있을 뿐 가문에서 버려진 ‘외부인’이었기에 다노르는 도발을 던진 것이다. 그 값싼 도발에 디에타는 미소 지을 뿐이었다. 질리도록 들어온 도발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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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말이 틀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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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노르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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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외모를 앞세워 아르베니아 공작님께 인정받으려 했지만··· 결국에 버려진 네년이 창녀나 다름없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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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노르는 조소했고, 그 곁에 서있던 호위 기사 역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향한 모욕의 앞에서도 디에타는 다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노르가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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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원하는 반응은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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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도, 자존심도 없는 년에게 뭘 기대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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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노르가 지나치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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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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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옆에 서 있던 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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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디에타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디에타가 고개를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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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디에타의 얼굴을 보고 있던 나진은,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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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봤나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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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여전히 디에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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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다노르와, 그 호위 기사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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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를 매만지던 나진이 미소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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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흉내 내듯이, 혹은 기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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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을 바라본 디에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생긴 건 전혀 다르지만, 지금 나진이 짓고 있는 웃음은 디에타의 것과 닮아있었으므로. 이는 본래 지하도시에서 나진이 언제나 짓고 있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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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다고 느낄 만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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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서, 흘러내린 핏물에서, 유리잔에서 언제나 보던 표정이었으니까. 마모되어 체념한 이가 가진 특유의 비굴한 웃음. 이 도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단주인 디에타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기에···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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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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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크게 뜬 디에타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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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한 사내로군. 아주 끼리끼리 놀아. 검을 차고 다닌다고 다 기사가 아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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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던 다노르가 나진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주인의 웃음에 동조하듯 기사 역시 웃음을 흘렸고. 그러나 정작 나진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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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물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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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디에타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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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쳐도 감당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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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을 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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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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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디에타만을 바라보며 나진이 웃었다. 나진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디에타로선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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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귀족만 안 건드리면 괜찮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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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디에타가 중얼거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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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만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다. 그 말을 나진은 이렇게 해석했다. 귀족 옆에 서있는 기사는 어떻게 하던 상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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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란 작자가 입꼬리가 그리 가벼워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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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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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기던 다노르와 그 호위 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채 나진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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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뭐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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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노르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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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나진은 답하지 않았다. 다노르가 아닌 호위 기사를 바라보며 나진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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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존중해라. 비웃음을 멀리해라. 모욕을 멀리하고 겸손을 가까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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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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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지켜야 할 덕목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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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무표정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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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어긴 것만 해도 네 가지가 넘는데, 혹시 기사는 맞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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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물음에 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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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기사의 덕목을 운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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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덕목 읊는데 대단한 것까지 필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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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이다. 기사가 아닌 자가, 기사의 앞에서 기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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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잘 휘둘러서 기사가 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기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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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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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게슴츠레 뜬 나진이 기사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곳에 매여있는 검에는 손때가 타 있지 않았다. 사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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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그리고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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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그가 모시는 주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진은 상황이 넘어왔음을 깨닫곤 기사를 조금 더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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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가 왜 이리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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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칼자루를 두들기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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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자신 있으면 덤벼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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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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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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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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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한복판에서 검을 뽑아 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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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기사에게 칼끝을 까딱이는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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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는 디에타와, 기사의 주인인 다노르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다노르는 불쾌함에 표정을 구기고 있었고, 디에타는 갑작스레 저리 나선 나진에게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에 입꼬리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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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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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흘려넘겨도 될만한 모욕이었다. 언제나 들어왔던 말이고, 언제나처럼 넘기면 그만일 모욕. 그런 모욕에 정면으로 중지를 들어 올리는 나진의 모습은 디에타에게 있어 신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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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래선 얻을 이득이 딱히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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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무엇 때문에 이런 기행을 벌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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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디에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제 주인이 모욕받았기에 나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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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애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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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 양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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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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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디에타의 의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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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쪽보단 검을 잘 다루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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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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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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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부릅뜬 기사가 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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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는진 몰라도, 망신살 뻗치는 건 금방이겠군. 주인이 그 모양이니 아랫것들의 관리가 될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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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확신하는 다노르는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그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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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원래 저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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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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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딱딱하고 감정이 절제된 인물로 여겼던 디에타다. 하지만 눈앞의 나진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가볍고, 상대를 도발하고, 조금 더 생생한 웃음을 짓는 청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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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언가 계기가 되어 본래의 성격을 풀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의 앞에서 지어 보였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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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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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말없이 그 웃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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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도록 자신과 닮아있던 웃음. 동질감마저 드는 웃음. 단순히 흉내 냈다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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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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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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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이름도 거짓인 것 같은 청년. 하지만 그 순간 보였던 웃음만큼은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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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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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기사의 검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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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나진과 검을 맞부딪치는 기사는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지만, 검기를 뽑아내진 않았다. 최소한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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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검술만으로 나진을 무릎 꿇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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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방진 애송이에게 차이를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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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으로 기사는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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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사가 휘두르는 검을 나진은 너무나도 쉽게 받아냈다. 검을 받아내며 나진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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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기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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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이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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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검이 가볍지도, 경박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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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알고, 나진이 보았던 기사들은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건 나진이 꿈꾸는 기사가 아니었다. 기사란 명예와 긍지를 가진 고고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눈앞의 기사에겐 명예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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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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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는 거라곤 고집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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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받아내는 데 그치던 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기사는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나진은 계속해서 걸음을 내디뎠고, 기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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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의 주인, 다노르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기사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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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카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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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술은 이미 궤도에 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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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쉽게 기사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읽어냈다. 순수한 검술로 나진을 무릎 꿇리는 것은, 검술에 매진한 검의 교단의 사제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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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련을 게을리한 기사에게 꺾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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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은 가볍지도, 허술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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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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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기사의 검이 반짝였다. 깃드는 광채. 결국 제 고집마저 꺾고 검기를 뽑아내려는 기사를 보며 나진은 혀를 찼다. 광채가 검기의 형태를 이루기 직전 나진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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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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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기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한 번의 호흡. 검 위로 피어오르려던 검기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관중들도, 기사 본인조차도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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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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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만이 깨달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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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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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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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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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나진의 연공법. 그것을 활용해 나진은 기사의 체내에서 검으로 뻗어 나오려는 마나를 가로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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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기가 나오지 않음에 당황하는 기사의 손목을 나진은 비틀었다. 그리곤 쥐고 있는 검의 폼멜로 기사의 손등을 콱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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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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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검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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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놓친 기사와 검을 쥐고 있는 나진. 승패를 누군가 판정할 것도 없이 압도적인 결과였다. 결투를 지켜보던 관중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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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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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붉게 물든 다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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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부릅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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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가운데, 나진은 자신을 지켜보던 디에타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가만히 디에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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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움과 통쾌함, 그리고 어이없음이 뒤섞인 표정. 가면이 벗겨진 채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디에타를 바라본 나진이 짧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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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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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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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얼굴보단 낫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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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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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의 결투에서 승리를 따냈을 때도 여전히 무표정했던 나진이나, 바뀐 디에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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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이 사달을 벌인 이유야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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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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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서의 자신과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디에타가 마음에 안 들었다. 바뀐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나진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앉아있는 디에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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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에게 배운 약식의 에스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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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진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디에타였지만, 지금은 나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디에타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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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밌는 사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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