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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주문, 명멸(明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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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을 휘감은 여덟 개의 고리가 거세게 회전했다. 고리가 마찰할 때마다 튀어 오른 불길은 폭죽이 되어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마녀가 손짓한 순간부터 하늘은 더 이상 푸르지도 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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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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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붉음만이 하늘에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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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갛게 물들어선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하늘,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멀린의 말대로다. 저건 지금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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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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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막아서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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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피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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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짧은 미래를 내다볼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렇다. 엑스칼리버를 뽑는다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으리라. 하늘과 땅을 불사지를 불길 앞에서 나진은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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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초월자. 이것이, 마녀(魔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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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하늘 아래 홀로 선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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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자신으로선 결코 닿지 못할 영역에 서 있는 초월자를 바라보며 나진은 웃었다. 실성해서 내뱉는 웃음도, 광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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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였다. 비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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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년의 세월을 깎아 당신이 도달한 영역이 그곳인가? 천년의 세월이 당신을 그 자리에 앉혀두었는가. 그래, 인정한다. 압도적이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닿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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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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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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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지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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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천년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당신의 천년을 15분간 붙잡아 두는 데는, 고작 18년의 세월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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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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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웃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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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군가 땅을 박차는 발걸음 소리.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진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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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마녀에게 패배했다. 나진의 칼끝은 마녀에게 닿지 않았으며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못했다. 처참한 패배였으나, 그 패배가 다만 무의미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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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질레트와 약속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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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동안 나진은 마녀의 이목을 끌었고, 그녀의 손짓을 받아냈으며, 기어코 시간을 벌어냈다. 그렇게 나진이 벌어낸 시간은 무가치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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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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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인물이 전장에 나타났으므로. 고요한 절삭음과 함께 나진과 마녀 사이에 한줄기의 선이 그어졌다. 일선(一線), 한줄기의 선을 따라 폭풍이 휘몰아치며 열기를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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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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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마녀의 사이, 전장의 한가운데에 누군가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은 가벼웠으나 그 존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내가 나타난 순간 기울었던 저울이 단숨에 균형을 이루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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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忘國)의 소드 마스터, 키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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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를 상대하는 것은 같은 초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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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루의 검으로 초월에 이른 초인이 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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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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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년 전, 떨어진 별에 의해 멸망한 나라가 있다. 멸망은 고요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런 나라가 존재했단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것이 멸망에 개입한 별의 권능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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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忘却)과 소각(消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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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권능을 지닌 별은 어느 국가를 멸망시키며 소망했다. 이곳이 존재했단 사실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본래대로라면 그 소망은 이루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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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증거도 흔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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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리 사라졌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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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별의 소망은 절반만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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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은 그런 국가가 존재했단 사실을 잊어버렸으나, 그 국가가 실존했단 증거는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상은 기록과 역사를 통해 그 국가의 존재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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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국가의 이름은 론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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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忘國), 론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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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은, 그 기록들이 다만 허구로서 취급되지 않은 것은 오직 한 사내의 존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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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소드 마스터, 키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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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디넬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론디넬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산증인. 검을 휘두름으로써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소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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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군,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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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개입한 키르호프가 입가를 틀어 올렸다. 나진은 제 앞에 나타난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직감했다. 이 사람이 질레트가 말한 ‘키르호프’란 인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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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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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의 마녀, 에르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표정을 구기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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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용건이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서 있는 건방진 애새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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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 끼어드는 멋 없는 짓을 하고 싶진 않지만······ 뭐, 전장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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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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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매가 한순간에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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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 언제나 네게 용건이 있다. 에르미나. 네가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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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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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하고 혀를 차며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중지와 엄지가 마찰하며 ‘딱’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붉은 하늘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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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明滅), 별빛을 멸하는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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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진은 하늘이 붉게 물들었던 것이 아니라,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늘을 뒤덮었던 불길이 땅으로 추락하는 광경은 신비로운 동시에 기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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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인사가 거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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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하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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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는 그저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자세를 다 잡으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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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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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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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벌어준 것에 대한 감사는 나중에 표하도록 하지. 도망쳐라. 너를 지키며 싸울 여유는 없을듯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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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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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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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움직이네요.