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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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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에서 한때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진리가 있다.
중간에 거치는 중간 상인, 운송 업자의 숫자를 최소화해야 물건 가격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원가 100원도 안 하는 배추가 중간 상인을 한 명 거치면 200원, 도매 상인을 거치고 나면 280원, 경매장을 거치면 380원, 야채 소매점을 가면 500원이 되었는데...
배추 농사짓는 집에서 직접 야채 가게나 대형마트에 팔게 되면 300원 정도에 팔 수가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 사실을 믿고 항구 도시 같은 데 가서 회를 먹게 되면 신선도야 물론 뛰어나겠지만, 값은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 비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건 21세기 현대 사회의 이야기고 조선에서는 이 말이 여전한 진리로 통한다.
중간에 거치는 놈이 많아지면 빼먹는 놈의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허, 어머니께서 배를 좋아하셔서 좋은 배를 사가려 한 것인데... 임금님 드시는 맛 좋은 배는 어머니께 가져다드리지 못하겠군.”
조선에서는 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죽을죄’로 본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돈 없는 이가 배 한, 두 개 훔치다 걸렸을 때라도 아프신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려 했다고 말하면 인심 좋은 사람들은 그냥 내어줄 정도로 ‘효도’에 공감하고 집착한다.
그렇다 보니 내가 효도를 위해 특산품을 사고 싶다고 말한 것에,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내가 침울해하는 척을 하자, 옆에서 조용히 탁주를 마시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리, 임금님께 진상하는 배라고 해서 막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전하께 진상하는 것이면 당연히 제일 좋은 것이 아니겠나?”
탁주를 마시던 남자가 탁배기를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
"나리, 소인이 이번에 공납으로 바치는 배를 취급하는 상단에서 일하고 있어서 잘 압니다. 확실히 전하께 바치는 물건이니 질이 떨어지는 걸 바치지는 않습니다만... 사찰과 수령이 한 몸이 되어서 ‘뇌물’을 받고, 그 대가로 공물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다 보니. 그냥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배를 진상할 뿐입니다."
조선에는 품질 관리 시스템, 등급 시스템 같은 게 없다.
한우의 경우 1++등급, 1+등급 같은 걸로 등급을 매기지도 않고, 과일도 크기와 당도를 측정해 가면서 최고급품인지 하급품인지를 따지지 않는다는 거다.
즉, 모양만 멀쩡하면 최상품이라 말하며 진상품으로 바쳐도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것이니...
사찰, 관아, 상인들이 짜고 진짜 최상품이 아닌 적당한 수준의 물건을 공물로 바쳐도 단속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기준이 없는데, 어떻게 단속하겠는가.
"안동에 좋은 배를 사시고 싶으면, 소인이 소개를 좀 해드릴까요?"
"부탁하지."
내가 눈짓하자 김만덕이 그 남자에게 부채를 하나 건네줬다. 조선에서는 여름이면 누구나 부채를 쓰기 때문에 제법 효용성 있는 물건이다.
이거 마다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그거 말고 뭐 고을에 재미있는 소문은 없나?"
암행어사가 하는 일은 고을을 감찰하다가, 문제가 발견되면 관아 창고를 걸어 잠그고 서류 뒤져가면서 압수수색을 하는 거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암행어사가 검찰 수사와 다를 게 없다고 하는데...
전생에도 안 해본 압수수색을 실제로 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
조선의 관리들은 박봉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 계급, 위치, 노동 강도에 비하면 실질 급여가 아주 낮게 측정된 것에 가깝다.
보통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현대 국가에서는 공직의 선호도가 내려가기 마련이나, 조선은 다르다.
녹봉이 너무 낮으면, 자신들에게 맞는 수입을 자체 조달하는 것이 상식이다.
방원법이 시행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돈 빼돌릴 구석은 많다.
"김 이방."
"예, 사또."
안성 군수 이석도는 관직 생활 20년 차에 달하는 관록을 활용해서 '돈이 나올 구석'과 '돈을 빼돌려도 들키지 않는 법' 정도는 이미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다.
"공납은 잘 준비했는가?"
"물론입니다, 사또. 방원법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수취하는 것이 좀 힘들어졌다고 하나, 어찌 방법이 없겠습니까. 궁여지책이라고, 궁하면 다 통하는 법이죠."
"...... 흠, 아주 바람직해. 자네 같이 훌륭한 아전은 내 관직 생활 20년을 하면서 처음 보았어."
"영광입니다, 사또."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인가?"
이방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석은 이방이 좋았다.
