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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일부러 갈아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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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이 된 우편부의 복장을 그대로 입은 채 나는 거리를 걸었다. 가게의 문을 열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상인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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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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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 사이를 말없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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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움찔, 어깨를 떨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나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야 내가 이반의 사냥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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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보호를 받는 이 거리에서, 이반은 울타리인 동시에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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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한 규칙을 지키는 이들을 이반은 보호하고 자비를 베푼다.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조금의 자비도 배풀지 않고 철저하게 응징했다. 그 사실을 이반은 자신의 자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종종 경고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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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선을 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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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트릭시의 주점을 개판으로 만든 것도, 내가 옷을 갈아입지 않고 피범벅이 된 채로 거리를 걷는 것도 그 경고의 연장선상이었다. 이반은 내게 그렇게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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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느슨해졌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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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 선을 넘으려는 기미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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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시 정리하는 김에 적당히 겁주고 와라,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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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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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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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상인 하나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평소 트릭시와 어울려 지내며 이반이 그어둔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던 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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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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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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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시선은 피가 진득하게 눌어붙은 내 옷자락을, 뒤이어 내 허리춤에 걸려있는 칼자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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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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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려 덜덜 떠는 그의 곁을 나는 말없이 지나쳤다. 아직은 저 남자를 처리하라는 이반의 명령은 없었으니까. 부디 이게 제대로 된 경고가 됐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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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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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좀 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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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말아라. 당신들이 그럴수록 내 일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칼질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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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하고, 끈적하고,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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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죄책감과는 다르다. 그냥, 기분이 좆같았다. 특히나 죽은 사람의 유족과 마주칠 때마다 껄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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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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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숨을 내뱉으며 내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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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목적지에 도착한 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이 지하도시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을 끌어모아 만든 번화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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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요란스러운 광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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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을 제련해 만들어 낸 사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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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의 물건과 음식, 그리고 옷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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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윗동네에 이곳에서 캔 광석을 올려보내고, 물건을 지급받는 일종의 창구이자··· 윗동네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가 존재 하는 지하도시 아트만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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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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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구획의 지배자, 외눈의 이반. 나의 고용주가 거하는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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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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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의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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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하도시 아트만에 떨어지기 전에 기사였고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던 검사였다. 결국 영락한 나머지 이 도시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검기를 좍좍 뽑아내는 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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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쯤 되는 강자면 어디에 떨어지던 두각을 드러내는 법이다. 이반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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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식간에 지하도시를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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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본래 번화가의 주인이었던 땅거미 호르세를 도시의 외곽으로 밀어내고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짓밟으며 그는 세력을 키워나갔다. 길고 긴 내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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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막까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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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내전은 끝이 났으며, 그 결과는 이반의 승리라는 사실만큼은 알았다.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반은 이 도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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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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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내 스승이자 고용주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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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버린 날 거두어 주고, 내게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준 게 바로 이반이었으니까. 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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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안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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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내가 이반의 방문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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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안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이반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오른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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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 벌어진 어깨. 팔뚝에 가득한 흉터.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문드문 보여오는 새하얀 머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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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무실의 주인, 이반이었다. 이반은 팔짱을 낀채 하나 남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사람 하나는 찢어 죽이고도 남을 것 같은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내 얼굴로 향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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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나진 너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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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표정이 확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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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반이 쾅, 하고 테이블을 거칠게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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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 땅거미 새끼가 살수라도 보낸 줄 알았네. 무슨 피를 그렇게 뒤집어쓰고 있어? 밑층에 있던 놈들 모가지 다 따고 올라온 줄 알고 긴장했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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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긴장한 눈치가 아니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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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임마, 여기 안 보여? 땀 흘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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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제 목덜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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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소리쳐 봐야 자잘한 흉터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편부의 코트와 모자를 벗어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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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겁 좀 주고 오라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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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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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가 오기엔 이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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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다,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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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연초에 불을 붙이며 턱짓했다. 일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보고해 보란 뜻이었다. 나는 집무실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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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예상대로, 트릭시는 호르세에게 줄을 댔어요. 