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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달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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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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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기 전 계획을 짤 때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엄청나게 들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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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여행을 떠날 시간이 되니 실감이 잘 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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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이것도 내가 한양을 떠나 고향에 도착한 뒤 부모님 얼굴을 뵙게 되면 실감이란 게 확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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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신이 여행 떠난 것을 실감하는 때가 공항에 도착한 다음부터라고 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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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찬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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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리라 부르도록. 이제 집현전 수찬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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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사직서를 냈다고 해서 바로 퇴직 처리가 되는 게 아니고,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약간의 시간을 두고 퇴사 처리가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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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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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임금이 직접 허락해줘야 퇴사가 결정되지만, 나는 일개 정6품 참상관이니 사직상소를 내게 되면 무조건 통과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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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사직상소를 양식에 맞춰 써서 제출한 지금부터 나는 이사 준비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해도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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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겨울이랑 진지하게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가져야 하니까, 데면데면한 말투를 쓰면 안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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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연애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둘은 이미 사귀는 사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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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겨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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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 분위기도 쓸데없이 무거워진 것 같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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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 거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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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여자 이름을 편하게 못 부르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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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야 친한 사이가 아니어도 여자 이름을 부를 기회가 많지만, 조선에서는 남녀 모두 실명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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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겨울아’라고 부른 건 사실상 ‘여보, 당신, 자기’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기도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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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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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 사이에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겨울이는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달아오른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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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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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니 이번엔 겨울이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몹시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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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고 곤란한 상황이지만 이게 또 좋다. 미치겠다. 이러다가 손이라도 잡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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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 차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때 겨울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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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나리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까 염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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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마음이 상하겠어? 조선에서 관직하다가 탄핵당하는 거야 일상다반사인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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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결백, 원리 원칙을 너무 잘 지켜서 현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사회성이 없는 게 틀림없다 의심받는 이순신 장군님도 수없는 탄핵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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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터무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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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군진의 무관으로 부임했으면 상관에게 '선물'을 보내고, 한양에 있는 문관, 무관들에게도 선물을 보내는 것이 조선의 상식인데... 이순신 장군님은 그걸 안 지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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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청백리로 칭송받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존중은 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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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기 쉽게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식비를 1끼 10만 원까지 제공하는 데도 회삿돈을 사사롭게 쓸 수 없다며 자기 월급으로 밥을 사 먹는 것 그 이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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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순신 장군님도 벼슬이 몇 번이나 갈렸었는데, 그분보다 무능한 내가 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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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정치에 관한 것은 잘 모르지만, 나리께서는 진해 현감으로 계실 때부터 항상 백성들의 처지만을 살피시고 부정과 부패를 멀리하셨습니다. 그리고 태상왕 전하께서 화폐를 시행하려 하시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면서 충언을 올리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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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야.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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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나리께서 그 당연한 일을 하신 덕분에 건진 목숨이 수천, 수만에 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지만, 자나 깨나 종묘사직과 백성들만을 생각하시는 나리께 어찌 이리 모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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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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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말은 저렇게 하였지만 억울한 심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나를 일에 미친 괴물, 감정도 없는 일벌레라 생각하겠지만, 나라고 뭐 사람이 아닌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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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욕을 먹으면 당연히 울화통이 터지고, 탄핵을 당하면 속이 뒤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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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께서는 그저 백성을 위하셨을 뿐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와 제 아버님 때문에 이리 모질게 탄핵을 당하여, 청운의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시고 낙향하게 되다니... 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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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탄핵당한 건 속이 뒤집히는 일이긴 한데... 