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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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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주문, 명멸(明滅).

불길을 휘감은 여덟 개의 고리가 거세게 회전했다. 고리가 마찰할 때마다 튀어 오른 불길은 폭죽이 되어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마녀가 손짓한 순간부터 하늘은 더 이상 푸르지도 검지도 않았다.

단지 붉음.

지독한 붉음만이 하늘에 자리했다.

새빨갛게 물들어선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하늘,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멀린의 말대로다. 저건 지금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어떻게 막아서야 할지.

어떻게 피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짧은 미래를 내다볼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렇다. 엑스칼리버를 뽑는다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으리라. 하늘과 땅을 불사지를 불길 앞에서 나진은 무력했다.

‘이것이 초월자. 이것이, 마녀(魔女).

붉은 하늘 아래 홀로 선 마녀.

지금의 자신으로선 결코 닿지 못할 영역에 서 있는 초월자를 바라보며 나진은 웃었다. 실성해서 내뱉는 웃음도, 광소도 아니었다.

조소였다. 비웃음이었다.

일천년의 세월을 깎아 당신이 도달한 영역이 그곳인가? 천년의 세월이 당신을 그 자리에 앉혀두었는가. 그래, 인정한다. 압도적이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닿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별거 없네.”

그건 지금일 뿐이다.

당신의 천년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당신의 천년을 15분간 붙잡아 두는 데는, 고작 18년의 세월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래, 그거지.

멀린의 웃음소리.

그리고 누군가 땅을 박차는 발걸음 소리.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진은 미소 지었다.

나진은 마녀에게 패배했다. 나진의 칼끝은 마녀에게 닿지 않았으며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못했다. 처참한 패배였으나, 그 패배가 다만 무의미하진 않았다.

15분. 질레트와 약속했던 시간.

그 시간동안 나진은 마녀의 이목을 끌었고, 그녀의 손짓을 받아냈으며, 기어코 시간을 벌어냈다. 그렇게 나진이 벌어낸 시간은 무가치하지 않다.

서걱.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인물이 전장에 나타났으므로. 고요한 절삭음과 함께 나진과 마녀 사이에 한줄기의 선이 그어졌다. 일선(一線), 한줄기의 선을 따라 폭풍이 휘몰아치며 열기를 몰아냈다.

그리곤 탁.

나진과 마녀의 사이, 전장의 한가운데에 누군가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은 가벼웠으나 그 존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내가 나타난 순간 기울었던 저울이 단숨에 균형을 이루었으므로.

망국(忘國)의 소드 마스터, 키르호프.

초월자를 상대하는 것은 같은 초월자.

한 자루의 검으로 초월에 이른 초인이 전장에 도착했다.

300여년 전, 떨어진 별에 의해 멸망한 나라가 있다. 멸망은 고요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런 나라가 존재했단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것이 멸망에 개입한 별의 권능이었으니.

망각(忘却)과 소각(消却).

그런 권능을 지닌 별은 어느 국가를 멸망시키며 소망했다. 이곳이 존재했단 사실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본래대로라면 그 소망은 이루어져야 했다.

기억도 증거도 흔적도.

모조리 사라졌어야만 했다.

허나 별의 소망은 절반만이 이루어졌다.

세간은 그런 국가가 존재했단 사실을 잊어버렸으나, 그 국가가 실존했단 증거는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상은 기록과 역사를 통해 그 국가의 존재를 되새겼다.

잊혀진 국가의 이름은 론디넬.

망국(忘國), 론디넬.

론디넬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은, 그 기록들이 다만 허구로서 취급되지 않은 것은 오직 한 사내의 존재 때문이다.

망국의 소드 마스터, 키르호프.

론디넬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론디넬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산증인. 검을 휘두름으로써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소드 마스터.

“오랜만이군, 마녀.”

전장에 개입한 키르호프가 입가를 틀어 올렸다. 나진은 제 앞에 나타난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직감했다. 이 사람이 질레트가 말한 ‘키르호프’란 인물이라고.

“···키르호프.”

명멸의 마녀, 에르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표정을 구기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꺼져. 용건이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서 있는 건방진 애새끼니까.”

“싸움에 끼어드는 멋 없는 짓을 하고 싶진 않지만······ 뭐, 전장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키르호프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눈매가 한순간에 가늘어졌다.

“그리고 난 언제나 네게 용건이 있다. 에르미나. 네가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마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중지와 엄지가 마찰하며 ‘딱’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붉은 하늘이 추락했다.

명멸(明滅), 별빛을 멸하는 불길.

그제야 나진은 하늘이 붉게 물들었던 것이 아니라,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늘을 뒤덮었던 불길이 땅으로 추락하는 광경은 신비로운 동시에 기괴했다.

“환영 인사가 거칠군.”

추락하는 하늘 아래.

키르호프는 그저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자세를 다 잡으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소년.”

“···예?”

“시간을 벌어준 것에 대한 감사는 나중에 표하도록 하지. 도망쳐라. 너를 지키며 싸울 여유는 없을듯 하니.”

“거,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나진이 쓰게 웃었다.

“몸이 안 움직이네요. 슬프게도.”

한계를 넘어 몸을 움직였다. 육신은 옛적에 한계를 맞이했고, 온몸에 가득 박힌 화염살 탓에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조차 고행이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

키르호프가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나진은 얼마 안 가 이해할 수 있었다. 챠르륵, 소리를 내며 어디선가 날아든 사슬이 제 팔에 감겼으니까.

화악!

