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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에서 한때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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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거치는 중간 상인, 운송 업자의 숫자를 최소화해야 물건 가격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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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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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00원도 안 하는 배추가 중간 상인을 한 명 거치면 200원, 도매 상인을 거치고 나면 280원, 경매장을 거치면 380원, 야채 소매점을 가면 500원이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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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농사짓는 집에서 직접 야채 가게나 대형마트에 팔게 되면 300원 정도에 팔 수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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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사실을 믿고 항구 도시 같은 데 가서 회를 먹게 되면 신선도야 물론 뛰어나겠지만, 값은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 비싼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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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건 21세기 현대 사회의 이야기고 조선에서는 이 말이 여전한 진리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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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거치는 놈이 많아지면 빼먹는 놈의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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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어머니께서 배를 좋아하셔서 좋은 배를 사가려 한 것인데... 임금님 드시는 맛 좋은 배는 어머니께 가져다드리지 못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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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죽을죄’로 본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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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는 이가 배 한, 두 개 훔치다 걸렸을 때라도 아프신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려 했다고 말하면 인심 좋은 사람들은 그냥 내어줄 정도로 ‘효도’에 공감하고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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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보니 내가 효도를 위해 특산품을 사고 싶다고 말한 것에,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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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침울해하는 척을 하자, 옆에서 조용히 탁주를 마시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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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임금님께 진상하는 배라고 해서 막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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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전하께 진상하는 것이면 당연히 제일 좋은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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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를 마시던 남자가 탁배기를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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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소인이 이번에 공납으로 바치는 배를 취급하는 상단에서 일하고 있어서 잘 압니다. 확실히 전하께 바치는 물건이니 질이 떨어지는 걸 바치지는 않습니다만... 사찰과 수령이 한 몸이 되어서 ‘뇌물’을 받고, 그 대가로 공물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다 보니. 그냥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배를 진상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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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품질 관리 시스템, 등급 시스템 같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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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의 경우 1++등급, 1+등급 같은 걸로 등급을 매기지도 않고, 과일도 크기와 당도를 측정해 가면서 최고급품인지 하급품인지를 따지지 않는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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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양만 멀쩡하면 최상품이라 말하며 진상품으로 바쳐도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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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관아, 상인들이 짜고 진짜 최상품이 아닌 적당한 수준의 물건을 공물로 바쳐도 단속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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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없는데, 어떻게 단속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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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좋은 배를 사시고 싶으면, 소인이 소개를 좀 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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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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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짓하자 김만덕이 그 남자에게 부채를 하나 건네줬다. 조선에서는 여름이면 누구나 부채를 쓰기 때문에 제법 효용성 있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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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마다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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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 뭐 고을에 재미있는 소문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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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가 하는 일은 고을을 감찰하다가, 문제가 발견되면 관아 창고를 걸어 잠그고 서류 뒤져가면서 압수수색을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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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암행어사가 검찰 수사와 다를 게 없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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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도 안 해본 압수수색을 실제로 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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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리들은 박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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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 계급, 위치, 노동 강도에 비하면 실질 급여가 아주 낮게 측정된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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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현대 국가에서는 공직의 선호도가 내려가기 마련이나, 조선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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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봉이 너무 낮으면, 자신들에게 맞는 수입을 자체 조달하는 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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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법이 시행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돈 빼돌릴 구석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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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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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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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군수 이석도는 관직 생활 20년 차에 달하는 관록을 활용해서 '돈이 나올 구석'과 '돈을 빼돌려도 들키지 않는 법' 정도는 이미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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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납은 잘 준비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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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사또. 방원법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수취하는 것이 좀 힘들어졌다고 하나, 어찌 방법이 없겠습니까. 궁여지책이라고, 궁하면 다 통하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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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아주 바람직해. 자네 같이 훌륭한 아전은 내 관직 생활 20년을 하면서 처음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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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입니다,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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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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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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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은 이방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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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부패, 아니 현명한 아전이 우리 고을 이방이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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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늘 써왔지만 법에는 걸리지 않는 방법을 썼습니다요. 사찰에다가 주는 수고비를 기존의 1할(10%)로 줄이고, 상인들에게는 공납으로 바칠 공물을 적절한 가격으로 내놓지 않으면 엄히 감찰하겠다고 교육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전의 5할(50%)도 안 되는 가격으로 공물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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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도는 무심코 무릎을 탁 쳐버릴 뻔했다. 