호르세쪽 조직원들이 좀 보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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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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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회색 연기를 뱉어내며 이반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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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시는 선 위에서 놀긴 하지만, 선을 넘을 만큼의 용기가 있는 놈은 아냐. 그런 놈이 갑자기 보란 듯이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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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툭툭 테이블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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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구석이 있는 거지. 그래서 몇 명이나 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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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명이요. 호르세 패밀리로 보이는 놈들이 절반 정도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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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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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흥미로운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이반을 향해 나는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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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셋 중 열둘은 팔이든 다리든 하나씩 잘랐고, 사지 멀쩡히 남겨둔 카빈한테 뒤처리는 맡겼어요. 트릭시는 죽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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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하나 없이? 열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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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반은 소리 내 웃었다. 집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거친 웃음소리. 한참을 웃어 재낀 이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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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 트릭시 그놈 얼굴 참 볼만했겠는데. 하기야, 열셋쯤 불러 모았으면 애송이 하나는 담그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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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시가 똑같은 말을 하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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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또라이 같은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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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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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시 말고 너 말이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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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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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이반이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껐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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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길 일이 또 생기면 부르마. 그때까진 쉬고 있어. 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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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반이 제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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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광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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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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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윗동네에서 사람을 보내왔거든. 광장에 곧 나타날 성좌의 시련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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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의 시련. 성좌, 그러니까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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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울린 성좌라는 단어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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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의 시련이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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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는 본 적 없나? 13년마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일종의 행사 같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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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이면 내가 5살이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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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당연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반의 말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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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선별의 검이 누군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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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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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서왕. 그 성좌와 관련된 전승 중에 가장 유명한 거 있잖냐? 바위에서 검을 뽑았다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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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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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 바위에 꽂힌 전설의 검. 아서 일대기의 시작을 알렸던 검이자, 훗날 아서가 하늘에 새긴 별자리의 형태가 된 성검(星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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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선별의 검은 13년마다 온 대륙에 시련을 내리지. 바위에 꽂힌 검을 뽑으라는 단순명료한 시련. 사실 말이 시련이지, 그냥 행사야 행사. 그 검을 뽑은 사람은 수백 년 동안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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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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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승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각인시키는··· 뭐 그런 일인 거지. 사람이 좀 모인 도시란 도시에는 모두 검이 나타나다 보니 이 지하 도시에도 나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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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점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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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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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도시에 나타난다고 해도, 일단은 아서왕의 별빛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신성한 성유물이란 거지. 그런 성유물이 이런 쓰레기 동네에서 나타났는데 윗동네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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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에서 이곳을 어떻게 보는가. 이 도시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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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손도 못 대게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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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거지. 이 시기만 되면 별을 모시는 교단이 아주 발작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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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싹 다 신성모독으로 처형이라도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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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보통 처형까진 안 가고 흠씬 두들겨 패는 데 그치긴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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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질리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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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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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광장 근처로 다니지 마라. 윗동네에서 보낸 경비병들이 검을 하루 종일 지키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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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언제 나타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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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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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날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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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에는 조금 전과 같은 장난기는 없었다. 나보다 오랜 삶을 살아온 선배로서 이반은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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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윗동네 사는 높은 분들 심기 거스를 만한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새겨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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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의 안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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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에서 이 도시로 추방당했을 때 빼앗긴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이반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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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어진 선 안에서 살아라. 선을 넘었다간 인생이 고달파지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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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반 자신의 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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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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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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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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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집무실을 나서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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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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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 나를 불러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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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을 괸 채 이반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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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의 시련이 시작되는 건 오늘 자정이다. 전망 좋은 곳에 있으면 검이 ‘꽂히는’ 장면 정도는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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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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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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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구획, 타리아 주점의 창가 쪽 자리가 명당이지. 내 이름을 대라. 