이윽고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나진의 몸이 뒤로 휙 잡아당겨졌다. 사슬에 끌려 도착한 곳에는 마녀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슬부대와, 사슬 부대의 지휘관인 질레트가 있었다.

“퇴각, 퇴각한다!”

질레트가 움직이지 못하는 나진을 등에 업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이 전장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그렇게 질레트의 등에 업힌 채 나진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초월자들의 전투가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닿아야 할 영역이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불길을 향해 검(劍)을 휘두르는 검사의 모습을 나진은 제 시야에 담았다. 초월에 이른 검사가 휘두르는 검을 나진은 부릅뜬 눈동자로 보았다.

서걱.

키르호프가 검을 휘둘렀고, 하늘까지 닿은 한줄기의 검격이 불길을 갈랐다. 반으로 갈라진 불길이 비어버린 곳을 메꾸고자 몰려들자, 그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선이 그어졌고.

선과 선이 교차하며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가 일선(一線)을 그을 때마다 불길은 갈라지고 열기는 밀려났다. 검이 한 뼘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붉은 하늘은 한 뼘 뒤로 밀려났다.

‘······아아.

나진은 신음했다.

하늘을 뒤덮어 가려버린 불길을 단신으로 베어내는 검사가 저곳에 있었다.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는 초월자가, 언젠가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영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분명, 머지않을 미래에.

다시 마주하게 될 전장.

지금은 저 전장에 설 수 없기에 나진은 다만 제 두 눈에 저들의 전투를 새겨넣었다. 밀려드는 폭풍을, 지금의 열기를 잊지 않고자.

저 멀리, 안전한 곳까지 퇴각한 뒤.

나진을 비롯한 사슬부대는 아군의 병력에 합류해 막사에 도착했다. 그들은 기꺼이 나진을 위해 막사를 내주었으며 사제들을 빌려주었다.

몸에 박힌 화염살의 제거.

화상을 비롯한 부상의 응급처치.

치료가 끝나고 나진이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게 됐을 무렵 막사에 질레트가 찾아왔다. 질레트의 뒤에는 사슬 부대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고맙다.”

질레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감사였다. 그가 나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군은 무사히 퇴각했고, 전멸을 각오한 사슬 부대도 절반은 생존했지. 다 네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이다.”

질레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에는 그을음이 가득했고, 한쪽 팔은 잘려있었다. 나진이 그쪽을 바라보자 질레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팔 한 짝이면 싸게 먹힌 거지. 죽을 각오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다. 고개를 백번 숙여도 모자란 일이야.”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인데······.”

질레트가 쓰게 웃었다.

“작게는 나와 사슬 부대의 병사들을 살렸고, 크게는 퇴각하는 아군 수백수천을 살린 거다. 마녀의 손짓 한 번에 병사들이 수십, 수백씩 쓸려나가는데··· 넌 그걸 몇 번이고 받아냈잖냐?”

이거 말도 안 되는 위업이다.

그리 말하며 질레트가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마어마한 거다. 전멸당할 뻔한 아군을 네가 살린 거다. 네가 버텨준 15분은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었다. 여기 서 있는 나와 사슬부대가,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 증거지.”

질레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했고.

나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무언가 어색했으니까. 여태까지 여러 전투를 경험했으나, 사람을 살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사람을 구하는 전투야 몇 번 있었긴 한데······.

그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자신의 분전이 사람을 살렸다. 자신이 그 자리에서 버텼기에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문장들이 가지는 무게감이 나진은 낯설었다.

그야 그럴 의도가 없었으니까.

제 신념을 관철했을 뿐. 도망치기 싫었을 뿐. 마음에 안들었을 뿐. 그런 이유로 나진은 전장에 뛰어들었다. 저들을 구해야겠단 생각이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었단 뜻이다.

‘뭔가 조금······.

그래서일까. 질레트가 전하는 감사 인사가 나진은 조금 거북했다. 순수하게 저들을 살리기 위해 검을 휘두른 건 아니었으니까.

“그게, 사실은······.”

그런 심정을 나진이 입에 담았다.

덮어두고 감사를 받자니 조금 찔렸으니까. 그렇게 나진이 이야기하는 동안, 멀린은 나진의 옆에서 그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이지, 여러분을 살리겠단 생각에서 검을 휘두른 건 아닙니다. 조금 과분한 감사라고 생각해요.”

나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질레트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다는 듯이. 별종을 다 보겠다는 듯이.

“거, 말도 안 되는 모습만 봐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아직 어리긴 어리구만.”

“예? 그게 무슨······.”

“의도가 뭐가 중요하지? 결과적으로 우린 네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한 거야.”

질레트가 큭큭대며 말했다.

전투에서 그는 팔을 잃었고, 피부 곳곳에 화상을 입었지만 그 웃음은 편안했다. 질레트 뿐만이 아니었다. 사슬 부대에 속한 병사들은 나진의 말에 그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전혀 과분하지 않다. 감사해야 마땅할 일이고, 넌 감사를 받아 마땅해. 그러니 어깨를 펴고 떳떳하게 말해도 좋다.”

무엇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수백의 목숨을 구했노라고. 네게는 그리 말할 자격이 있으니까.”

영웅담 속의 영웅처럼.

대륙을 질주했던 아서처럼, 너는 오늘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질레트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나진은 어색하게 제 뒷목을 매만지다가······.

“그렇습니까.”

이내 웃음을 흘렸다.

너는, 오늘 수백의 사람을 구했다. 썩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