이방의 수가 신묘하다 생각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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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가지 이해가 잘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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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법에서는 사찰을 경유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굳이 사찰을 중간에 끼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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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을 마련하는 데 사찰이 관여하면 그들에게 수고비를 줘야 하지 않은가? 왜 땡중들에게 아까운 쌀을 줘가면서 공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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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은 이전부터 저희와 거래를 해왔을뿐더러, 상인들과 직접 관이 거래를 하게 되면 공물의 단가가 제법 많이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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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도는 그의 말을 듣고서 대충 눈치를 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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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비 1할 중 절반 이상은 이방과 다른 아전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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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에서 관직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생하는 자세가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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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들이 '수고'를 했으니 약간의 수고비 받는 거 정도를 눈감아 주지 않는다면 사또 해 먹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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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눈감아주는 거랑 아예 모르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법, 이석도는 가벼운 경고는 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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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이 관아의 일을 맡아서 한다고 설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네. 안 그러면, 나는 조선의 수령으로서 저들을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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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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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이번에 걷은 공물 대금은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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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백미 15,841섬을 걷었고, 올해에는 19,432섬이 걷혔습니다. 작황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양반 나리들의 땅에서도 예외 없이 징수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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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세금 징수법은 부자와 가난한 이의 소득 차이를 대충 고려하고, 그냥 인두세 매기듯이 호 단위로 과세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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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부자에게는 실질 징수율 5%, 가난한 이들에게는 50%가 넘는 과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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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여타 다른 나라들과 같이 대부분의 부가 일부 부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적게 과세하다 보니 세금이 늘 부족했던 것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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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부자,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토지 면적 단위로 공물을 징수하게 되니 합리적인 과세가 이루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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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은 늘었는데, 백성들은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 찬양을 부르다니. 역시 방원법, 아니 방원법의 토대를 마련한 김 죽헌(김대붕의 호)은 대단한 사람이야. 조선에 참 큰 인물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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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도는 김대붕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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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법을 바꿔준 덕분에 공물은 더 많이 걷히고, 공물 거래의 기초를 바로 잡아준 덕분에 이전보다 더 싼 가격에 공물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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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해먹을 구석이 이전보다 많아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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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이석도는 20년에 걸쳐 관직 생활을 해왔지만, 방원법과 같은 조세법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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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법을 제안한 김대붕과 자신의 능력은 비교 자체가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그를 질투하거나 시기할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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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미리 경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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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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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법을 올바르게 시행하셔서 백성들이 태상왕 전하 천세를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면 사또께서 장차 당상관 자리에 오르는 것도 먼 얘기는 아닐 것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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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당상의 자리는 전하께서 직접 낙점하셔야만 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 망령된 말을 함부로 꺼내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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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도는 화를 벌컥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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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방은 그 소리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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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컥 화내는 척하면서 얼른 더 아부해 보라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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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도 백성을 위하는 사또의 정성을 다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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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 으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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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인사고과만큼은 상상(최고등급)일 것입니다,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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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된다면 내 이방을 비롯한 육방들에게도 크게 사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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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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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군의 1인 자, 2인 자는 그렇게 ‘앞으로도 우리 잘해 먹자.’는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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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새로 들어온 춘향이라는 관기가 미색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또께서 번거로우시겠지만, 그 아이의 머리를 올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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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이방,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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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갈수록 규제는 약해질 것이니, 앞으로는 더 많은 재물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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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잘 통해서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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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의 머리를 올린다는 것은 첫 경험을 가져간다는 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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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석도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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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면 첩으로 데리고 올라가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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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석도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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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붕이 안성 관아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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