딱 봐도 류정현이랑 그 일파가 사주해서 한 탄핵이라 한편으로 몹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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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관이라면 몰라도, 참상관 나부랭이는 탄핵당해서 사직상소 쓴다고 하면 임금의 허가 없이 낙향해도 합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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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하면 확실히 나라를 위해 종신 영의정하고 싶은 충신처럼 오해하기 딱 좋은 면이 있으니... 오해는 좀 풀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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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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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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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사대부 집안의 남아로 태어나 조선을 백 년, 아니 천 년도 넘게 번영시킬 방원법의 기틀을 짰어. 방원법이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면, 당연히 내 이름도 널리 퍼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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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고 난 다음 역사 교과서에는 '방원법'이 자세하게 적힐 거다. 그리고 거기에는 방원법과 지부상소 이야기, 방원법의 기틀을 짠 김대붕 이야기가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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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대붕이 낙향한 이유를 분석한 논문들도 잔뜩 나올 거다. 아마 이 세계의 석사, 박사, 교수들은 나의 행적을 연구하면서 매우 이상하다 생각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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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 갤러리에서 파딱, 인정받는 네임드 고닉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양반도 아니고, 굳이 억지로 안 해도 될 일을 왜 해. 일을 죽어라 하면 할 수록 '황희', '조말생', '맹사성', '장영실' 당할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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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을 뻗어서 겨울이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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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접해 보지 못한 세상 부드러운 촉감에 순간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꽉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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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도 내 손길이 싫지는 않은 듯, 정색하거나 손을 잡아 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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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그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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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손잡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할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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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해도 되기는 할 것 같은데, 내 깜냥이 거기까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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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향 양구현으로 돌아가면, 우리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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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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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첩을 들일 때는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아주 옳은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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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인 여자를 첩으로 들일 때는 혼례식을 올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지만, 자기 집 노비를 첩으로 들이는 게 아닌 이상에야 아주 간단하게나마 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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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겨울이는 엄연한 양민, 즉 서첩(천민이 아닌 양민 첩)을 들이는 것이니 혼례는 당연히 치러야 한다. 뭐, 양반 가문끼리의 결혼식처럼 말도 안 되게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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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규모를 키워 봐야, 현대 결혼식처럼 후다닥 해치우는 마을 잔치 비슷한 형태가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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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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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따로 본처를 맞아들여야 하겠지만, 겨울이 네가 본처에게 바가지를 긁히거나 하는 건 원하지 않아. 그러니 가능하면 최대한 한미한 가문의 여자를 처로 들일 생각이야.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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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양반이라도 친정이 가난하면, 돈 많은 상인 집안에서 들여 온 첩을 마구잡이로 잡아대지는 못할 거다. 그랬다가는 내가 소박을 때려 버릴 생각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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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를 올린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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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연애라는 건 사실 결혼 전에 하는 게 아니라, 결혼 하고 난 다음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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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부터 하고 연애한다는 게 웃기기는 한데... 결혼하고 데이트하는 게 뭐가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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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호에 가서 뱃놀이도 하고, 단풍 보러 산에도 올라가고, 바다도 가서 방금 잡아 만든 맛있는 생선 요리도 먹어보자. 그러다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아이들도 같이 데려가는 거지. 그러면 더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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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전생한 시기는 '조선 초기'라서 이래도 된다. 사람들이 나보고 이상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아주 큰 흠이 되는 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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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꼭 저를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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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잡은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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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겨울이가 조용히 내 방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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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나가는걸 확인한 뒤 바로 상소 쓸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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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는 건 물러나는 거고, 나를 물 먹인 놈에게 복수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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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역사에 남은 류정현의 악담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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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은 고리대금 잘하기로 유명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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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이자율 50%), 갑리(이자율 100% 이상)의 대출을 이리저리 난사하고 다녔던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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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대 국가에서는 이런 대출은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어 버리지만, 조선에서는 이게 모두 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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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님이 이걸 어떻게든 단속하여 이자율을 낮추시기는 하지만 아직은 전혀 문제 되는 사항이 아니니... 이건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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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생각해 보니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고리대금업하면서 돈 수금을 잔혹하게 잘하는 놈에게 벼슬자리를 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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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을 반대하고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냥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가만 있는 나를 탄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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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번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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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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