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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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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달콤하지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여행 가기 전 계획을 짤 때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엄청나게 들뜨는데.
막상 여행을 떠날 시간이 되니 실감이 잘 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치만 이것도 내가 한양을 떠나 고향에 도착한 뒤 부모님 얼굴을 뵙게 되면 실감이란 게 확 올 거다.
원래 자신이 여행 떠난 것을 실감하는 때가 공항에 도착한 다음부터라고 말하지 않는가.
“수찬 나리.”
“그냥 나리라 부르도록. 이제 집현전 수찬이 아니니까.”
한국에서는 사직서를 냈다고 해서 바로 퇴직 처리가 되는 게 아니고,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약간의 시간을 두고 퇴사 처리가 되지만.
조선은 다르다.
당상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임금이 직접 허락해줘야 퇴사가 결정되지만, 나는 일개 정6품 참상관이니 사직상소를 내게 되면 무조건 통과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직상소를 양식에 맞춰 써서 제출한 지금부터 나는 이사 준비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해도 되는 거다.
아, 맞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겨울이랑 진지하게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가져야 하니까, 데면데면한 말투를 쓰면 안 되겠구나.
조선에는 연애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둘은 이미 사귀는 사이나 마찬가지다.
“겨, 겨울아.”
고작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 분위기도 쓸데없이 무거워진 것 같고 말이다.
아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 거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냥 내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여자 이름을 편하게 못 부르는 것뿐이다.
한국에서야 친한 사이가 아니어도 여자 이름을 부를 기회가 많지만, 조선에서는 남녀 모두 실명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
지금 내가 ‘겨울아’라고 부른 건 사실상 ‘여보, 당신, 자기’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기도하고 말이다.
“예, 나리.”
우리 둘 사이에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겨울이는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달아오른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 역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하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니 이번엔 겨울이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몹시 난감하다.
난감하고 곤란한 상황이지만 이게 또 좋다. 미치겠다. 이러다가 손이라도 잡으면...
머릿속이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 차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때 겨울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녀는 나리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까 염려가 됩니다."
"내가 왜 마음이 상하겠어? 조선에서 관직하다가 탄핵당하는 거야 일상다반사인데, 뭘."
청렴결백, 원리 원칙을 너무 잘 지켜서 현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사회성이 없는 게 틀림없다 의심받는 이순신 장군님도 수없는 탄핵을 당하였다.
이유는 터무니가 없다.
어디 군진의 무관으로 부임했으면 상관에게 '선물'을 보내고, 한양에 있는 문관, 무관들에게도 선물을 보내는 것이 조선의 상식인데... 이순신 장군님은 그걸 안 지켰기 때문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청백리로 칭송받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존중은 받을 일이다.
우리가 알기 쉽게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식비를 1끼 10만 원까지 제공하는 데도 회삿돈을 사사롭게 쓸 수 없다며 자기 월급으로 밥을 사 먹는 것 그 이상이겠지.
그래서 이순신 장군님도 벼슬이 몇 번이나 갈렸었는데, 그분보다 무능한 내가 피할 수 있겠는가.
"소녀는 정치에 관한 것은 잘 모르지만, 나리께서는 진해 현감으로 계실 때부터 항상 백성들의 처지만을 살피시고 부정과 부패를 멀리하셨습니다. 그리고 태상왕 전하께서 화폐를 시행하려 하시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면서 충언을 올리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야.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
"아버님은 나리께서 그 당연한 일을 하신 덕분에 건진 목숨이 수천, 수만에 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지만, 자나 깨나 종묘사직과 백성들만을 생각하시는 나리께 어찌 이리 모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겨울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 역시 말은 저렇게 하였지만 억울한 심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나를 일에 미친 괴물, 감정도 없는 일벌레라 생각하겠지만, 나라고 뭐 사람이 아닌 줄 아나.
억울하게 욕을 먹으면 당연히 울화통이 터지고, 탄핵을 당하면 속이 뒤틀리지.
"나리께서는 그저 백성을 위하셨을 뿐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와 제 아버님 때문에 이리 모질게 탄핵을 당하여, 청운의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시고 낙향하게 되다니... 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사실 탄핵당한 건 속이 뒤집히는 일이긴 한데... 딱 봐도 류정현이랑 그 일파가 사주해서 한 탄핵이라 한편으로 몹시 기뻤다.
당상관이라면 몰라도, 참상관 나부랭이는 탄핵당해서 사직상소 쓴다고 하면 임금의 허가 없이 낙향해도 합법이거든.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하면 확실히 나라를 위해 종신 영의정하고 싶은 충신처럼 오해하기 딱 좋은 면이 있으니... 오해는 좀 풀어 줘야겠다.
