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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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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이라고 하면 제주도의 유명한 여자 상인 김만덕이 떠오를 거다.
그러나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아저씨다.
내가 그런 것으로 실망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저 이름을 단 상인이 남자라고 하니 좀 어색하기는 하다. 내가 아는 김만덕은 여자밖에 없는데 말이다.
"새로 부임하신 사또께서 밝은 정치를 하시니, 저 같은 일개 상인에게도 전하의 성은이 미치는 것 같습니다."
"본관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해 현감으로 발령받은 사또에 불과하네. 경험도 연륜도 얕은 나에게 그런 말은 좀 부담스럽군."
"백성들은 물론이고, 저희 상인들에게마저 자유로운 장사를 허락해 주시고 시장까지 세워주신다니. 그런 현감 나리께서 우리 고을에 오실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에서는 높은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첫 문장을 아부로 시작하는 게 좋다.
재상들,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도 첫 문장은 늘 이거다.
'돈수재배(두 번 깍듯하게 절을 올리고)하고 전하의 성은에 감사드리며 붓을 듭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지금의 왕이 얼마나 좋은지,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라도 꽤 길게 쓴다.
따라서 저렇게 나를 띄워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아부를 했다 이렇게 치부할 수는 없다.
조선에서는 당연한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남자가 꽤 마음에 드는 게... 조선에서 양반에게 뭘 부탁할 때는 반드시 귀한 선물을 들고 와야 하는데.
그는 나에게 선물을 내미는 대신 순수하게 간청을 하려 한다는 점이다. 누가 보면 건방지다며 당장 뚝배기를 깨버릴 행동이다.
우리로 치면 장인어른에게 딸을 달라고 집으로 찾아가면서 빈손으로 가는 것 그보다도 무례한 행동이다.
분명 자기가 가져온 논리와 근거만으로 나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저리 당당한 거겠지. 아니면 미친 놈이거나.
"본관 같이 미숙한 이가 사또로서 수만이 넘는 백성을 다스리려면 그저 열심히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삶이 나아진다면, 그것은 순전히 전하의 덕일세."
한국에서는 어떤 게임 선수를 기습해서 숭배한다. 뜬금없이 그분의 사진을 보게 되면 숭배해야 하고, 게임의 신이라며 만세를 불러야만 할 때가 있다.
조선에서는 임금님이 바로 그런 상대다. 양반이라면 누구나 다른 말을 하다가도 뜬금없이 임금님 기습 숭배를 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충군애국하는 마음이 모자란 반동분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저렇게 말한 거다.
사실 공납의 부담을 줄이고 백성들을 편하게 한 건 순전히 내가 잘나서 가능한 거였다.
"본관은 지금 처리해야만 하는 송사 관련 문서가 여럿이네. 그러니 용건부터 빨리 말해주게나."
"사또께서는 지금 상인은 물론이고, 백성도 장사할 수 있는 큰 시장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장세(자릿값)도 아주 적게 거두고자 하시지요. 그러니 사또께서 만드신 이 시장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진해현은 물론이고, 옆에 있는 동래현과 주변 고을 상인들이 다 모이는 거대한 시장이 될 겁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한양을 제외한 곳에서 열리는 제대로 된 시장은 모두 불법이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무본억말이라고 해서 백성은 농사라는 본분에만 충실해야 하고, 상업은 필요악이니까 최소한으로만 허용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500년 가까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에서 아주 작게 여는 시장 말고, 고을 사람들 다 올 수 있도록 크게 여는 시장이 있다?
곧장 관아에서 포졸들이 달려와서 깽판 쳐서 뒤엎은 다음에, 상품으로 팔리던 물건은 자기들 지갑으로 위치 이동 시켜버린다.
그런데 관아에서 직접 허용해 주는 장터가 있다고? 주변에 장사하고 싶은 사람들은 싹 다 몰려올 것이다.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게 해주신 사또께는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만... 문제는 이걸 곱지 않게 보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유교 꼰대들은 장사하는 사람을 이렇게 본다. 일도 안 하고, 그저 좌판 깔고 가만히 앉아서 성실하게 일하는 농민들 등쳐 먹는 놈들.
엄밀히 말해서 이 시대 상인들은 개념이라는 걸 상실한 놈들이 맞기는 한데...
그걸 다 따지고 보더라도, 장사 자체를 못 하게 탄압한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고? 이러니 사찰 놈들이 저 난리를 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내 위로 있는 조정의 높으신 분들과 고을 시골 구석에 처박힌 선비들, 훗날 사림이라고 불리게 될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못해 출세하기 힘들어진 시골 선비들은 진심으로 장사 자체를 놀고 먹으려 환장한 놈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김만덕이 걱정하는 건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장터를 철폐하라고 온갖 깽판을 치고, 상소를 올려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을 우려하는 거겠지.