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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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 몸을 움직였다. 육신은 옛적에 한계를 맞이했고, 온몸에 가득 박힌 화염살 탓에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조차 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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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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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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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의 의미를 나진은 얼마 안 가 이해할 수 있었다. 챠르륵, 소리를 내며 어디선가 날아든 사슬이 제 팔에 감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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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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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나진의 몸이 뒤로 휙 잡아당겨졌다. 사슬에 끌려 도착한 곳에는 마녀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슬부대와, 사슬 부대의 지휘관인 질레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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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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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움직이지 못하는 나진을 등에 업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이 전장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그렇게 질레트의 등에 업힌 채 나진은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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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초월자들의 전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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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자신이 닿아야 할 영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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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뒤덮은 불길을 향해 검(劍)을 휘두르는 검사의 모습을 나진은 제 시야에 담았다. 초월에 이른 검사가 휘두르는 검을 나진은 부릅뜬 눈동자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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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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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호프가 검을 휘둘렀고, 하늘까지 닿은 한줄기의 검격이 불길을 갈랐다. 반으로 갈라진 불길이 비어버린 곳을 메꾸고자 몰려들자, 그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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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두를 때마다 선이 그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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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선이 교차하며 이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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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가 일선(一線)을 그을 때마다 불길은 갈라지고 열기는 밀려났다. 검이 한 뼘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붉은 하늘은 한 뼘 뒤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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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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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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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뒤덮어 가려버린 불길을 단신으로 베어내는 검사가 저곳에 있었다.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는 초월자가, 언젠가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영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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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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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머지않을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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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주하게 될 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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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저 전장에 설 수 없기에 나진은 다만 제 두 눈에 저들의 전투를 새겨넣었다. 밀려드는 폭풍을, 지금의 열기를 잊지 않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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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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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안전한 곳까지 퇴각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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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을 비롯한 사슬부대는 아군의 병력에 합류해 막사에 도착했다. 그들은 기꺼이 나진을 위해 막사를 내주었으며 사제들을 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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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박힌 화염살의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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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을 비롯한 부상의 응급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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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가 끝나고 나진이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게 됐을 무렵 막사에 질레트가 찾아왔다. 질레트의 뒤에는 사슬 부대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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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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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감사였다. 그가 나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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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군은 무사히 퇴각했고, 전멸을 각오한 사슬 부대도 절반은 생존했지. 다 네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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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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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에는 그을음이 가득했고, 한쪽 팔은 잘려있었다. 나진이 그쪽을 바라보자 질레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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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한 짝이면 싸게 먹힌 거지. 죽을 각오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다. 고개를 백번 숙여도 모자란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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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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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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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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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는 나와 사슬 부대의 병사들을 살렸고, 크게는 퇴각하는 아군 수백수천을 살린 거다. 마녀의 손짓 한 번에 병사들이 수십, 수백씩 쓸려나가는데··· 넌 그걸 몇 번이고 받아냈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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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말도 안 되는 위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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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질레트가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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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거다. 전멸당할 뻔한 아군을 네가 살린 거다. 네가 버텨준 15분은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었다. 여기 서 있는 나와 사슬부대가,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 증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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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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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무언가 어색했으니까. 여태까지 여러 전투를 경험했으나, 사람을 살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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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람을 구하는 전투야 몇 번 있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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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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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분전이 사람을 살렸다. 자신이 그 자리에서 버텼기에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문장들이 가지는 무게감이 나진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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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럴 의도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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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신념을 관철했을 뿐. 도망치기 싫었을 뿐. 마음에 안들었을 뿐. 그런 이유로 나진은 전장에 뛰어들었다. 저들을 구해야겠단 생각이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었단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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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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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질레트가 전하는 감사 인사가 나진은 조금 거북했다. 순수하게 저들을 살리기 위해 검을 휘두른 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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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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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심정을 나진이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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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두고 감사를 받자니 조금 찔렸으니까. 그렇게 나진이 이야기하는 동안, 멀린은 나진의 옆에서 그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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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이지, 여러분을 살리겠단 생각에서 검을 휘두른 건 아닙니다. 조금 과분한 감사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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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질레트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다는 듯이. 별종을 다 보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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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말도 안 되는 모습만 봐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아직 어리긴 어리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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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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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가 뭐가 중요하지? 결과적으로 우린 네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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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가 큭큭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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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그는 팔을 잃었고, 피부 곳곳에 화상을 입었지만 그 웃음은 편안했다. 질레트 뿐만이 아니었다. 사슬 부대에 속한 병사들은 나진의 말에 그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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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과분하지 않다. 감사해야 마땅할 일이고, 넌 감사를 받아 마땅해. 그러니 어깨를 펴고 떳떳하게 말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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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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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수백의 목숨을 구했노라고. 네게는 그리 말할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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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담 속의 영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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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질주했던 아서처럼, 너는 오늘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질레트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나진은 어색하게 제 뒷목을 매만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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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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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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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오늘 수백의 사람을 구했다. 썩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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