저렇게 부패, 아니 현명한 아전이 우리 고을 이방이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가 늘 써왔지만 법에는 걸리지 않는 방법을 썼습니다요. 사찰에다가 주는 수고비를 기존의 1할(10%)로 줄이고, 상인들에게는 공납으로 바칠 공물을 적절한 가격으로 내놓지 않으면 엄히 감찰하겠다고 교육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전의 5할(50%)도 안 되는 가격으로 공물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석도는 무심코 무릎을 탁 쳐버릴 뻔했다. 이방의 수가 신묘하다 생각되었기에.
그러나 한 가지 이해가 잘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방원법에서는 사찰을 경유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굳이 사찰을 중간에 끼운단 말인가?
"공물을 마련하는 데 사찰이 관여하면 그들에게 수고비를 줘야 하지 않은가? 왜 땡중들에게 아까운 쌀을 줘가면서 공납을..."
"승려들은 이전부터 저희와 거래를 해왔을뿐더러, 상인들과 직접 관이 거래를 하게 되면 공물의 단가가 제법 많이 오르게 됩니다."
이석도는 그의 말을 듣고서 대충 눈치를 챘다.
수고비 1할 중 절반 이상은 이방과 다른 아전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관직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생하는 자세가 중요한 법이다.
아전들이 '수고'를 했으니 약간의 수고비 받는 거 정도를 눈감아 주지 않는다면 사또 해 먹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감아주는 거랑 아예 모르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법, 이석도는 가벼운 경고는 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승려들이 관아의 일을 맡아서 한다고 설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네. 안 그러면, 나는 조선의 수령으로서 저들을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또."
"그건 그렇고 이번에 걷은 공물 대금은 얼마인가?"
"작년에는 백미 15,841섬을 걷었고, 올해에는 19,432섬이 걷혔습니다. 작황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양반 나리들의 땅에서도 예외 없이 징수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다."
이전의 세금 징수법은 부자와 가난한 이의 소득 차이를 대충 고려하고, 그냥 인두세 매기듯이 호 단위로 과세하는 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자에게는 실질 징수율 5%, 가난한 이들에게는 50%가 넘는 과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도 여타 다른 나라들과 같이 대부분의 부가 일부 부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적게 과세하다 보니 세금이 늘 부족했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부자,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토지 면적 단위로 공물을 징수하게 되니 합리적인 과세가 이루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세금은 늘었는데, 백성들은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 찬양을 부르다니. 역시 방원법, 아니 방원법의 토대를 마련한 김 죽헌(김대붕의 호)은 대단한 사람이야. 조선에 참 큰 인물이 났어."
이석도는 김대붕이 좋았다.
세법을 바꿔준 덕분에 공물은 더 많이 걷히고, 공물 거래의 기초를 바로 잡아준 덕분에 이전보다 더 싼 가격에 공물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해먹을 구석이 이전보다 많아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석도는 20년에 걸쳐 관직 생활을 해왔지만, 방원법과 같은 조세법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에.
그런 법을 제안한 김대붕과 자신의 능력은 비교 자체가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그를 질투하거나 시기할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사또, 미리 경하드립니다."
"무엇을 말인가?"
"방원법을 올바르게 시행하셔서 백성들이 태상왕 전하 천세를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면 사또께서 장차 당상관 자리에 오르는 것도 먼 얘기는 아닐 것이 옵니다."
"어허, 당상의 자리는 전하께서 직접 낙점하셔야만 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 망령된 말을 함부로 꺼내는 것이냐?"
이석도는 화를 벌컥 냈다.
그러나 이방은 그 소리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벌컥 화내는 척하면서 얼른 더 아부해 보라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도 백성을 위하는 사또의 정성을 다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으흠, 으흠."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인사고과만큼은 상상(최고등급)일 것입니다, 사또."
"그리된다면 내 이방을 비롯한 육방들에게도 크게 사례하지."
"감사합니다, 사또."
안성군의 1인 자, 2인 자는 그렇게 ‘앞으로도 우리 잘해 먹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고 보니 새로 들어온 춘향이라는 관기가 미색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또께서 번거로우시겠지만, 그 아이의 머리를 올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김 이방,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보지."
"해가 갈수록 규제는 약해질 것이니, 앞으로는 더 많은 재물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이 잘 통해서 좋군."
기녀의 머리를 올린다는 것은 첫 경험을 가져간다는 은어다.
그러니 이석도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마음에 들면 첩으로 데리고 올라가면 그만...
그러나 이석도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할 것이다.
김대붕이 안성 관아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