"지금 진해현에 흉년이 든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이 서로 나물이니 땔감이니 짚신이니 가져다 팔아서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전하께서는 기꺼이 시장을 허락하실 것일세. 그리고 본관이 틀렸다고 상소를 올리는 이가 있다면, 나는 전하께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 직언할 것이네. 어차피 죽기 외에 더하겠는가?"
시장을 제멋대로 열었다고 과거에 장원 급제한 수령을 죽이는 일은 없다. 대신 파직(징계해고) 먹이고 1~2년 뒤에 복귀시키는 방법을 쓰겠지.
다른 이들은 복귀하라 하면 그저 좋아서 버선발로 달려가겠지만...
나는 온갖 핑계를 대고서 관직으로 절대 안 돌아갈 거다. 백성을 위한 일을 내가 하다가 파직 먹었으면 내가 할 일은 다한 거 아니겠어?
그리고 예쁜 아내랑 결혼하는 거다. 집안 재력을 이용해 첩을 들이는 것도 좋겠지.
수령까지 해봤으니, 고을에서 나는 존경받는 웃어른으로 평생 살아갈 텐데. 이게 바로 진정한 슬로우라이프 힐링 아니겠어?
김만덕은 내 말을 듣고 나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역시 사또께서는 왕좌지재의 그릇을 갖추신 명사또이십니다."
그러더니 내가 겸양을 떨면서 그건 아니라고 말할 틈도 안 주고 그는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제가 장이 열리면 팔게 될 물건의 목록과 그 양을 적어놓은 문서입니다. 장터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 시장에 제가 내놓은 물건의 목록을 정리한 장부를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팔린 물건 값의 1할(10%)을 세금으로 관아에 바치겠습니다."
김만덕 정도면 엄청난 부자다. 우리나라 대기업처럼 조 단위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아무리 낮게 잡아도 개인 자산 수십 억대의 부자는 되는 사람이며.
그가 보유한 상회의 재산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장터에 내놓을 물건도 많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팔린 물건의 10%를 관아에 세금으로 바친다? 관청 재정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다.
문제는 이놈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느냐 하는 건데...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소인과 같은 장사치들이 멸시받고 천시받는 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장사를 하여도 약간의 자릿값 정도만 낼 뿐이지. 남는 이윤 중 그 어떤 것도 세금으로 내지 않으니 말입니다. 농민처럼 나라를 위해 어떠한 부담도 지지 않으니 이는 마치 버러지와도 같습니다."
대영제국이라는 혐성이 가득한 나라에서 '소득세', '소비세'와 같은 세금을 도입하기 전까지 상인들은 자기 소득에 비해 세금을 한도 끝도 없이 적게 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류 조작을 조금만 해도 매출을 줄여버리는 것은 아주 쉬웠으니까.
또한 내수 상업 규모 하나는 서양 열강 국가들보다 더 컸다는 에도 막부 시대 상인들도 실제로 납부하는 세금은 자기들 버는 거에 비해서 코딱지만 했고.
다이묘들은 그들에게 '무이자 무상환' 대출 압박을 하여 세금처럼 돈을 뜯었다고 한다.
조선의 상인 관리 기술은 에도 막부 미만이므로, 나는 상인들이 장사해서 번 돈으로 정당한 세금을 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벌어 먹고살면 마땅히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는데, 그걸 내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장사한다고 하면 누가 저희 상인을 좋게 보겠습니까?"
...... 뭐지, 이 인간. 충신인가? 마침 임금도 세종대왕님이니, 언젠가 이 양반도 장영실처럼 될 수가 있겠는데.
장영실은 망치질을 하고 저 양반은 그 옆에서 주판을 두드리고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 장사를 크게 하기 위해 상인들도 나라에 도움이 된다는 걸 세금을 냄으로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에 동헌(사또가 일하는 관청)에 올 때는 세금을 낼 테니, 다른 사또께서 오셔도 이 진해군의 장터만은 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도움을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또께서 이리 큰 뜻을 품으셨으니, 소인도 서주의 미축이 소열제(유비)를 도운 것처럼... 사또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자 합니다."
...... 나의 말은 ‘이거 안 되면 난 낙향할 거야. 낙향하면 난 더 좋아. 이런 말을 한 것이었는데. 이 사람이 너무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라서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내가 뜻을 편다고 자네가 더 부유해지지는 않을 터."
"소인은 사또께서 장차 나라의 큰 기둥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소인도 사또를 따라 큰 상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만덕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악한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탐욕에 찌든 인간이 보여주는 자본주의 미소였다.
"...... 사또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진해현 상인들이 허튼수작 부리지 못하게 단속을 잘하겠습니다."
무려 자진해서 세금을 내고 사람답게 살겠다고 나서는 상인이라니.
당연히 믿어도 되지. 안 믿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거다.
"그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