자리 하나쯤은 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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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내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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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선, 나는 달리듯이 건물 밖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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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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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인근에 위치한 타리아 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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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은 13년 만에 찾아오는 행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로 북적였다.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이건 이 도시에 떨어져 태양도, 별빛도 잊은 채 살아가던 이들에게 주어진 생에 몇 안 되는 기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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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볼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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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렸던 바깥세상의 풍경을 추억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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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회를 붙잡고자 지하 도시의 주민들은 평소의 곱절에 달하는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자리를 사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창가의 자리는 부르는 게 값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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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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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타리아 주점의 창가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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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 그곳에 자리를 잡은 나진은 목을 축일 음료와 함께, 낡아 해진 동화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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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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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둔 채 나진은 조용히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몇분 뿐. 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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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별빛,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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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의 무엇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은 매립지의 소년이, 유일하게 놓지 못한 동경. 아직 별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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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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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속으로 수를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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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1분이 흘렀다. 그렇게 십초 남짓의 시간이 남았을 때 나진은 길게 숨을 뱉어내고선, 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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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 대엥, 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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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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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진은 곧장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지하도시의 천장을 바라봤다. 어스름한 광석만이 위태롭게 박혀있던 지하도시의 천장이 지금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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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난 아주 작은 흠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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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돌이 마모되어 만들어진 빈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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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틈에서 백금색의 입자가 새어 나왔다. 처음 보는 색의 빛. 그것이 별빛이라는 사실을 나진은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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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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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지는 별빛이 천장에 박혀있는 광석들을 환히 비추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지하 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환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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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나진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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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의 인생을 통틀어 나진은 별빛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몇번이고 읽었던 동화 속의 문장이 나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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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진은 무심코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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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천장에서 새어 나온 별빛이 한데 뭉쳐지기 시작했다. 찬란한 별빛이 모여 만들어지는 건 한 자루의 검이다. 교단이 숭배하는 성검(聖劍)이자, 별빛으로 단조 된 성검(星劍) 엑스칼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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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별빛과 함께 엑스칼리버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백금색의 빛무리를 끌며 엑스칼리버는 지하도시의 상공에서 광장을 향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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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은 없지만, 별똥별이란 게 아마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나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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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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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의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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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분조차 되지 않는, 이 짧디짧은 풍경을 위해 거금을 태운 이들이 이 자리에는 가득했다. 자신들이 잊어버렸던, 잊고 살아가던 별빛을 목격한 이들은 신음했고 또한 과거를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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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낙하를 거쳐 성검은 광장의 중심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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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칼리버는 땅에 틀어박힐 적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장엄한 종소리와 같은 묵직한 소리가 지하도시를 휩쓸고 지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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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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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진은 광장의 중심에 박혀있는 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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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저 성검의 검면에는 분명 별자리가 새겨져 있으리라. 과거 한 자루의 검을 쥔 채 대륙을 질주했던 아서의 별자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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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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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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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동자가 빛났다. 성검이 흩뿌리는 별빛 때문인지, 아니면 소년의 눈동자 스스로가 내는 빛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창문에 얼굴을 밀착하다시피 가져다 댔던 나진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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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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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위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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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위화감이라기엔 뭔가 다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술렁였다. 술렁임은 이윽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서 나진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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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을 가득 메운 한 줄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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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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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런 문장이 떠올랐는지 나진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헛된 망상을 나진은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미쳤나, 저 검에 손을 대면 손모가지는 물론이고 목까지 잘려 효수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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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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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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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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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걸어 나온 병사들이 땅에 꽂힌 검 주변을 에워쌌다. 그들의 갑옷에 가려져 별빛을 머금은 검은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주점의 여기저기서 아쉬움 가득한 탄식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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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보게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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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역시 병사들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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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윗동네 사람들은 뭐 저리 유난을 떨어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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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으로 빛나던 나진의 눈동자는 어느새 본래의 색과 본래의 온도를 되찾았다. 차게 가라앉은 체념한 이의 눈동자. 나진은 말 없이 주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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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으로 마주했던 별빛은 그렇게 순식간에 나진의 곁을 떠났다. 보다 정확하겐 이 지하도시와 ‘윗동네’를 가르는 구분 선에 의해 가로막혔다. 검을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이 이 도시의 천장과 다를 바 없다고 나진은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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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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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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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꿈을 꿔봐야 인생이 피곤할 뿐이다. 오펜과 이반, 자신의 두 스승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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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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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단어들이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하나의 문장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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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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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쳐지지도, 정리되지도 않는 한 줄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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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그 문장을 나진은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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