"나는 상관없어."
"나리."
"양반 사대부 집안의 남아로 태어나 조선을 백 년, 아니 천 년도 넘게 번영시킬 방원법의 기틀을 짰어. 방원법이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면, 당연히 내 이름도 널리 퍼질 거야."
내가 죽고 난 다음 역사 교과서에는 '방원법'이 자세하게 적힐 거다. 그리고 거기에는 방원법과 지부상소 이야기, 방원법의 기틀을 짠 김대붕 이야기가 나오겠지.
그리고 김대붕이 낙향한 이유를 분석한 논문들도 잔뜩 나올 거다. 아마 이 세계의 석사, 박사, 교수들은 나의 행적을 연구하면서 매우 이상하다 생각할 거다.
내가 뭐 갤러리에서 파딱, 인정받는 네임드 고닉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양반도 아니고, 굳이 억지로 안 해도 될 일을 왜 해. 일을 죽어라 하면 할 수록 '황희', '조말생', '맹사성', '장영실' 당할 뿐인데.
나는 손을 뻗어서 겨울이의 손을 잡았다.
생전 접해 보지 못한 세상 부드러운 촉감에 순간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꽉 붙잡았다.
겨울이도 내 손길이 싫지는 않은 듯, 정색하거나 손을 잡아 빼지는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그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일 뿐이다.
뭐 손잡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할 거지만...
더 해도 되기는 할 것 같은데, 내 깜냥이 거기까지 안 된다.
"이제 고향 양구현으로 돌아가면, 우리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리자."
겨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선 시대에 첩을 들일 때는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아주 옳은 말이 아니다.
노비인 여자를 첩으로 들일 때는 혼례식을 올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지만, 자기 집 노비를 첩으로 들이는 게 아닌 이상에야 아주 간단하게나마 식을 올렸다.
그런데 겨울이는 엄연한 양민, 즉 서첩(천민이 아닌 양민 첩)을 들이는 것이니 혼례는 당연히 치러야 한다. 뭐, 양반 가문끼리의 결혼식처럼 말도 안 되게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내가 아무리 규모를 키워 봐야, 현대 결혼식처럼 후다닥 해치우는 마을 잔치 비슷한 형태가 되겠지만 말이다.
"...... 나리."
"나는 따로 본처를 맞아들여야 하겠지만, 겨울이 네가 본처에게 바가지를 긁히거나 하는 건 원하지 않아. 그러니 가능하면 최대한 한미한 가문의 여자를 처로 들일 생각이야.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아무리 양반이라도 친정이 가난하면, 돈 많은 상인 집안에서 들여 온 첩을 마구잡이로 잡아대지는 못할 거다. 그랬다가는 내가 소박을 때려 버릴 생각도 있고 말이다.
"혼례를 올린 다음에는..."
조선의 연애라는 건 사실 결혼 전에 하는 게 아니라, 결혼 하고 난 다음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결혼부터 하고 연애한다는 게 웃기기는 한데... 결혼하고 데이트하는 게 뭐가 나빠.
"월명호에 가서 뱃놀이도 하고, 단풍 보러 산에도 올라가고, 바다도 가서 방금 잡아 만든 맛있는 생선 요리도 먹어보자. 그러다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아이들도 같이 데려가는 거지. 그러면 더 좋겠네."
지금 내가 전생한 시기는 '조선 초기'라서 이래도 된다. 사람들이 나보고 이상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아주 큰 흠이 되는 건 아니니.
"...... 네, 꼭 저를 데려가 주세요."
겨울이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잡은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잠시 뒤 겨울이가 조용히 내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가는걸 확인한 뒤 바로 상소 쓸 준비를 하였다.
사직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는 건 물러나는 거고, 나를 물 먹인 놈에게 복수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어디 보자, 역사에 남은 류정현의 악담이 뭐였지...?"
저놈은 고리대금 잘하기로 유명한 놈이다.
장리(이자율 50%), 갑리(이자율 100% 이상)의 대출을 이리저리 난사하고 다녔던 놈이다.
21세기 현대 국가에서는 이런 대출은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어 버리지만, 조선에서는 이게 모두 합법이다.
세종대왕님이 이걸 어떻게든 단속하여 이자율을 낮추시기는 하지만 아직은 전혀 문제 되는 사항이 아니니... 이건 내려놓고...
"아, 생각해 보니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고리대금업하면서 돈 수금을 잔혹하게 잘하는 놈에게 벼슬자리를 줬었지?"
대동법을 반대하고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냥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가만 있는 나를 탄핵해...?
아무래도 이번엔 안 되겠다.
넌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